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3화 (353/615)

353화 치킨 게임(chicken game) (1)

툭.

통신이 끊겼다.

한참을 정적 속에서 침묵을 지키던 고메스 백작이,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계속 밀고 들어오겠다는 말, 그라면 절대 허언이 아닐 겁니다.”

“나도 알고 있다.”

황당했다.

겨우 10만 명이다.

그만한 병력으로 발할라를 상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카이로 국경에 집결한 크로노스의 군대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체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만약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벨피르 후작은 상대의 발언을 헛소리 취급했을 것이다.

콰직!

퍽.

“빌어먹을, 로만 드미트리.”

마법 통신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것만으로는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벨피르 후작은 마법 통신기를 짓밟고서야 숨을 크게 내뱉었다.

“고메스 백작. 로만 드미트리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나.”

“……10만의 병력으로 수도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은 제아무리 로만 드미트리라 할지라도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로 깊숙이 들어왔다가 황실의 병력으로 퇴로를 막는다면, 드미트리는 백만 군대에 둘러싸여 도망칠 길을 잃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명확한 선례를 보여 주었습니다. 전력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라스칼과 코르타스를 점령한 게릴라 작전은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두 제국 사이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지를 증명했습니다.”

그날.

대륙이 충격에 빠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행보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그가 같은 인간인지를 의심했다.

“저희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게릴라 작전으로 북부를 휩쓸고 다닌다면, 겨우 10만의 병력일지라도 발할라가 입을 피해는 대단할 것입니다. 벨피르 후작님. 결단이 필요합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간과했고, 그 대가가 참담한 패배와 휴전 협상의 굴욕이었습니다. 발할라마저도 그와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로만 드미트리의 위상이, 두 제국을 위협할지도 모릅니다.”

옳은 말이었다.

그리고, 벨피르 후작의 생각도 같았다.

크로노스를 동원했는데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면, 로만 드미트리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대책이 없구나, 대책이.”

크로노스.

비장의 카드마저도 막혔다.

그렇다고 상대의 뜻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을 집무실을 배회하며 머리를 굴리던 벨피르 후작이, 분노를 삼키며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를 만나 뵈러 가야겠다.”

발할라 황제.

나태해진 그를 만나는 것은 정말 싫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 * *

발할라에는 금기(禁忌)가 있다.

발할라 황제가 스스로 원하지 않을 때, 그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면 화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예상대로였다.

일련의 상황들을 설명하자, 발할라 황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벨피르 후작을 바라보았다.

“벨피르 후작.”

“예.”

짜악-

고개가 돌아갔다.

황급히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자, 이번에도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벨피르 후작.”

“예.”

짜악-

“벨피르 후작.”

“……예.”

짜악-

반복되는 폭력.

코에서 피가 터졌다.

연약한 손길에도 얼굴이 퉁퉁 부었지만, 벨피르 후작은 최대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발할라 황제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는 일이기에.

마치 군대에 처음 들어간 신병처럼 각 잡힌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학습된 공포는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았다.

한 10번 정도 뺨을 맞았을 때, 그제야 분노가 가라앉았는지 발할라 황제가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내가 너희에게 권력을 준 이유는 날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을 잘 알 텐데.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다면, 내가 대체 왜 너희 같은 녀석들을 믿어야 하는 거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해야지.”

걸음을 옮겼다.

잔뜩 얼어붙은 벨피르 후작과 고메스 백작 주변을 걸으며, 발할라 황제는 날이 선 어투로 말했다.

“난 말이야. 발할라 태생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전사의 낭만이라든지, 근본이라든지, 그따위 것을 부르짖는 녀석들은 항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거든. 그날도 똑같았지.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던 날, 고지식하게 정통성(正統性)을 말하던 녀석들은 모두 내 손에 죽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발할라는.

현재 황제가 등극한 전후로 나뉜다고.

전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만 하더라도 발할라는 낭만이 살아 있었지만, 14번째 아들이 황제의 자리를 탐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발할라의 미스터리였다.

아무런 기반도 없었던 그를 발할라의 강자들이 지지하면서 피바람이 불었고, 전사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다가 모조리 죽어 나갔다.

