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4화 (364/615)

364화 내란의 결말 (3)

멤피스 후작의 집무실.

장소를 옮긴 파비우스 백작은, 멤피스 후작의 맞은편에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얼굴을 자주 보는 거 아닙니까? 드미트리나, 크로노스나. 신뢰를 받는 존재들은 쉴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드미트리의 외교 전문.

크로노스의 이인자.

정치적인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만나다 보니, 파비우스 백작의 말처럼 둘은 서로의 얼굴이 제법 익숙해졌다.

반가운 반응의 파비우스 백작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방문을 통보한 드미트리의 행보에, 멤피스 후작은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쓰읍,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어깨를 으쓱했다.

파비우스 백작은 하인이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유를 잃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크로노스와 드미트리가 휴전 협상을 체결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습니다. 서로 협상의 기준을 충실히 이행했기에 그동안은 별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최근 크로노스 제국이 카이로의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물론 훈련 명목이겠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드미트리가 발할라와 분쟁이 생긴 지금 그러한 행보를 보인다는 사실에…….”

탁.

찻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사람 좋았던 얼굴이 단번에 돌변했다.

“제 주군이 매우 못마땅해하고 계십니다.”

순간.

멤피스 후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크로노스를 상대로 못마땅하다는 표현은, 불과 1년 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발언이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군사 훈련을 진행한 것입니다. 드미트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예, 예. 그러시겠지요. 엄연히 휴전 협상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신다면, 저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서로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행동이 드미트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만약 일련의 상황에 발할라와 특별한 거래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외교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보이느냐도 귀책 사유에 포함됩니다.”

과감한 화법이었다.

파비우스 백작은 기회를 포착한 하이에나처럼, 상대가 드러낸 틈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멤피스 후작도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파비우스 백작님. 우리가 진심으로 이번 기회를 살려 드미트리를 공격하려 했다면, 지금까지 방관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드미트리와의 전쟁에서 크로노스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일이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서, 카이로 국경에 보낸 병력은 겨우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게 진실인 겁니다. 드미트리는 이제 그 정도로 호들갑을 떨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팽팽했다.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이번 만남.

파비우스 백작은 이렇게 진행되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단순히 훈련을 명목으로 병력을 움직인 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책임을 묻기에는 명분이 확실하지 않았다.

파비우스 백작이 씰룩였다.

“정말 선수끼리 얼굴을 붉히게 만드시네. 드미트리와 크로노스. 아시다시피 저희는 휴전(休戰)의 관계입니다. 전쟁을 종결했다는 것이 아닌, 잠시 멈추었다는 의미죠. 그런 의미로 항상 크로노스 제국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서로 언제든 전쟁이 다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지금 크로노스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를 방관하는 크로노스의 모습은 비정상적입니다. 그간의 행보와는 다르고, 이면에 다른 목적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크로노스를 방문한 이유.

명확했다.

상대의 변명은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적당히 눈치껏 행동하십시오. 뻔히 시간을 벌려는 속셈인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했다가는 드미트리로서도 이 상황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끼익.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소 건방진 얼굴로, 상대를 내려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으셨습니까?”

* * *

순간.

“하하하.”

멤피스 후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파비우스 백작의 과감하고 당돌한 발언에, 그는 진심으로 재밌다는 표정을 보이며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닦았다.

“과연 명성대로군요. 너구리의 혓바닥이 아주 매섭습니다.”

웃는 얼굴과는 달리.

짜증이 치밀었다.

드미트리.

그들의 위상이 하늘을 찔렀다.

이제는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거침이 없었고, 파비우스 백작의 발언처럼 언젠가는 다시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륙 역사에 이 정도로 크로노스에 대항했던 나라가 있었던가.

단언컨대 그런 나라가 존재했다면, 몇 년 지나지 못하고 망국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멤피스 후작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크로노스는 휴전 협상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생각이라는 겁니다. 카이로 국경에서의 움직임은 최대한 자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예 병력을 물리는 것은 불가능하나, 카이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숫자를 조절하겠습니다.”

웃었다.

호의적인 얼굴과는 달리,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크로노스가 만약에 모종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면, 파비우스 백작님은 지금 사지(死地)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드미트리를 대표해서 찾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겁이 나지 않으십니까? 한때는 드미트리가 아닌 카이로스의 너구리라고 불리던 당신은, 이렇게 희생정신이 투철한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병력을 움직인 문제는 크로노스가 한 발자국 물러났지만, 그의 눈빛은 패배자의 눈빛과는 달랐다.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파비우스를 물어뜯기 위해, 사나운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파비우스 백작은 찻잔을 다시 들더니, 상대를 마주 바라보며 천천히 음미했다.

“뭐, 특별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의미 없는 희생을 아주 싫어합니다. 멍청한 녀석들이나 제 한 목숨 바쳐서 희생하는 것이지, 사실 대부분은 그 희생을 알아주지 않거든요.”

사람들은 말했다.

파비우스가 충직하게 변했다고.

너구리의 명성과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파비우스 백작이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정체성은 한결같았다.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모시는 현실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드미트리에서 제 위상은 하늘을 찌릅니다. 권력의 핵심에 있고, 매달 드미트리에서 보내 주는 선물로 인해 제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라는 말을 하고 다닙니다. 가문의 장남은 또 어떻고요. 드미트리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차세대 오라 검사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세를 고쳐잡았다.

