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내란의 결말 (4)
D-day 새벽.
캄캄한 어둠을 뚫고 마린의 성벽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얼추 수만에 달했고, 아무리 어둠을 틈타 움직인다고 한들 그 많은 숫자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팟.
마법 불빛이 바깥을 비추었다.
성벽 위를 지키는 경비병이 의문스러운 움직임을 발견했다.
그런데 성벽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경비병 또한 분명히 확인했는데도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런 경비병이 한둘이 아니었다.
성벽 위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 대부분은 성벽 바깥의 상황을 알아차렸지만,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끼이이익.
쿵.
성문이 열렸다.
마린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오히려 외부의 세력이 들어오기 편하도록 문을 연 것이다.
의문의 사람들.
정확히는 어두운 옷으로 신분을 감춘 병사들이 속속들이 내부로 들어섰다.
사전에 얘기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 모든 것은 완벽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먼발치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벨피르 후작의 모습에, 직급이 높아 보이는 사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그러기 위해서 널 그 자리에 앉히지 않았나.”
사내의 정체.
새로운 경비대장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한바탕 난리를 피우면서 기존의 경비대장이 목숨을 잃었고, 덕분에 벨피르 후작은 계획에 적합한 인물로 그 자리를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며 그는 웃음을 머금었다.
만약 이와 같은 판을 만들 수 없었다면, 처음부터 반란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발할라 황제. 스스로를 과신한 것이 너의 문제다.’
발할라의 명령 체계는 일방적이다.
발할라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이행하는 방식이나, 문제는 그 명령이 세세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를 죽여라.
어디를 공격하라.
공석을 새로운 인물로 채워라 등등.
발할라 황제는 세세한 일 처리는 대부분 벨피르 후작에게 맡겼고, 평소라면 충신에게 경비대장의 자리를 맡겼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계획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다.
이미 마린 내부에 자리 잡은 병력만으로는 반란이 힘들다는 판단에, 외부의 병력을 은밀히 안으로 들였다.
사실.
명령권자가 국가 경영에 관심이 있었다면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벨피르 후작은 오랫동안 발할라 황제를 모시며, 황당하리만큼 과감한 이번 작전이 통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체 누가 반란군이 대놓고 성문으로 들어오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경비대는 경비대장을 매수하면서 반란군의 편으로 만들었다지만, 내성(內城)을 지키고 있는 황제의 병력은 회유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입이 바짝 말랐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반란에 실패하는 순간 그 책임으로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준비 끝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기사가 상황을 보고했다.
벨피르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눈빛을 보였다.
“다들 명심하라. 이번 작전은 신속하고 빠르게 발할라 황제를 제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반란의 성패(成敗)는 우리의 목숨과 직결된다. 성공한다면 너희는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나, 실패한다면 고통 없이 죽는 게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 상대는 발할라의 폭군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
판은 깔렸다.
그대로 하달되는 명령에, 기사를 필두로 반란군이 어둠으로 물든 도시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할라의 명운이 걸린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벨피르 후작은 발할라의 두뇌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번번이 패배했지만, 반란과 같은 목숨이 걸린 문제를 그냥 진행하지는 않았다.
일차적으로 경비대를 회유했다면.
확실한 성공을 위해서 황실의 병력이 먹는 식단에 약을 풀었다. 그것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복용한 사람들의 피곤함을 유도하는 약이었는데, 계획을 진행하는 새벽에 맞추어서 황실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졸기 시작했다.
덕분에 경비에 구멍이 뚫렸다.
내성의 문이 활짝 열릴 때까지도, 피곤함에 물든 황실의 병사들은 마린에서 감히 반란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푹.
“공격하라!”
“투항하는 자들은 살려 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반란의 불길이 번졌다.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황실의 병사들은 비명 한번 제대로 질러 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고, 벨피르 후작은 마린에 머물던 병력도 대동해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순조로운 상황이었다.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시나리오대로 딱딱 진행되었고, 금방 그들의 눈앞에 발할라의 황궁이 보였다.
지금부터가.
진정한 고비였다.
저 안에 발할라 황제의 특수 전력이 버티고 있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는 반란에 성공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불멸의 검사들과 황실의 마법사들이 반란군을 막아섰다.
“여기가 어디라고!”
“윈드 프레스(Wind Fress).”
휘잉-
콰콰콰콰쾅!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벨피르 후작이 동원한 오라 검사들이 세찬 빛을 일으켰고, 반란에 가담한 마법사들도 격렬하게 마력을 분출했다.
불멸의 검사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죽지 않았다.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육체를 재생했고, 황실의 마법사들 또한 기묘한 마법으로 반란군을 농락했다.
시체가 쌓였다.
이대로 반란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변이 생겨났다.
“크악!”
불멸의 검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재생에도 한계가 있는 모양인지, 불멸의 검사가 무릎을 꿇으며 무너지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상대가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반란군은 힘을 내서 상대를 몰아붙였고,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황실이 점점 길을 열어 주기 시작했다.
성공이 보였다.
벨피르 후작은 시체로 뒤덮인 길을 걸으며, 왠지 모를 불길함이 들었다.
‘……발할라 황제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다. 분명히 숨겨진 전력이 있을 것이다.’
확신했다.
황실을 피로 물들이던 그날.
발할라 황제는 이보다 더한 전력을 보여 주었다.
그것을 알기에 벨피르 후작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황제의 병사들은 이렇다 할 반전을 보여 주지 못했다.
길이 완전히 열렸다. 발할라 황제가 머무는 공간까지 더는 막아서는 병사들이 없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문을 활짝 여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자신을 기다릴 것 같았지만, 상황이 순조롭다고 해서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끼익.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날 배신한 건가, 벨피르 후작.”
