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6화 (356/615)

356화 치킨 게임(chicken game) (4)

성벽 위.

좁다면 좁은, 넓다면 넓은 그 공간에서 비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사각(死角)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오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맞닥트리는 족족 산티노의 병사들을 도륙해 버리고 있었다.

일대 다수의 대결이다.

그것도 다수의 홈그라운드에서, 다수가 수십 배도 아닌 수만 배를 보유한 상황에서, 마치 자신의 안방인 것처럼 활보하고 다니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산티노 백작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게 로만 드미트리구나.’

명성대로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실행에 옮기는 것만 봐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단순한 객기가 아니다.

정말로 혼자만의 힘으로 변수를 만들어 내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눈앞에서 증명하는 압도적인 무력에 산티노 백작은 마법 통신을 연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휘관으로서의 불길한 예감이었다.

산티노만의 힘으로 버텨 보겠다고 자존심을 부렸다가, 정말 일이 크게 틀어질 것 같았다.

삑-

“벨피르 후작님. 저 산티노 백작입니다.”

[무슨 일이지?]

“지금 로만 드미트리가…… 으악!”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폭발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산티노의 병사들을 단번에 베어 버리더니, 저돌적으로 산티노 백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둘과의 거리는 멀었기에 곧바로 맞닥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 보겠다고 나선 기사들이 차례로 쓰러지는 모습에, 산티노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산티노 백작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다시 한번 통신기를 들었다.

“로, 로만 드미트리가 플라이 마법을 사용해서 성벽 위에 안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 한 명을 막지 못해서 산티노의 병사들이 학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산티노에 지원군이 필요합니다! 정말 황당하시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막지 못하면 산티노가 뚫릴 것 같습니다!”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아직.

전투 초반에 불과하다.

성벽과 성문은 건재하고 산티노의 병사들도 많이 남았지만, 오랜 시간 전장을 전전했던 산티노 백작은 본능적으로 산티노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껏 로만 드미트리를 간과하던 존재들은 모조리 죽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벨피르 후작 입장에서는 이번 연락이 시기상조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단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간절한 손길을 내밀었다.

[산티노 백작.]

“예!”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이다. 나는 네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단 며칠. 산티노의 병사들을 사지로 밀어 넣든,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버텨라. 황실의 지원군은 헤르나드를 모두 정리한 이후에 도착할 것이다.]

“그래도……!”

[더는 네 무능력함으로 날 시험에 들게 하지 마라.]

단호한 목소리였다.

산티노 백작은 당혹스러운 감정과 분노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렇다고 벨피르 후작을 향해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발할라 최고의 권력자였다.

아쉬운 마음에 마법 통신의 연결은 끊지 못하면서도, 차마 벨피르 후작을 설득할 말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성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문이 열린다면 정말 큰 일이었다.

산티노의 기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며 로만 드미트리를 막으려고 했고, 사방에서 번뜩이는 오라가 귀를 자극했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검사라고 할지라도 30명의 기사가 동시에 공격하는 것은 막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상대가 상식의 선에서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산티노 백작은 벨피르 후작과의 마법 통신을 끊어 버렸을 것이다.

푹.

푸확.

“크악!”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공격을 막아 내고, 피하고, 반격하고.

서로 뒤얽히는 일련의 공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산티노의 기사들을 휩쓸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을까.

순식간에 모두 도륙해 버렸다.

순간 이성을 장악한 공포심에, 산티노 백작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통신기를 향해 소리쳤다.

“로,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입니다! 저런 괴물을 대체 어떻게 산티노만의 힘으로 막으라는 말입니까! 이건 처음부터 미친 짓이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데, 우리의 목숨으로 저런 괴물을 막아 내라니! 제발, 제발 지원군을 보내 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였다.

살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이라도 지원군을 보낸다면, 희망을 가지고 로만 드미트리에 대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발할라를 위해 죽어라, 산티노 백작.]

그 말을 끝으로.

툭.

마법 통신이 끊겨 버렸다.

