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낭만을 잃은 나라 (8)
펄럭.
바람에 발할라의 국기가 휘날렸다.
그 아래로 북부 전선 최전방을 맡은 킬리안 후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적들의 상황은?”
“사전에 파악한 정보대로입니다. 드미트리-헥토르 연합군의 병력은 약 1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로만 드미트리가 지휘를 맡았습니다. 조심해야 할 부분은 피닉스 마탑의 펠릭스입니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가, 이번 연합군에 합류했습니다.”
펠릭스.
위험한 존재였다.
피닉스 마탑 특유의 강력한 화력은 공성전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보였고, 수성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킬리안 후작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펠릭스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발할라 제국은 이미 마법 방어에 대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부관을 지나, 로브를 눌러쓴 사내를 바라보았다.
“헤니르. 대비책은 마련되어 있나?”
“예.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 마운틴(Mountain)에서 성벽의 마법 방어를 꼼꼼하게 확인했으며, 적들이 플레어와 마법 공격을 동반한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마운틴은 발할라의 마탑 중 하나.
특히 수성에 특화되었다.
대지 마법을 위주로 사용하는 그들은, 발할라 황실의 명령에 이곳 북부 전선으로 보내졌다.
믿음의 원천이었다.
마운틴의 마탑주인 헤니르를 비롯해서 무려 100명의 마법사가 최전방 방어 진지에 자리를 잡았고, 덕분에 킬리안 후작은 마법 방어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벨피르 후작이 말한 기간은 약 열흘이었다.
일주일 안에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완전히 정리해 버리고, 열흘 안에 추가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열흘.
국경을 지키는 지휘관에게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것도 버티지 못한다면, 킬리안 후작은 발할라 북부 국경의 지휘관으로 발탁되지 못했을 것이다.
킬리안 후작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을 벗어나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위협용으로 국경을 넘은 것일 수도 있으나, 언제든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대비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열흘이다. 하지만 최소 한 달의 시간을 생각하라. 전장에서는 항상 변수가 생기는 법이고, 황실의 군대가 헤르나드를 점령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모될지라도 우리는 굳건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다들 비장한 기색을 보였다.
세상이 변했다.
불과 몇 년 전에는 드미트리-헥토르 연합군의 전력에 비웃음을 보였을 발할라 제국이, 로만 드미트리의 군대를 바라보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위상의 차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행보와 발할라에 남긴 발자취는, 방심이라는 감정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멈춘 연합군.
그들 사이로, 익숙한 형태의 물건이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끼익.
“플레어입니다.”
“마법사들도 있습니다.”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선택은 플레어와 마법 공격이었다.
일단 충분한 원거리 공격을 통해 성벽에 타격을 준 뒤에, 병력을 밀어 넣어 백병전(白兵戰)을 유도하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킬리안 후작이 눈짓을 주었다.
헤니르는 마법사들에게 제 자리를 지킬 것을 명령했고, 성벽 위로 100명의 마법사가 길게 서서 적들의 공격을 대비했다.
이윽고.
퉁.
투투투투퉁.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륵.
플레어가 불을 뿜었다.
대표적인 공성 병기.
타오르는 불길이 날아드는 모습에, 마운틴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일으켰다.
“스톤 실드(stone shield).”
“스톤 실드.”
화악.
허공에.
거대한 바위가 방패처럼 앞을 막았다.
일차적으로 플레어의 공격을 막은 뒤에, 성벽 자체의 마법 방어로 충격을 없애 버릴 의도였다.
정석적인 대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스톤 실드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파스스 소멸해 버린 것이다.
헤르나드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성벽 너머를 보았다.
“디스펠(dispel)?”
확실했다.
그리고 그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 * *
디스펠.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마법이다.
디스펠은 상대의 마법을 해제하는 효과가 있는데, 상대와 자신의 격차에 따라 난이도가 결정된다.
상대의 실력이 떨어진다면 간단한 계산만으로도 마법을 해제할 수 있지만, 상대의 실력이 월등하다면 그때부터는 그 어떠한 마법보다도 어려워지는 것이 바로 디스펠이었다.
드미트리의 대응.
특별한 건 없었다.
문제는 공성전에서 디스펠이 의미하는 바였다.
“감히 마운틴을 상대로, 디스펠로 우위를 보려고 하다니.”
성벽 위.
마운틴의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떡하니 버티는 상황에서 디스펠로 방어 마법을 해제하는 것은, 마법적인 역량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의도였다.