덕분에 벨피르 후작은 권력을 쥐었다.

전사의 길을 추구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던 그가, 새로운 시대가 열리자 재조명을 받을 수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지켜보면 자꾸 그때가 떠올라. 내가 올바른 후계자가 아니라고 부르짖던 녀석들, 황실의 법도를 따르라던 녀석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습성을 진하게 타고난 녀석이야. 천한 변방 출신인 주제에, 마치 발할라의 전사처럼 행동하고 무서움을 모르지.”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

로만 드미트리는 포식자였다.

강하면 잡아먹고 약하면 잡아먹히는 방식에 익숙했고, 그렇기에 발할라 사람들은 그를 향해 열광했다.

동질감을 느꼈다.

발할라의 방식은 마교의 방식과 닮았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벨피르 후작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더니, 광기 어린 미소를 보였다.

“만약에 내가 드미트리의 의도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 녀석이 내 코앞에 나타나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나의 군대가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처리하고 드미트리의 퇴로를 차단하는 게 빠를까.”

“…….”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을 아꼈다.

섣부른 대답은 명을 단축하는 길임을, 두 귀족은 그간 뼈저리게 경험했다.

“큭큭큭.”

발할라 황제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길을 잃은 두 귀족에게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했다.

“나는 로만 드미트리의 같잖은 의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병력을 헤르나드로 보내라.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말고 모조리 몰살시킨 뒤에, 나를 반대하던 녀석들처럼 로만 드미트리를 고립시켜 죽여 버릴 것이다.”

발할라 황제는.

과격하고, 잔인했다.

벨피르 후작은 그걸 알면서도 발할라 황제를 찾아간 이유는, 그가 나서야만 발할라의 진짜 힘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발할라 황실을 점령했던 황제의 세력. 그것을 배제하고는 발할라의 전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두 귀족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다음 날.

황제의 군대는 헤르나드로 떠났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행보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전해졌다.

“……정말 계획을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크리스였다.

이번 작전.

위험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와의 전쟁을 강행할 경우, 벨피르 후작의 협박처럼 카이로 국경에 집결한 크로노스의 군대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몰랐다.

게다가 헤르나드의 반란군이 금방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주변을 막아서는 발할라 군대로 인해 퇴로가 차단될 확률이 높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이다. 이대로 물러났다간, 그 대가는 한 번의 패배로 끝나지 않는다.”

브라간 백작의 머리를 잘랐을 때부터.

치킨 게임은 시작되었다.

“헤르나드의 반란군은 우리의 도움 없이는 절대 반란에 성공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드미트리에 악감정을 지닌 존재들이 발할라의 권력을 유지하게 되겠지. 그때부터 드미트리는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동시에 상대해야만 한다. 발할라의 요청에 크로노스가 군대를 카이로 국경으로 집결시킨 것만으로도, 그들은 연합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발할라 축제.

그때 이미 연합의 가능성을 보았다.

발할라가 눈을 감아 주고 크로노스가 공격하는 형태는, 대륙의 양대산맥이 서로를 무조건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어쩌면 치킨 게임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브라간 백작이 찾아왔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미래를 보장한다던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를 잘라 보냈다.

자신에게 살의를 드러낸 발할라 황제를 상대로, 조금의 타협점도 허락하지 않았다.

“발할라의 내란은 발할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륙의 이권(利權)이 걸려 있고, 어느 한쪽이 물러나는 순간 패자는 모든 걸 잃을 것이다. 물론 둘 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피해가 만만치 않겠지. 설령 크로노스가 카이로의 국경을 넘어 제2차 대륙 전쟁을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발할라’라는 위험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 크로노스에 대응해도 늦지 않다.”

“알겠습니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걱정할 뿐,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을 신뢰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바르코를 무너트리던 그때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방법으로 최선의 결과를 쟁취해 냈다.

그게 바로 드미트리가 따르는 지휘관이었다.

발할라의 국경을 넘는 미친 행위에 가담하면서도,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그 누구도 로만 드미트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수뇌부가 집결한 자리.

옆에 있던 케빈이,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촤르르르르륵.

