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1화 (361/615)

361화 치킨 게임(chicken game) (9)

벨피르 후작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뱉었던 말이,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했다.

“넌 날 만나게 될 것이다.”

결국.

현실이 되었다.

발할라는 끝까지 물러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 결과가 지금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하는 상황이었다.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포식자 앞에 놓여 있는 초식 동물처럼, 발할라 최고 권력자라고 불리는 벨피르 후작이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뱉질 못했다.

그때였다.

발할라 황제를 비난한, 딸꾹질을 내뱉었던 수뇌부가 황급히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하, 한 번만 살려 주신다면…….”

퍽.

머리가 날아갔다.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바닥을 굴러다니는 둥그런 물체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포가 번졌다.

회의실에 남겨졌을 때부터 죽으리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자 수뇌부들은 자리를 박차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벨피르 후작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살겠다고 먼저 뛰쳐나간 존재들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번뜩.

“크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도망쳤던 존재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바닥에 고꾸라졌고, 다른 존재들도 신체 부위가 하나씩 잘려 나가며 비명을 질러 댔다.

발할라의 수뇌부 중에는 오라 검사들이 많았다.

전사의 나라라는 명성에 걸맞게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실력으로는 감히 로만 드미트리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한 명.

두 명.

시체가 쌓여 갔다.

로만 드미트리는 수뇌부 중 한 명의 머리칼을 움켜쥐더니, 벨피르 후작이 보는 앞에서 목을 그어 버렸다.

서걱.

“크르륵.”

피거품을 물었다.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그 모습에, 벨피르 후작은 바들바들 떨며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었지. 그렇게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간, 날 만나게 될 것이라고.”

“……괴, 괴물 같은 녀석.”

쪼그려 앉았다.

벨피르 후작을 코앞에서 마주 보았다.

“사람의 자존심이라는 게 참 재밌어. 분명히 북부를 수비하는 것이 옳은 일인데도, 발할라 축제의 일을 사과하는 것이 발할라를 위해서 가장 평화로운 방법인 것을 알면서도. 너희는 현실을 외면하고 끝까지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그게 발할라의 위상을 지키는 방법이었겠지. 대륙의 양대산맥인 발할라가, 드미트리와 같은 약소국을 상대로 고개를 숙이는 건 힘들었겠지.”

콱.

하관을 움켜쥐었다.

화들짝 놀라며 바둥거리는 벨피르 후작은, 마법 통신기 너머로 보이던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꼴이 되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 현실에 타협했다면.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나 드미트리가 새로운 강대국으로 올라섰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끄득, 끄드득.

“……으, 으윽.”

신음을 삼켰다.

하관을 움켜쥐는 악력에, 턱뼈가 비틀리며 당장에라도 하관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체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굴욕이었다.

참담했다.

하지만 그런 인간적인 감정들을 느끼기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런데.

탁.

하관을 놓아주었다.

순간 폐부 깊숙이 차오르는 숨에, 벨피르 후작은 숨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벨피르 후작. 네가 누리던 부귀영화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네 스스로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이룬 것이 아닌, 발할라 황제에게 빌붙어 이룬 성과들의 대가는 겨우 이 정도일 뿐이다. 네 주변을 봐라. 황실에 충성을 부르짖던 자들의 말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다. 발할라의 14번째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예상하지 못한 일개 귀족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너는 쉽게 버려진 것이다.”

토사구팽(兔死狗烹).

그런 단어로 표현할 문제도 아니었다.

벨피르 후작은 사냥개조차 되지 못하는, 발할라 황제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벨피르 후작 또한.

알고는 있었다.

참담한 진실에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리자, 로만 드미트리는 회의실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타타타탁.

저 멀리.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크 클라우드로 잠시 시선을 돌렸지만, 황궁이 공격당했다는 보고에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자신으로서도 위험했다.

발할라 황제의 세력이 드러난 것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 이 이상의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벨피르 후작.”

웃었다.

벨피르 후작을 내려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발할라 황제는 너를 버렸지만, 나는 네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다. 마지막 기회다. 너와 내가 다시 이런 이유로 만나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살아 있다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말에.

벨피르 후작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 * *

30분 뒤.

로만 드미트리는 다시 본대에 합류했다.

마린의 추격대를 따돌린 뒤에, 마린 바깥에 미리 준비했던 소규모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다.

텔레포트를 사용한 마법사.

녹스가 핼쑥해진 안색으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이번과 같은 작전은 무조건 말릴 겁니다. 워프 게이트와 같은 마법 장치 없이는, 겨우 한두 명을 이동시키는 것에도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방금도 마나석을 그렇게 사용했는데도 하마터면 힘이 부족해서 텔레포트에 실패할 뻔했습니다. 주군. 주군은 이제 남작 가문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일국의 왕이 되실 분이니만큼, 몸을 조심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작전.

현지에서 텔레포트를 준비해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준비했는데도 상단전의 발전으로 겨우 텔레포트의 복잡한 마법 체계를 감당해 냈고, 우여곡절 끝에 마린을 오가는 텔레포트를 문제없이 끝마쳤다.

사실 작전을 진행하면서도 몇 번이고 고비가 있었다.

그만큼 어려운 마법이기에, 사람들은 워프 게이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문득.