그게 헤니르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애초에 마법의 수준 자체도 마운틴이 월등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법사의 수도 마운틴이 많았다.
피닉스의 마법사들은 얼추 오십 명 내외였는데, 마운틴은 무려 100명의 마법사를 수성에 동원했다.
콰앙!
화르르르르르르륵.
플레어의 화염이 작렬했다.
디스펠의 효과는 마법사들의 방어 마법을 해제시킨 것일 뿐, 성벽 자체의 방어 마법은 무사했다.
파랗게 일어나는 실드가 플레어의 화염을 막아 냈다.
발할라가 공을 들여 설치한 것이기에, 하루 이틀 공격을 퍼붓는다고 할지라도 마법 방어가 부서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헤니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디스펠에 대비하라! 적들이 디스펠을 사용하면, 역으로 디스펠을 와해시켜 마운틴의 위엄을 보여 주어라!”
정면 승부였다.
서로 디스펠을 사용할 경우.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였다.
아무런 마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는 무의미한 공방일 테지만, 디스펠 승부에서 승리할 경우 마법적인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사실 보통은 서로 더 강력한 공격 마법, 방어 마법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정상이나, 디스펠로 시비를 걸어왔기에 헤니르는 물러나지 않았다.
퉁.
투투투투퉁.
또다시 발사되는 플레어.
마운틴의 마법사들이 방어 마법을 발현했다.
동시에, 그들은 상대가 디스펠로 방해할 것을 대비해서 마력을 일으켰다.
“스톤 실드.”
“스톤 실드.”
화악.
방어 마법이 형성되었다.
예상대로 곧바로 디스펠의 기운이 침투했다.
마운틴의 마법사들은 침착하게 디스펠의 기운에 대응했다.
마법의 체계를 갉아먹으며 스톤 실드를 와해시키려고 하자, 역으로 파고들며 디스펠을 공격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분명히 수적으로 질적으로 본인들이 우세하다고 생각했는데, 디스펠 대결의 양상은 예상과 달랐다.
“너, 너무 빠릅니다.”
“상대의 디스펠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파사사삭-
스톤 실드가 사그라졌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디스펠 대결은 서로의 계산 능력과 마법적인 수준 차이로 결정되는데, 상대의 디스펠 처리 능력이 압도적으로 빨랐다.
사실 디스펠 대결을 정면에서 응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면으로 부딪치자, 그들로서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빨랐다.
2명씩 달라붙어 하나의 디스펠을 상대하는데도, 엇비슷할 뿐 디스펠의 와해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그사이.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성벽의 방어 마법에 연속해서 플레어가 작렬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킬리안 후작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헤니르! 대체 뭘 하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어떻게.
겨우 50명의 인원으로 100명의 마법사를 압도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괜히 디스펠 대결에 정면으로 응했다가, 발할라의 상황만 좋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디스펠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자, 이번에는 디스펠로 성벽의 마법 방어마저 약화시켰다.
그러고는.
“플레임 캐논(Flame Cannon).”
콰앙!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펠릭스의 마법이 작렬했다.
마법 방어가 사그라지며, 성벽 위의 마법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일련의 상황.
헤니르의 시야에 한 인물이 보였다.
펠릭스 바로 옆에.
빨간 머리칼을 휘날리는, 에드윈 헥토르가 있었다.
* * *
지난 몇 개월.
에드윈 헥토르는 상단전에 완전히 빠져 살았다.
피닉스 마탑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상단전의 발전으로 이룰 수 있는 많은 영역을 탐구하고 훈련했다.
재밌었다.
매일 밤을 지새우며, 마법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펠릭스가 말했다.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 제가 보기에 마법사로서 왕자님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입니다. 왕자님은 아직 어리기에 이 정도의 성취를 보이는 것이지, 10년, 아니 5년만 지나도 샐러맨더 대륙을 경악시킬 대마법사로 성장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경험에 의한 판단이었다.
에드윈 헥토르와 시간을 보내며, 펠릭스는 압도적인 재능이 어떤 것인지를 목격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상단전에 대해 깨우친 것은, 유일한 단점마저 해결할 기회라는 사실을.
화악-
“디스펠.”
전장 위.
에드윈 헥토르가 마력을 일으켰다.
그는 그동안 드미트리와의 합동(合同) 훈련을 진행했고, 연합군에서는 지휘관이 아니라 마법사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펠릭스가 강력한 화력으로 공격을 진두지휘한다면.