* * *

겨우 3시간.

산티노의 높디높은 성벽이 무너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성문이 열리자, 그때부터는 밀려드는 연합군에 의해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전력부터가 열세인 상황에서.

기세마저 꺾였다.

순식간에 번져 나가는 패색(敗色)에, 산티노의 병사들은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하고 패배를 시인했다.

팍-

“……크윽.”

산티노 백작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몇 바퀴 구르며 신음을 삼킨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았다.

“하,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만약 저를 살려 주신다면,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었다.

목소리를 높이며, 힐끗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로만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의 악마.

그로 인해 상식적인 전략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고, 산티노는 그의 손아귀에 명운이 걸린 상태였다.

산티노 백작도 처음부터 매국(賣國)을 저지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름대로 본인을 애국자라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벨피르 후작이 자신을 먼저 버리지 않았던가.

발할라를 위해 죽으라는 말은, 그의 마음에 반발심을 일으켰다.

“날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지?”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산티노 백작은 기회라고 느꼈다.

그래도 발언권을 주었다는 생각에,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아! 워프 게이트에 관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로만 드미트리 님의 전략은 워프 게이트를 점령해서 발할라 황실을 압박하려는 것일 텐데, 워프 포인트라고 불리는 ‘하비에르’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곳의 병력 현황과 경비 체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돌아오는 반응은 담담했다.

조급한 마음에,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발할라 황제의 특수 전력, 그리고 현재 발할라의 권력을 주도하고 있는 벨피르 후작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탐탁지 않은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내부자를 받아들이신다면, 발할라 제국을 무너트리는 과정에 큰 힘이 되리라고 자신합니다.”

“자세히 설명해 봐.”

“가, 감사합니다!”

표정이 밝아졌다.

상대가 거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정보를 술술 불었다.

살기 위해서 알고 있는 정보를 박박 긁어모아서, 최대한 자신이 도움이 되는 존재임을 부각했다.

설명을 끝냈다.

산티노 백작은, 조금은 희망적인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이제는 절 살려 주시는 겁니까?”

그의 말처럼.

산티노 백작은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뿐.

“아니.”

처음부터 그를 살려 줄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 * *

그 시각.

발할라의 수도, 마린.

그곳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척척척척.

“발할라 황실로 갑시다.”

“더는 발할라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발할라를 위하여!”

일반 백성들.

그들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아레스의 발언은 발할라의 혼에 불을 붙였고, 며칠 사이에 들썩이던 애국심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처음에는 수백 명이었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순식간에 수천, 수만으로 불어나더니, 발할라 황실로 향하는 길목에 인파들이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넘쳐났다.

비에토 공작.

그의 의도대로였다.

이번 반란은 민심이 중요했고, 반란군의 행보가 백성들에게 자신감을 부여했다.

일어나자!

목소리를 높이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비에토 공작의 반란군처럼, 우리도 발할라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자!

민심이 번졌다.

황궁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대표로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발할라의 백성들을 대표해 발할라 황제 폐하에게 전합니다! 발할라는 전사의 나라입니다. 대대로 우리가 전사라는 사실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으며, 우리는 전사의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는 용맹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발할라는 근본은 잃었습니다. 낭만을 잃었습니다. 신성한 축제에 초대해 놓고 암살을 시도하려는 더러운 속내를 보였으며, 이제는 전사로서의 용맹함이 아닌 간악한 음모로 권력을 차지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발할라 황제 폐하! 이건 잘못되었습니다. 부디 현실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현명한 군주가 되어 주십시오!”

“현명한 군주가 되어 주십시오!”

“발할라의 근본을 되찾아 주십시오!”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황제가 독재하는 나라에서, 일반 백성들이 그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섣불리 제압할 수는 없었다.

무려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상황은, 잘못 건드렸다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때였다.

척척척척-

무장 병력이 도착했다.

황제의 병사들.

그들이 사람들을 둘러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백성들의 대표는 물러나지 않았다.