제집 안방인 것처럼,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파비우스라는 사람이 쓸모가 있고, 드미트리를 위해 헌신한다면, 로만 드미트리 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저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일, 이번에 발할라 황실을 찾아가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일. 그분에게 한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헌신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 자리에서 제가 죽는다면, 뭐 정말 고통스럽고 짜증은 나겠지만 제 가족은 평생 드미트리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며, 로만 드미트리 님은 분명히 확실한 복수로 제 원혼을 달래 줄 것입니다.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평생 배신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텐데, 위험한 일을 골라서라도 해야 제 가치가 빛을 발하지 않겠습니까?”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차는 잘 마셨습니다.”

목적을 이루었다는 듯, 파비우스 백작은 미련 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발할라의 밀실(密室).

벨피르 후작의 주도하에, 발할라의 귀족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한 귀족이 물었다.

“……크로노스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벨피르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크로노스 제국에서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발할라와 힘을 합친다면 드미트리의 콧대를 꺾을 절호의 기회인데도, 그들은 이번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더군. 아마도 방관하면서 이득이나 보겠다는 속셈이겠지.”

“이런.”

“하.”

사방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크로노스와의 연합.

상황을 반전시킬 유일한 기회였다.

그런데 크로노스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보이니, 발할라의 귀족들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궁지에 몰렸다. 발할라 황제는 여전히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우리로서는 무조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무리한 병력 차출로 인해 가문의 뿌리까지 뽑혀 나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이번 반란을 주도하는 것이 어떻겠나.”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귀족들의 눈빛이 변했다.

사실.

그들은 이미 배신의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아무나 초대될 수 없는 밀실에 자리할 수 있었다.

“어차피 반란군이든, 황제든. 어느 한쪽은 전멸해야 끝날 싸움이다. 대세가 반란군에 기울어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전쟁의 양상을 결정할 수 있다. 일단 반란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최대한 수도의 병력을 바깥으로 빼돌릴 것이다. 그리고 경계가 약해졌을 때 내외부에서 동시에 수도를 공격, 발할라 황제를 처리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반란을 주도했다는 포지션을 가져갈 수 있다. 그때는 비에토 공작으로서도 우리를 적대할 명분이 없다. 서로의 목적이 같기에, 앞으로 변화할 미래에서 우리는 여전히 권력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위험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의견이 모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심장이 뛰었다.

발할라에서 발할라 황제를 배반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그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벨피르 후작이 총대를 메지 않았던가.

그들은 벨피르 후작을 믿었다.

하지만 진실은 조금 달랐다.

벨피르 후작 또한, 로만 드미트리가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반란을 주도하는 엄청난 위험성을 안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할라의 귀족들은 그에게 속았다.

벨피르 후작은 자신의 목숨이 걸렸다는 진실을 밝혔다간 괜히 분위기를 흐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치 모두를 위한 미래인 것처럼 표현했다.

고로.

진실을 숨겼다.

귀족들의 동의를 끌어내고는,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계획은 앞으로 이 주일 뒤. 충분히 판을 깔아 놓고, 우리는 발할라의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다.”

이 주일이라는 시간.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가 예고한 보름에 맞춘 기간이라는 것을, 발할라의 귀족들은 알지 못했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지난 이 주.

격전(激戰)을 벌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치고 빠지는 공격으로 발할라의 토벌군을 괴롭혔지만, 이 주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북부 국경 끄트머리까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이상의 성과를 바랐다면 무리해서라도 밀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목적은 발할라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괴롭히는 것에 있기에,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움직였다.

푸확.

검을 뽑았다.

진득하게 딸려 나오는 피에, 로만 드미트리는 덤덤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까지인가.’

주변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이 보였다.

고메스 백작은 악착같이 따라붙었지만, 그 결과는 지금 보이는 광경이었다.

기습적인 공격이나 후미를 잘라 내는 방식으로 토벌대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 과정에서 드미트리 연합군의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군의 사상자에 비하면 아군의 피해는 정말 미미한 수준이었다.

국경 끄트머리.

이제는 물러날 차례였다.

크로노스가 휴전 협상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그들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피해를 허락할 수 없었다.

전쟁도 끝을 향해 갔다.

드미트리가 주도하는 전면전이 아니기에, 이제는 헤르나드의 반란군과 벨피르 후작의 반란군에 완전히 맡겨야만 했다.

크리스가 다가와 말했다.

“……벨피르 후작의 반란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벨피르 후작은 반란을 결심한 이후에 드미트리와 지속적으로 연락했고, 드미트리는 일부러 시선을 끌면서 벨피르 후작이 반란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확실히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헤르나드의 반란군이 점점 몸을 부풀리면서 수도로 진군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폭동이 더욱 심해지는 상황에서, 발할라 황제로서도 벨피르 후작의 반란은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할 것이다.”

벨피르 후작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승부를 결정지을 강자의 존재.

그것이 없었다.

벨피르 후작이 아무리 기습적으로 황제를 공격한다고 한들, 발할라 황제가 보유한 특수 전력은 숫자의 차이를 단번에 제압해 버릴 것이다.

불멸의 전사와 황실의 마법사들. 일부를 확인했을 뿐인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 반란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알았다.

벨피르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죽이지 않으면 죽기에 일말의 가능성에 목숨을 걸었다.

“벨피르 후작의 반란은 시작일 뿐이다. 반란은 제압되겠지만 발할라 황실은 큰 피해를 입을 테고, 헤르나드의 반란군과 성난 민심으로 인해 반란은 장기화되겠지.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발할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대비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드미트리의 역할은 끝났다.

지금부터는 관망하고, 앞으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또 다른 이득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예상치도 못한 소식이 드미트리를 강타했다.

“발할라 황제가 죽었습니다! 벨피르 후작이 반란에 성공했습니다!”

반란의 성공.

그것은 예상을 넘어선, 그야말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