348화 낭만을 잃은 나라 (6)
하루 전.
알바레즈를 비롯한 최상위 랭커들은 이미 소집령(召集令)을 전달받았다.
전쟁을 대비해서 미리 수도로 들어오라는 내용이었고, 덕분에 고메스 백작이 지시를 내렸을 때 그들은 수도에 있었다.
2위부터 9위까지.
발할라의 랭커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알바레즈는 익숙한 얼굴들을 둘러보며,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겨우 이게 전부라니. 발할라도 예전 같지가 않네.”
소집에 응한 랭커.
그들의 숫자는 겨우 다섯에 불과했다.
10위의 발데라스와 3위의 아레스가 소집에 불응한 것을 고려해도, 무려 2명의 자리가 공석이었다.
이유는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났을 그때. 발할라의 상위 랭커들이 상당수 목숨을 잃었다.
6위의 바르보사, 7위의 로드리게스, 12위의 모랄레스가 죽으면서, 발할라 황실은 일시적으로 발할라의 랭킹을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죽은 사람만 셋일 뿐.
발할라 황실을 등진 사람들을 포함하면 다섯이었다.
발할라 황실은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황제의 사람들로 물갈이하기 위해 나중에 전체적인 순위 결정전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보름이면 보름. 일정 기간 랭커들의 경쟁을 부추겨, 다시 한번 황제의 사람들로 랭킹을 재구성하려는 속셈이었다.
발할라 랭킹 5위.
트론이 말했다.
“이게 다 로만 드미트리 때문입니다. 그 녀석 때문에 모랄레스가 뒈지고, 바르보사가 뒈지고, 로드리게스까지 황천길을 건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레스도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겠다고 발할라를 떠났고, 비에토 공작은 드미트리와 결탁해 이번 반란을 결심했습니다. 그 말은 마지막 한 자리인 발데라스의 공백도, 사실상 로만 드미트리와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웃기는 상황이군.”
알바레즈가 웃었다.
발할라.
전사의 나라가 대체 어떻게 이리되었단 말인가.
사람들은 발할라 축제에 있었던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지만, 그날로 인해 발할라 황실은 상위 랭커 절반을 잃어버렸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한때는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제외하고는 대륙 랭킹을 감히 넘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었는데, 로만 드미트리라는 돌연변이 하나가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알바레즈는, 발할라의 이인자로서 말했다.
“발할라는 지금 격변(激變)의 시기를 맞이했다. 늘 그렇듯, 황제 폐하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그만한 대가를 부여받을 것이다. 고메스 백작님이 곧 우리를 불러들일 것이다. 미리 움직여, 전쟁을 준비하도록.”
“예.”
“그럽시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의외의 얼굴이, 그들의 걸음을 막아섰다.
“다들 오랜만이네.”
은발의 사내.
아레스의 등장에, 알바레즈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 * *
아레스.
발할라의 역린이었다.
발할라 태생에, 발할라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그가, 현재 드미트리 가문에 충성을 맹세했다.
알바레즈가 사나운 표정을 보였다.
“배신자 새끼. 무슨 자신감으로 여길 찾아온 거지?”
“배신자라니. 나는 아직, 발할라 랭킹에서 제명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히죽, 웃었다.
아레스의 말대로였다.
아레스는 분명히 발할라를 이탈했지만, 발할라 황실은 이 사실을 문제 삼아 그를 제명하지 않았다.
이유는 황제의 권위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난 것으로도 모자라 아레스를 제명한다면, 일반 사람들은 아레스가 황제를 버리고 드미트리 가문을 따라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굳이 행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순위 결정전을 진행할 것이기에, 지금은 역린이 될 수도 있는 사실을 잠시 묻어 두었다.
그런 존재가.
발할라에 나타났다.
그것도 당당히 워프 게이트를 통했고, 아레스는 알바레즈를 바라보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발할라 랭킹 3위 아레스. 랭킹 2위의 알바레즈를 상대로 결정전을 신청한다.”
“이 새끼가.”
순간.
다들 표정이 일그러졌다.
특히 랭킹 9위의 슈나이더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발끈했다.
“발할라를 버린 새끼가 결정전이라니!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슈나이더.
추억의 인물이었다.
아레스는 처음 대륙 십이검의 자리에 올랐을 때, 한때는 그중 한 자리를 차지했던 슈나이더를 쓰러트리며 명성을 쟁취했다.
그날의 충격은 대단했다.
슈나이더는 급격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고, 퇴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랭킹 9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레스가 말했다.
“결정전은 상위 랭커의 고유 권한이다. 네 녀석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지.”
슥.
검을 틀었다.