초연한 표정의 발할라 황제를 발견하는 순간, 벨피르 후작은 반란에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 * *
날이 밝았다.
마린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발할라 황제는 처참한 몰골로 끌려 나왔다.
“우우우우!”
“죽어라!”
“네 녀석이 발할라를 망쳤어!”
사람들이 야유했다.
신랄하게 욕을 퍼부었다.
어떤 이들은 달걀과 돌멩이 등을 던졌고, 돌멩이가 머리에 맞으면서 발할라 황제의 머리에서부터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도저히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자랑하던 황제가, 이런 처참한 몰골이 되다니.
하지만.
눈앞의 모습이 현실이었다.
발할라 황제는 기나긴 고난의 길을 걸어, 그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처형대 위에 올랐다.
목에 밧줄이 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벨피르 후작은 묘한 표정을 보였다.
‘정말 반란에 성공하다니.’
성공하고도.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그래서 확실한 검증 절차를 거쳤다.
혹시라도 발할라 황제가 대역을 내세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진정 발할라 황제인지를 확인했다.
그 결과 진실로 밝혀졌다.
발할라 황가의 핏줄임을 확인했고, 그의 외관에는 그 어떠한 마법적인 요소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간 발할라 황제를 모셔 왔던 벨피르 후작의 본능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진짜였다.
처형대를 올려다보며,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발할라 황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마지막 자비였다.
발할라 황제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분노한 기색과 통쾌하다는 눈빛을 보이는 모습에,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큭큭큭.”
기괴했다.
처형대에 목을 매달고도 웃음을 보이다니.
발할라 황제는 고개를 치켜들고는,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리에 나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내가 아직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던 시절. 그때의 나는 황제의 자리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발할라 황제의 14번째 아들이었기에,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 큭큭큭, 그런데 나는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폭군이라고 불리는 삶에 후회는 없다.”
이죽거렸다.
묘한 발언이었다.
그가 하는 말들은,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머저리 새끼들. 너희가 그 모양 그 꼴이기에 발할라가 몰락하는 것이다. 발할라는 내가 망친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나의 죽음이 발할라의 영광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발할라는 이미 몰락하고 있고…… 컥!”
퉁.
보다 못한 벨피르 후작이 신호를 주었다.
발할라 황제의 발밑이 꺼지면서, 그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바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통에 일그러졌다.
방금까지 의연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죽음 앞에서 바둥거리는 그의 몸짓은 초라하고 나약했다.
얼굴에서 눈물과 콧물을 쏟아 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이 축 늘어졌다.
숨이 끊어졌다.
발할라 황제.
시대를 풍미한 거물이라기에는, 다소 허무한 최후였다.
* * *
반란은 성공했다.
며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뒤.
아직도 피로 얼룩진 황궁에 들어선 벨피르 후작은, 이제는 공석이 되어 버린 황제의 자리를 보았다.
“그 누가, 저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을까.”
빈자리.
대안은 제약적이었다.
발할라 황가의 혈족들은 모조리 죽여 버렸고, 그렇다면 반란군을 주도한 비에토 공작과 자신만이 황제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구미가 당겼다.
처음에는 반란에 성공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세력을 보존한 상태로 성공하자 그의 마음에 욕망이 피어올랐다.
‘명분은 내게 있다.’
이번 반란.
비에토 공작이 주도했으나, 반란을 성공시킨 것은 자신이었다.
명분이 확실했다.
발할라 황제를 처형한 날, 마린의 백성들은 벨피르 후작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를 찬양했다.
폭군에게서 발할라를 구한 영웅.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의 협박도 이제는 효력이 없었다.
협박의 대상이었던 발할라 황제가 죽어 버렸으니, 반란을 도모했다고 한들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완벽했다.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신이시여. 정녕 저를 위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까.”
호사가(好事家)들은 말했다.
벨피르 후작은 시대를 잘 타고난 인물이라고.
그건 사실일지도 몰랐다.
발할라 황제의 밑에서 개처럼 살아온 세월을 딛고 일어나, 어쩌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을 테니까.
때마침.
“비에토 공작이 입성했습니다.”
수하의 말에, 벨피르 후작은 비장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 * *
마린의 성문.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반란의 주도자인 비에토 공작을 확인하기 위해서, 발할라의 백성들이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길거리로 나왔다.
그들이 열광했다.
비에토 공작.
발할라의 영웅이었다.
벨피르가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고 한들, 처음 목소리를 높인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벨피르 후작이 마중을 나갔다.
그는 병사들을 대동한 채로, 비에토 공작을 바라보며 웃었다.
“비에토 공작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눈동자가 바삐 돌아갔다.
일단.
지금은 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를 다른 장소로 이동시킨 뒤에, 황제의 자리를 결정하는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피곤하실 테니 우선 자리를 옮기…… 헉?!”
순간.
벨피르 후작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비에토 공작 바로 옆에.
로브를 눌러쓴 사내가 로브를 걷었다.
그는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그는 발할라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비에토 공작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떠나서, 마린을 공격했던 일로 발할라의 백성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그날 죽인 이들은 결국 백성들의 가족이었으니까.
그래서 더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갑자기 비에토 공작과 나타났다.
그때였다.
비에토 공작이 소리쳤다.
“병사들은 들어라! 반역도 벨피르 후작을 포박하라!”
“그, 그게 무슨!”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에토 공작의 고함에, 그의 병사들이 갑작스럽게 벨피르의 병사들을 도륙하더니 벨피르 후작을 제압했다.
팍.
바닥에 쓰러진 벨피르 후작.
얼굴이 짓눌리며, 그의 몸이 포박되었다.
그제야 알았다.
일이 뭔가 단단히 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