에드윈 헥토르는 디스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발할라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머리가 열렸다.
확장된 정신력이, 순식간에 발할라의 마법을 갉아먹었다.
“적들이 디스펠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있다. 지금이 기회다. 차분하게 상대의 마법을 와해시키고, 마법사들이 적극적으로 마법을 발현하지 못하는 것에 집중하라.”
“디스펠!”
“디스펠!”
에드윈 헥토르의 명령에.
피닉스의 마법사들이 따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동안 마법적인 발전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이유는, 앞으로의 전쟁에서 그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전쟁 양상은 평야 위에서의 백병전이나 게릴라 전투가 주를 이루었다.
드미트리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발할라와 같은 강국들도 수비하는 모습을 보일 테고, 그들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확실한 무기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마법이었다.
끊임없는 연구와 토론 끝에, 드미트리는 성벽을 무너트릴 무기를 만들었다.
상단전의 발전.
마법사들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서클에서 폭발하는 마나를 상단전이 고스란히 받아들였고, 극한으로 발달한 뇌는 빠르게 눈앞의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로 인해 마운틴의 마법사들은 2배나 많은 인원으로도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단전의 능력은, 헤니르가 생각하지 못한 차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중.
에드윈 헥토르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순식간에 방어 마법을 와해해 버렸고, 에드윈 헥토르 하나를 막아 내기 위해서 마운틴의 마법사들은 서너 명이 달라붙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기어코 상대의 마법 방어를 뚫어 내 버렸다.
헥토르는 마법을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가 아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꽃피웠고, 천공의 마탑주마저도 재능을 탐냈던 에드윈 헥토르의 재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가 디스펠로 해제하면.
“플레임 캐논.”
“파이어 캐논.”
“파이어 캐논.”
화륵.
화륵, 화르르르르륵.
콰앙!
어김없이 펠릭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의 마법이 작렬했다.
에드윈 헥토르는 디스펠을.
펠릭스는 공격 마법을.
역할을 분담했다.
몰아치는 공격에 마운틴의 마법사들은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고, 어느 순간부터는 성벽의 마법 방어진에서 매캐한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런! 당장 마법 방어진을 수리하라! 어서!”
헤니르가 소리쳤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는 무조건 막아 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건만,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운틴의 마법사들이 대거 달라붙었다.
그들은 성벽의 마법 방어진을 보수하고, 직접 방어 마법에 힘을 썼지만, 에드윈 헥토르를 필두로 그들은 점점 갉아 먹혔다.
결국.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펠릭스의 말처럼.
겨우 한 시간 만에, 발할라의 성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전군. 진군하라!”
“진군하라!”
앞으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군대.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가 나설 차례였다.
* * *
그 시각.
고메스 백작은 걸음을 옮겼다.
북부 전선이 공격당했다는 보고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보다 더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다. 10만의 병력에 마운틴의 마법사들까지 배치했으니, 못해도 보름 이상은 버틸 수 있을 터. 중요한 문제는 아레스와 세자르의 대결이다. 만약 아레스가 승리한다면, 그때는 정말 상황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북부의 일은 뒤로 미루었다.
믿었다.
킬리안 후작과 마운틴의 마법사들을.
발할라가 그리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발할라 신전.
그곳에 아레스가 있었다.
세자르에게 도전을 신청한 이후, 그는 줄곧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세자르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웅성웅성.
“과연 누가 이길까.”
“무조건 세자르지.”
“아레스라면 혹시 몰라. 알바레즈도 압도적으로 쓰러트렸잖아.”
조금 전보다도 사람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하오문이 선동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세자르를 기다리는 동안 소문이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 고메스 백작은 사람들을 비집고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이번 대결. 반드시 이겨야 한다.’
세자르가 패배한들.
발할라 황실이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아레스는 발할라에서 활동하던 시절 알바레즈를 넘어서지 못했는데, 드미트리로 소속을 옮기자마자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발할라 1위의 자리에 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승리의 영광은 모두 로만 드미트리에게로 향할 것이다.
단순히 아레스가 강했기에 승리했다는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아레스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그게 진실이기도 했다.
검술 혁명을 주도한 로만 드미트리는, 오라의 창시자인 알렉산드르를 뛰어넘는 행보를 보였다.
마침내.
“세자르 님이시다!”
“길을 열어라!”
“드디어!”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왔다.
발할라 랭킹 1위.
발할라 제일검(第一劍)이, 아레스의 도전에 응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