“차라리 죽여라! 죽음으로 우리의 입을 막아라! 만약 너희가 발할라를 위해 나선 우리를 죽음으로 저지하고자 한다면, 발할라 전체가 들고일어날 것이다. 발할라의 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에 분노할 것이며, 그때는 백성들이 나라를 이루는 근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수만의 사람들.

그들을 처리하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대표의 말처럼.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다.

나서지 않았으면 모르되, 무려 수만의 규모로 나선 이상 죽음으로 입막음할 수준은 넘어섰다.

그런데.

푹!

“크악!”

황제의 병사 중 하나가, 서슴없이 일반 백성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 * *

복부에 피가 번졌다.

백성이 부릅뜬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극악무도한 반역도들을 모조리 처단하라!”

“죽여라!”

예상과는 달랐다.

타협은 없었다.

황제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대로 백성들을 베어 버렸고, 무기 하나 들고 나타나지 않은 백성들로서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학살이 벌어졌다.

방금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의 목이 날아가고, 복부가 관통되어 바닥에 쓰러졌으며,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백성들의 대표.

그가 당황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발할라 황제가 잔인한 인물이라지만, 수만의 백성들을 이렇게 학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발할라의 황제여! 네가 권력에 취해 미쳤구나! 제아무리 제국이라고 한들, 백성들을 가축보다도 못한 취급을 한다면 발할라의 권력이 언제까지 지속되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의 죽음을, 우리의 고통을 발할라의 사람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그러니…… 크악!”

퍽.

다리에서 강력한 충격이 일었다.

그는 강제적으로 무릎을 꿇었고, 그대로 얼굴을 후려치는 공격에 핏물을 토해 냈다.

정신이 희미해졌다.

누군가 머리채를 잡고 끌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로 상대가 보였다.

“……겨, 경비대장.”

마린의 경비대장.

그가 사나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건 아니야. 너희도 발할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잖아.”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순간.

경비대장이 웃었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푹.

심장에 검을 쑤셔 넣었다.

부르르 몸을 떠는 대표.

이윽고 그의 몸이 축 늘어지자, 경비대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검을 치켜들었다.

“모조리 죽여라! 황제 폐하의 권위를 넘보는 자들을,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마라!”

* * *

일련의 상황.

그것에 대해 보고하는 벨피르 후작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반란에 가담한 백성들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신 대로, 그와 관련한 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학살 명령.

벨피르 후작으로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민심은 중요하다.

국가라는 것은 결국 백성들이 집단을 이루어서 형성하는 것인데, 대륙의 역사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응하는 지도자는 없었다.

차라리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은밀하게 처리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놓고 학살해 버리자, 벨피르 후작도 말을 잃었다.

발할라 황제가 웃었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주제도 모르고 설치니 그런 꼴을 당하지.”

아무도.

그에게 충언(忠言)을 내뱉지 못했다.

로열 나이트도.

마린의 경비대도.

그 외의 특수 전력 모두 황제의 사람이었다.

발할라 황제가 아무리 광기를 드러낸다고 한들, 실질적인 힘이 그를 향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비에토 공작. 그들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어. 발할라의 백성들을 자극한다면 발할라를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질적인 전력에서는 명백하게 밀리고 있는데도, 사람들을 선동한다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지. 나를 막아서려던 내 형제들도 그따위 민심을 믿다가, 하루아침에 모두 죽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죽거렸다.

광기가 심해졌다.

로만 드미트리의 소식을 들을 때면, 발할라 황제는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꼈다.

“벨피르 후작.”

“예.”

지금부터는.

자신이 전면에 나설 차례였다.

발할라 황제는 로만 드미트리와의 치킨 게임에서,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에게 연락하라.”

“알겠습니다.”

화상 통신으로 연결했다.

이윽고.

삑.

[참 보기 좋은 광경이지, 벨피르 후작.]

화면 너머.

피로 물은 얼굴의 로만 드미트리가,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을 배경으로 마법 통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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