녹스는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처음부터 발할라 황제를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발할라.

제국은 제국인 이유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비상식적인 존재조차도 암살에는 실패했고, 실질적으로 발할라는 이번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다가 죽은 병사들과 발할라의 수뇌부들 정도.

사실 발할라가 황제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뇌부들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처음부터 발할라 황제의 목숨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녹스는 작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의문을 표하는 눈빛에, 로만 드미트리는 마린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발할라 제국조차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과 발할라 황제를 향한 불신. 만약 발할라가 이번 반란에도 기존의 권력 체계를 유지한다고 한들, 그들은 더는 이전과 똑같지 않을 것이다.”

* * *

발할라 황궁.

그곳의 상황이 정리되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시체를 치웠고, 눈에 불을 켜며 주변을 수색했다.

이미 로만 드미트리는 병사들을 따돌리고 성 밖으로 도망쳤다.

그래도 혹시 모를 위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할라 황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다.

회의실.

그곳에 벨피르 후작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모였다.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는 그곳에, 주변을 확인한 벨피르 후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빌어먹을.’

자신은 살았다.

하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그동안 그는 발할라를 위해 살았다.

발할라 황제가 폭군(暴君)이라고 불리는 미친놈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옳은 일이라고 믿었다.

그게 당연했다. 발할라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으니까.

발할라 황제에게 기생하는 한, 자신의 권력은 죽는 그 순간까지 영원하고 건재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황궁이 공격당했다.

발할라 황제를 적대하기는커녕 감히 마주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로만 드미트리는 황궁을 자신의 안방처럼 드나들며 사람들을 도륙해 버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안일하게 대응했다가는 만나게 된다는 말을 현실로 이루어 내더니,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절대불변의 진리가 무너지고 말았다.

발할라 황제가 절대적일 것이라는 믿음을, 로만 드미트리라는 괴물이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첫 번째.

불안의 효과였다.

발할라가 벨피르 후작의 안위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그로서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나를 살려 둔 이유는 분명히 그만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발할라 황제와 나의 사이를 불신(不信)으로 갈라놓으려는 의도겠지. 문제는…… 그의 말처럼, 발할라 황제를 믿을 가치가 있느냐다. 발할라 황제가 더는 절대적이지 않고,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를 잔인하게 버린 그를 위해서 더는 이전과 같은 마음일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희는 어떻게 살았지?”

발할라 황제.

그가 차갑게 물었다.

살았다는 사실에 안부를 묻기는커녕, 그는 생존자들의 존재 자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불신.

불신은 서로에게 생겨났다.

벨피르 후작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가 다른 수뇌부들은 전부 죽였는데 벨피르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남겨 두었다는 사실이 발할라 황제의 눈에는 거슬렸다.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황실의 병력이 들이닥치는 상황에, 그는 일단 피신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운이 좋았군.”

만약.

발할라 황제가 벨피르 후작을 진심으로 못마땅해했다면.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발할라 황제에게 벨피르 후작은 그만한 가치도 없었다.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개미 새끼 한 마리를 처리하겠다고, 굳이 지금 인력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벨피르 후작은 말을 잘 듣는 애완견이었다.

죽으라면 죽고, 짖으라면 짖고. 앞으로 정리해야 할 상황들이 많은 지금, 벨피르 후작마저 죽여 버린다면 발할라 황제는 귀찮아질 수밖에 없었다.

발할라 황제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감히 발할라의 수도를 공격하고 나의 목숨을 노렸다. 그의 말처럼, 그는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발할라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려고 할 것이다. 병력을 회군시켜라. 헤르나드를 함락시킬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그가.

마침내 자존심을 꺾었다.

발할라의 수도를 공격할 정도라면, 로만 드미트리가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치열했던 치킨 게임.

그것의 승자는 로만 드미트리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벨피르 후작과 수뇌부들.

황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그들의 표정은, 예전처럼 순종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

그 시각, 헤르나드.

끝이 보였다.

밀려드는 황제군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더는 성벽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끝났다.

산체스는 달려드는 적군을 베어 내며, 비에토 공작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병력을 일으켰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반란.

비에토 공작이 주도한 것이나, 사실 시작점을 따져보면 산체스가 비에토 공작을 설득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산체스는 절망감과 미안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만약 비에토 공작이 계속 은둔 생활을 유지했다면, 말년에 반역도로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콰득.

파바바박.

할버드가 적군을 쓸어 버렸다.

비에토 공작은 피로 흠뻑 물든 얼굴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헛소리할 시간에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1시간?

2시간?

길어도 3시간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야 비에토 공작과 같은 전사들이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한 명씩 쓰러지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급격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비에토 공작과 산체스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여력이 있을 때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자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저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뿌우-

뿌우우우우-

뿔나팔 소리였다.

발할라의 체계를 아는 사람들은, 그 소리의 의미를 알았다.

“이, 이게 무슨?”

“퇴, 퇴각 명령입니다!”

분명했다.

뿔나팔은 퇴각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황제군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성벽 밑에 있는 병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에 진짜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을 정리한 비에토 공작은, 뒤로 물러나는 황제의 병력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표정을 보였다.

“……이게 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상식으로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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