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치킨 게임(chicken game) (6)
4시간 전.
그때의 벨피르 후작은 마린의 중앙 광장에 있었다.
팍-
한 사내를 내던졌다.
이미 엉망으로 변해 버린 얼굴의 사내는, 일어날 힘도 없다는 듯이 바닥에서 축 늘어졌다.
“발할라의 백성들은 보아라. 이 녀석은 감히 발할라 황제 폐하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 이 나라에서 반역(反逆)이란 목숨으로도 속죄하지 못할 중죄이며, 나는 발할라 황제 폐하를 모시는 신하로서 이와 같은 상황을 좌시할 생각이 없다.”
힐끗.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기사가 나섰다.
콱.
한 기사는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바닥에 찍어 눌렀고, 다른 한 기사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날카로운 단검 하나를 들었다.
햇볕에 단검의 날이 빛났다.
서늘한 느낌을 풍기는 상황에,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내의 몸에 단검을 쑤셔 넣으며 고통을 선사했다.
꿈틀.
“……끄으으.”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사내는 몸부림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이미 힘을 잃어버린 육체는 우악스러운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말 끔찍한 장면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시선을 돌렸고, 멋모르고 구경을 나온 아이들은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눈앞의 상황.
벨피르 후작은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속으로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나를 위해, 발할라를 위해 옳은 일이다.’
발할라 황제.
그는 일반 백성들의 학살을 지시한 뒤에, 그들의 잔재를 전면에 내세워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 주라고 명령했다.
그는 공포 정치로 사람들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게 인간으로서 얼마나 잔인한 방법인지 벨피르 후작은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명령을 거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자신은 맹수의 등에 올라탔다.
발할라 황제가 권력을 유지하는 것만이 자신의 살길임을 알기에, 이번 사건만큼은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정치란 이런 것이다.
사람의 길을 포기해야 하는 세계. 벨피르 후작 또한 그리 깨끗하게 살지 않았기에, 눈을 부릅뜨며 고문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르르르륵.
피가 흘렀다.
광장의 바닥이 흥건하게 물들었고, 바들바들 떨던 몸도 어느 순간부터는 미동이 없었다.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다음.”
그의 뒤로.
본보기는 많았다.
반란군에 가담한 것으로 파악되는 이들이 차례로 끌려 나오며, 끔찍한 고문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눈앞의 현실을 보라며 강요하는 병사들로 인해서, 아이를 데리고 벗어나려던 부모들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해 아이의 눈과 귀를 막았다.
한 30분이 흘렀을까.
광장 한편에 시체가 차곡차곡 쌓일 무렵, 갑자기 황실의 기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벨피르 후작님! 황궁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입니다!”
“복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무슨 일이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황제의 명령을 받아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자신을 이리 급하게 부른단 말인가.
기사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발할라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 * *
발할라 동부.
케이른.
격변하는 정세와는 다르게 조금은 평화로운 그곳에, 일련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1조는 오른쪽을, 2조는 왼쪽을 맡는다.”
“예.”
인원은 여덟 명.
길거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의 사내들은, 멀리서 보이는 목표물의 모습에 양쪽으로 찢어졌다.
목표물은 바로 무기 창고였다.
기본적인 병장기나 전쟁에 필요한 갖은 물자를 저장하는 장소인데, 무기 창고 앞에는 늘 그렇듯 여러 명의 병사가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퍽.
“컥.”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상대의 사각을 노려서 다가갔고, 이렇다 할 대응을 하기도 전에 급소를 찌르거나 목을 비틀어 버렸다.
빠르고 확실한 움직임이었다.
사내 몇몇은 빠르게 병사들의 복장으로 갈아입었고, 몇몇은 내부로 들어가서 마법 폭탄을 설치했다.
그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무기 창고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들은, 마법 폭탄을 작동시켰다.
콰앙!
콰콰콰콰콰쾅!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이었다.
무기 창고가 단번에 폭발하며, 뜨거운 불길이 창고를 그대로 뒤덮어 버렸다.
평화로웠던 케이른의 오후가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비상벨이 울리며 병사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불에 활활 타오르는 무기 창고의 모습을 바라보며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다.
그때.
무기 창고를 폭발시켰던 인물 중 몇몇이,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발할라의 개새끼들아! 너희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다고 한들, 우리는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발할라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린의 시민들은 비에토 공작과는 별개로 발할라를 위해 올바른 목소리를 냈건만, 발할라 황실은 그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린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발할라 황제의 광기에 희생될지 모릅니다. 물러나지 마십시오! 현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발할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케이른의 시민들은 불타오르는 광경과 발할라의 실태를 알리는 벽보,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때만 해도 마린에서 벌어진 학살극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케이른의 병사들이 테러범들을 제지하기 직전, 미리 위장한 병사들이 소리쳤다.
“쫓아!”
“거기 서!”
잘 짜인 연극이었다.
같은 무리이면서도 마치 아닌 것처럼.
뒤늦게 케이른의 병사들이 따라붙었지만, 사건을 벌인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 모두.
하오문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무공을 전수받은 특수 공작원이었고, 발할라 곳곳에 퍼진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하달된 명령에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겨우 며칠 만에 계획되고 실행된 일이 아니었다.
작전의 실행은 갑작스러웠지만, 그들은 오늘과 같은 수많은 시나리오를 대비하고 훈련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테러는 발할라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한두 번이었던 것이 수십 번으로 번지며, 순식간에 발할라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었다.
* * *
그 시각.
크리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앞으로의 작전을 준비하며, 그는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우리는 계획을 강행할 것이다. 워프 게이트가 파괴되었으니, 미리 준비했던 차선책을 진행하라.”