슈나이더를 겨누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원한다면 차례로 상대해 주겠다.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3위의 자리에서 날 끌어내려 결정전을 무산시켜도 좋다. 어떻게 하겠나, 슈나이더. 과거의 그날처럼, 날 쓰러트릴 자신이 있다면 검을 뽑아라.”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 누구도.
도전하겠다는 발언을 내뱉지 않았다.
아레스의 실력은 진짜였다.
겨우 5성의 오라 검사였던 아레스의 실력에는 의문이 매번 따라붙었고, 3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증명의 과정을 거쳤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한 번씩 패배했다.
압도적인 재능에 벽을 보았던 사람들로서는, 아레스를 상대하겠다는 말을 선뜻 내뱉을 수 없었다.
단 한 명.
알바레즈는 달랐다.
그가, 모두를 대신해 검을 뽑았다.
“건방진 새끼. 오냐, 결정전을 받아들이마.”
* * *
자리를 옮겼다.
발할라 신전.
알바레즈는, 아레스를 마주하며 이죽거렸다.
“사람들은 흔히들 착각하지. 발할라 최고의 재능이, 무패(無敗)의 전사일 것이라는 크나큰 착각을.”
3위의 아레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아레스가 알바레즈에게 도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비공식적으로 무려 3차례나 붙었었다.
그 결과 모두 패배했다. 아레스의 화려한 검술이 알바레즈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오라의 차이를 넘어서지 못했고, 그렇게 아레스는 정체의 시간을 보냈다.
“역사는 되풀이될 뿐이다, 아레스.”
슥.
검을 양옆으로 뻗었다.
알바레즈의 트레이드마크인 쌍검(雙劍)이었다.
대결을 주관하는 발할라의 사제가 신호를 보내자, 알바레즈와 아레스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펄럭.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빨랐다.
순식간에 두 사내의 모습이 뒤얽혔고, 두 존재는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거칠게 서로를 공격했다.
카앙!
카카카카카캉!
결렬한 격돌이었다.
대결을 지켜보는 발할라의 랭커들조차 제대로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십수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일련의 상황에 우위를 점한 존재는 바로 알바레즈였다.
알바레즈는 쌍검을 연속해서 휘두르는 방식으로 아레스를 몰아붙였고, 아레스는 차분하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순간의 틈을 노렸다.
번뜩.
아레스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엄청난 스피드로 바로 코앞을 지나쳤지만, 알바레즈는 고개를 살짝 트는 동작으로 공격을 피해 버렸다.
“어디서 개수작을!”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아레스는 검을 회수하며 공격을 막았지만,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몰아붙이는 공격은 아레스의 공간을 차단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앙!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레스와 알바레즈.
둘의 지난 대결은 어땠을까.
단순히 검술 실력은 아레스가 우위일지 몰라도, 알바레즈는 아레스를 압도하는 강력한 강점을 보유했다.
그것은 바로 쌍검의 폭발력이었다.
보통은 두 개의 무기를 사용하면 그만큼 폭발력이 분산되기 마련인데, 알바레즈는 쌍검을 사용하면서도 둘 다 폭발적인 오라를 분출시켰다.
그야말로 아레스의 천적(天敵)이었다.
6성과 5성.
오라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아레스는 검술로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쌍검으로 몰아치는 6성의 오라를 감당할 방법은 없었다.
이전에 쓰러트렸던 3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오라 자체도 파괴적인데 쉴 틈 없이 몰아붙이니, 아레스는 3번의 대결에서 3번 모두 패배의 쓴맛을 보았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아레스가 뒤로 밀려났다.
곧바로 따라붙으며 몰아치는 알바레즈의 모습에, 아레스의 오라가 파스스 밝은 빛깔을 뿌렸다.
“여전히 그따위 잡기술에 의존하는구나.”
오라의 파편.
오라를 흩뿌리는 기술이었다.
알바레즈가 오라의 바람을 일으켜 파편을 날려 보내자, 불쑥 아래에서 아레스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알바레즈의 대응은 매우 빨랐다.
아레스의 공격을 차분하게 막아 내더니,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을 파고들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공간에서 다시 한번 십수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격렬한 충돌 속에서 아레스는 정교하고 깔끔한 검법을 선보였지만, 어김없이 우위를 점하는 것은 알바레즈의 쌍검을 활용한 공격이었다.
콰앙!
위에서 내리찍고.
콰앙!
옆에서 쓸어 버렸다.
아레스가 뒤로 밀려나면 다시 따라붙더니, 내리찍었던 검을 어느새 회수해 아레스의 목을 노렸다.
훅.
콰르르르르르르릉.
간발의 차이였다.
아슬아슬하게.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었다.
이렇게까지 버텨 내는 것만으로도, 아레스의 실력이 발전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뿐.