발할라 지도였다.

발할라의 주요 거점들이 기록되어 있는 그것에, 로만 드미트리는 세 개의 포인트를 차례로 가리켰다.

탁, 탁, 탁.

“루에노스, 포트벨, 산티노. 발할라 수도로 향하는 최단 거리 길목에 있는 세 개의 영지다. 특히 산티노를 지나치면 워프 포인트가 있기에, 수도를 비롯한 발할라 전역을 오갈 수 있다. 발할라는 이 세 곳의 중요성을 알기에 단단한 요새를 건설했고, 충분한 방어 병력을 배치해 둔 상태다.”

이미.

이전에 계획을 설명했었다.

한 번 더 되새기는 말에, 사람들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이 세 곳을 일주일 안에 무너트린다면, 그때는 발할라도 우리의 존재를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 * *

그날 오후.

루에노스의 성벽 위.

대대로 루에노스를 맡았던 루에노스 자작이, 멀리서 밀려드는 드미트리의 군대를 발견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표정이 굳었다.

북부 전선.

드미트리가 단 하루 만에 최전방 방어 진지를 무너트렸다는 보고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루에노스를 버리고 산티노와 같은 요새에서 힘을 합치고 싶었지만, 상부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것은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이다. 수차례 나눠서 치러야 할 전투를 알아서 한곳에 모아 준다면, 그들은 단 한 번의 승리로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루에노스 자작. 현 위치를 지켜라. 패배해도 좋다. 루에노스를 잃는다고 할지라도 그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만에 길을 열어 주지는 마라. 병사들을 모두 사지로 밀어 넣는다고 할지라도, 며칠의 시간을 벌어들인다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무모한 명령이었다.

한마디로 죽을 각오를 하고 적의 발목을 붙잡으라는 말에, 루에노스 자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단 며칠. 며칠만 버티면 된다.’

발할라 황실의 목적은 명확했다.

북부의 영지들.

그곳을 지나치는 동안 최대한 드미트리 군대의 발목을 붙잡는다면, 그사이에 헤르나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반격의 시작이었다.

워프 포인트를 통해 황제의 군대를 북부로 보내고 퇴로를 차단하는 순간, 건방지고 오만한 로만 드미트리를 죽일 수 있는 판이 만들어질 것이다.

인해전술(人海戰術).

머릿수가 많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까지는 거리가 한참 먼데, 각각 영지마다 발목이 붙잡힌다면 드미트리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루에노스 자작이 말했다.

“한시도 방심하지 마라. 적들이 조금이라도 공격하려는 기색을 보인다면,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어라. 승리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단 3일. 3일 정도만 버텨도 우리는 성공한 것이다.”

목소리를 높였다.

성벽 위에 늘어선 경비병들이, 눈을 부릅뜨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드미트리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첫날은 그러려니 했다.

조금은 늦은 시각이다 보니, 해가 저물 것을 대비해서 첫날은 휴식을 취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날.

이틀째 미동도 없는 드미트리군의 모습에, 루에노스 자작은 의문이 들었다.

‘설마 공격하는 것을 포기한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발할라 황실이 과감하게 헤르나드에 병력을 보냈으니,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그 안에 승부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겠지. 제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한들, 10만의 병력으로는 제국 땅에서 한계가 있지.’

들떴다.

딱 하루만 더

3일 정도만 버티고 나면, 적당히 자리를 지키다가 도망쳐도 큰 상을 받을 것이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다!”

이상하게도.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드미트리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만족한 얼굴로 침실에 들어선 루에노스 자작은, 잠에 채 들기도 전에 병사의 방해를 받았다.

벌컥!

“큰일 났습니다, 영주님!”

“설마 드미트리가 공격을 시작한 것이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한밤중에 갑자기 공격을 감행하다니.

황급히 다그치는 루에노스 자작의 모습에, 병사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드미트리군은 아직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만, 지금 포트벨이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다는 통신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양동작전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눈을 속이고 포트벨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습니다!”

포트벨은 루에노스 후방에 있는 곳.

경악했다.

그제야 알았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로만 드미트리가 시작부터, 발할라 제국을 혼란에 빠트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