차선책(次善策).
발할라의 대응에 따라 준비한 여러 전략 중 하나로서, 로만 드미트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크리스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크리스가 생각하기에는 매우 무모한 작전이었다.
특히 작전의 기반이 되는 테러의 경우, 발할라의 사람들을 도발했다가 테러의 원흉이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발할라 황제는 민심을 잃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저희가 분란을 부추긴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적들은 드미트리라는 외부의 적을 내세워 내부의 혼란을 통제하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단호했다.
사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발할라 황제가 어떤 대응을 보이든, 학살을 지시한 시점부터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발할라 황제가 일반 백성들을 학살함으로써 우리는 비난을 떠안길 상대가 생겼다. 미리 준비한 대로 발할라의 각 영지를 테러하고, 발할라의 백성들에게 수도에서 벌어진 진실을 밝힌다면, 과연 발할라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은 누가 이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조직적인 움직임은 몇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았을 때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발할라 황제의 행보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이용할 것이다. 사람들의 불만이 외부로 표출되고 조금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마린에서 벌어진 반란은 그곳에서만 국한되는 게 아닌 발할라 전역으로 번질 것이다.”
민심에 붙을 붙였다.
마린에서의 사건과는 달랐다.
수도에서는 발할라 황제의 병사들이 곧바로 상황을 통제했지만, 발할라의 넓은 땅덩어리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란의 불길은 얘기가 달랐다.
현재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었던 병력은 황제의 군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병력을 대동하고 합류한 발할라의 귀족들이 있었는데,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영지가 공격받는 상황에 혼란에 빠질 것이다.
크리스가 말을 덧붙였다.
“……민심을 이용한 작전은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득을 위해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죄책감이었다.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이득을 위해 발할라를 부추길 것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휘말린 발할라의 사람들은 애국을 부르짖으며 그렇게 죽어 나갈 것이다.
참으로 잔인한 현실이었다. 사실 발할라의 일반 백성들은 잘못이 없었다.
드미트리와 발할라가 적대적인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가혹한 현실에 내몰리고 말았다.
예정대로 작전이 실행된다면.
단언컨대 발할라 황제의 성향상, 정말 많은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말했다.
“크리스. 발할라는 타국(他國)임을 잊지 마라. 우리는 우리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전장에서 반대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병사들을 베어 버리는 것처럼, 발할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 상황에서 무관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드미트리를 위한 미래뿐이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사람들의 찬양을 받고 있지만, 그의 근본은 항상 차가울 정도로 잔인했다.
헤르나드의 반란군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떠나. 드미트리가 추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득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히 실행으로 옮기지 못할 위험천만한 일을,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이득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택했다.
그런 존재가.
바로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었다.
잔인함에 가슴이 서늘해지면서도, 크리스는 이런 사람을 모신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자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존재가 나라를 이끈다면, 우리로서는 목숨을 바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간단한 문제다.
발할라 황제는 자신의 사람들을 죽였다.
그에 반해,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타국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곁을 지키며 크리스는 매번 시험에 들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와의 미래가 이기적일지라도 행복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진행될 작전은 위험천만하지만, 이미 시작된 게임에서 드미트리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척.
검을 들었다.
그의 뒤로, 연합군의 병사들이 도열했다.
“지금부터 작전을 시작한다.”
“예.”
저 멀리.
크리스의 시야가 닿는 그곳에, 발할라 최대의 곡창지대(穀倉地帶)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 *
사건은 연달아 발생했다.
발할라 황궁에 소집된 수뇌부들은, 발할라 전역에서 들리는 보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발할라 전역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로만 드미트리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습니다. 무기 창고만을 골라서 마법 폭탄을 터트렸고, 마린에서의 학살 사건을 전면에 내세워 발할라 백성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반란의 불길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병력을 회군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병사들을 동원해 백성들이 분노하는 것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소식.
드미트리의 군대가 곡창지대에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보고에, 발할라의 수뇌부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곡창지대를 모조리 태워 버린다면, 발할라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발할라.
제국의 근본은 남부 밀림에 있다 보니, 발할라의 영토는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농사를 지을 땅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북부의 곡창지대는 발할라의 핵심이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상당 부분을 먹여 살리는데, 드미트리의 군대가 방향을 틀어 곡창지대를 공략했다.
예상할 수 있는 범위였다.
다만.
곡창지대는 다른 워프 포인트들과는 거리가 멀기에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완전히 포기하는 선택이었고, 그래서 발할라 제국은 드미트리가 이만 병력을 물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더욱 깊숙이 들어와 곡창지대를 공략했다.
만약 이대로 곡창지대가 불길에 휩싸여 버린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한두 달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발할라가 감당해야 할지도 몰랐다.
치킨 게임.
고집이 발목을 붙잡았다.
병력을 북부에 집중했다면 곡창지대를 지켰을 텐데,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는 드미트리 연합군의 의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병력을 회군시키는 것도 애매했다.
지금 병력을 불러들인다면 북부와 헤르나드의 반란군 모두, 두 마리의 토끼를 잃을 확률이 높았다.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더는 드미트리의 행보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헤르나드로 간 병력 일부를 회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헤르나드는 점령하기 직전이기에, 병력을 절반만 남겨 두어도 상황을 정리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목소리를 높였다.
상석.
발할라 황제가 있었다.
일련의 상황들에, 발할라 황제는 묘한 표정을 보였다.
그때였다.
황실의 기사가, 한 가지 사실을 전달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마법 통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겨우 며칠 전.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을 때와는 달리,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에 회의실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