승리는 알바레즈의 몫이었다.
알바레즈는 뒤를 모르는 황소처럼, 아레스를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강렬하게 몰아붙였다.
그런데.
카앙!
카카카카카카캉!
뭔가 이상했다.
상대를 공격할수록.
공방을 주고받을수록.
발이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이건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 * *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패인(敗因)은 오라의 차이였다.
계속되는 오라의 충돌에, 아레스의 오라가 약해지면서 결국은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상했다.
겨우 5성의 오라에 불과한데, 아무리 충돌해도 오라가 약해지질 않았다.
그때였다.
카앙-
“?!”
팔이 튕겨 나갔다.
처음으로.
알바레즈가 밀린 것이다.
아레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며, 상대를 비웃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수준이네.”
그때와 지금.
아레스는 달라졌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유는 오라의 차이를 메우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넘볼 수 없었던 6성의 벽을 함락시키고 싶었고, 크리스와 케빈의 행보는 그에 관한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둘은 낮은 오라로도 상위 오라 검사들을 쓰러트렸다.
성의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 아레스는 망설임 없이 발할라를 떠나 드미트리로 향했다.
그래서 공격을 받아 냈다.
과거와 똑같이.
패배했던 상황을 되풀이한 결과, 아레스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할 만하네.”
반발력이 덜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방식을 접목시키자, 쌍검으로 몰아치는 알바레즈의 공격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훅.
카앙!
그때부터였다.
아레스의 검술이 빛을 발했다.
알바레즈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신이 그를 주춤하게 했고, 아레스는 자신을 대륙 십이검의 자리에 올려놓은 검술을 펼쳤다.
숨이 막힐 정도로 깔끔한 검술이었다.
오른쪽을 막으면 왼쪽을, 왼쪽을 막으면 하체를, 하체를 막으면 다시 상단을 노리는 연계 공격에 머리가 팽팽 돌았다.
탁.
한 발 더.
공간을 파고들었다.
아레스가 절묘하게 검을 찔러 넣는 순간, 알바레즈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이다.’
화악.
콰르르르르르릉.
오라가 휘몰아쳤다.
어느새 회수한 쌍검을 교차하더니, 그대로 폭발하며 동시에 아레스의 몸을 갈라 버렸다.
알바레즈의 비기.
아레스가 오라의 차이를 메울 수 있다고 한들, 발할라 랭킹 2위의 자리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백, 수천 번의 대결 끝에 그 자리에 올랐다.
발할라의 최상위 랭커들은 그야말로 닳고 닳은 전사들.
상대가 기세를 타자 일부로 유도했고, 오라를 한 번에 폭발시키며 일점에 집중했다.
이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6성의 파괴력을 집중시킨 것은, 아레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한 끗.
공격이 아레스를 스쳐 지나갔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공격을 아레스가 반응해 낸 순간, 알바레즈는 오른팔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번뜩.
푸확.
팔이 날아갔다.
이를 악물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황급히 왼손의 검을 휘두르자, 왼팔마저도 허공에 떠올랐다.
“크악!”
몸이 비틀거렸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무너졌다.
경악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알바레즈의 모습에, 아레스가 천천히 다가갔다.
“알바레즈. 드미트리로 떠나기 전의 나는 정체하고 있었다.”
드미트리.
그곳에서 발전한 것은 오라만이 아니었다.
방금의 검술은, 자신을 위협했던 크리스의 쾌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흉내 낸 것이었다.
웃긴 일이다.
아레스는 단 한 번도 자신보다 낮은 경지의 검사들을 경계하지 않았는데, 크리스를 상대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드미트리에는 위험한 검사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위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아래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승리하고도 자신을 채찍질했다.
자신이 무너트렸던 상대의 모습을 되새기며, 그에게도 배울 것이 없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탁.
걸음을 멈추었다.
죽음을 직감한 알바레즈의 얼굴에, 아레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이것이, 내가 드미트리로 떠난 이유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가 일었다.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오라에, 알바레즈가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그것은.
분명히 6성의 오라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레스는 6성의 경지에 올랐다.
처음부터 자신을 압도할 수 있으면서도, 그는 일부러 5성의 오라를 사용하면서 핸디캡을 짊어졌다.
세 번의 패배를 무마하는 단 한 번의 대결을 위해. 감히 발할라의 이인자를 상대로 제약을 걸었다.
알바레즈는 생각했다.
아레스는.
단언컨대, 발할라 최고의 재능이었다.
푸확.
피가 튀었다.
전신이 갈기갈기 찢기며, 알바레즈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털썩.
그 뒤로.
눈을 부릅뜬 슈나이더와.
충격받은 표정으로 걸음을 멈춘 고메스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