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남부의 무덤 (1)
전사의 시험.
그 유례를 찾기 위해서는 머나먼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처음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하나의 소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발할라의 황제들은 대대로 사후 남부의 무덤에 묻히는데, 그곳에 발할라의 명성을 드높인 위대한 전사들의 심득(心得)이 기록되어 있다. 전사의 시험에 통과하는 자. 위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문의 출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전사의 시험이 존재하고, 발할라의 황제들이 남부의 무덤에 묻힐 때 많은 것들을 같이 매장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상이 들썩였다.
당시에 이름 좀 날린다는 전사들은 모두 남부 밀림으로 향했다.
당당히 남부의 무덤에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전사의 시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도전자 대부분이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일차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주일간의 도전에서, 도전자들은 자신과 같은 야망이 있는 전사들의 도전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강한 전사도 예외는 없었다.
처음 하루 정도는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이면서 도전자들을 쓰러트리다가도, 이틀이 지나면서부터는 급격하게 무너졌다.
말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무한한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상 시험에 통과하지 말라는 것과 같았다.
그러다 간혹.
일주일을 버티는 존재들이 있었다.
드디어 남부의 무덤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오르는 그때, 남부 밀림에서 산다고 알려진 다크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문지기의 역할을 자처했다.
남부의 무덤을 처음으로 만든 황제와의 맹약(盟約)으로 인해, 처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존재가 딱 한 번 출입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다.
모두 실패했다.
항복을 외치며 시험을 포기한 자들은 평생 겁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끝까지 전사의 긍지를 지켜 보겠다고 발악하는 자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사실에, 더는 도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약 백여 년 전.
갑작스럽게 시험을 통과하는 자가 나타났다.
발할라의 위대한 검사라고 불리던 카를로스는, 마지막 관문인 다크 엘프의 시험마저도 통과했다.
난리가 났다.
세상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카를로스가 어떤 보물을 얻고 돌아올지 모두가 관심을 보였는데, 다시 모습을 드러낸 카를로스는 넋을 잃은 모습을 보였다.
시험을 통과하고 격렬하게 포효하던 위대한 전사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야윈 얼굴의 카를로스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바라는 심득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부의 무덤에는 발할라의 추악한 역사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날을 끝으로.
사람들은 관심을 끊었다.
더는 남부의 무덤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발할라의 전통이 다시 한번 세상에 거론되었다.
* * *
선포 이후.
전사의 시험은 열흘 뒤로 예정되었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왕국으로 돌아가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고, 비에토 공작은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발할라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많은 것이 변하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발할라의 새로운 미래에 대해서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예정된 날짜가 다가오자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발할라의 한 펍.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일 때면, 항상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떠들었다.
“……과연 로만 드미트리가 전사의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까?”
“무조건 통과하지. 로만 드미트리는 대륙 제일검(第一劍)이야. 크로노스의 카스트로조차도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그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 전사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겠어.”
“하긴. 혼자서 발할라의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존재인데, 그의 무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
모두가 인정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위대한 전사였다.
대륙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 있었고,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 전후로 오라 검사의 기준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과거에 알렉산드르가 검술 혁명을 일으켰던 것처럼.
이제는 상징적인 존재로 거론되는 그가 아니라면, 현존하는 오라 검사 중에 시험을 통과할 존재는 딱히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냥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는 건 인정해. 문제는 다크 엘프들의 마지막 관문에선 막강한 무력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붙잡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무조건 강하다고 해서 통과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의미지. 그러니까, 어디 한번 지켜보자고. 로만 드미트리가 새로운 역사를 쓸지, 역사의 뒤편에 묻힐지.”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부는 도전 자체에 관심을 보이는 한편,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로만 드미트리가 위대한 전사라는 거? 인정해. 발할라의 축제에서 바르보사를 쓰러트렸고, 마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압도적인 무력에, 비에토 공작을 도와 반란을 일으킨 그는 발할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발할라의 사람인 건 아니잖아. 엄연히 타국의 사람인데, 그가 발할라의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도 동의해. 카를로스가 말하길, 남부의 무덤에는 추악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고 했어. 외부인이 그 진실을 들추는 것도 거슬리고, 무엇보다도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전사의 시험에 통과한다면. 발할라의 역사에 마지막으로 기록되는 것은 위대한 전사인 카를로스가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일 거야.”
인정하는 마음과는 별개였다.
순혈주의(純血主義).
외부인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붙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러한 여론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가 통과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그것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전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발할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 * *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남부 밀림.
수풀이 빼곡하게 우거진 밀림 사이에, 시험의 무대라고 알려진 넓은 공간이 있었다.
벌목(伐木)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 아니었다.
마치 자연이 선물이라도 해 준 것처럼, 그 공간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발할라 대대로 전통적인 행사를 진행할 때 사용되었다.
그곳이 바로 시험의 장소였다.
전사의 시험을 치른다는 소문에, 시험의 무대 주변으로 발할라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바글거렸다.
대단한 관심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비에토 공작.
아니, 새로운 발할라 황제가 감탄했다.
‘그만큼 도전에 목이 말랐던 것이겠지.’
지난 세월.
발할라는 낭만을 잃었다.
무모한 도전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고, 전사의 시험과 같은 전통은 과거의 역사로만 남았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전사들의 피가 끓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발할라의 사람들은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머나먼 거리를 이동했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기대감을 보였다.
이건 기회였다.
발할라의 낭만이 살아나는 상황에, 발할라 황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은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위해 발할라의 전통이 함락당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다. 발할라 제국의 모든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하는 만큼, 그조차도 발할라의 전통에 무릎을 꿇는다면 발할라의 열망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근.
발할라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전사라는 자부심은 바닥에 추락했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만약 이때.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발할라의 역사상 단 한 명의 전사만이 성공한 업적이니만큼, 발할라의 백성들은 발할라가 얼마나 대단한 근본을 갖춘 나라인지를 깨달을 것이다.
그야말로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낭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반란을 주도했던 만큼, 약간의 불씨만으로도 발할라는 반등할 수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말했다.
감사 인사는 충분하다고.
서로의 거래 조건은 이행했기에, 지금부터 은인을 위해서 배려해 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물론.
배려할 여력도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는 일은 발할라로서도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시간이 되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발할라 황제가 소리쳤다.
“시험의 규칙은 간단하다. 앞으로 일주일간, 시험에 응한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모든 도전을 받아들일 것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단 일주일 동안 자유롭게 도전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 모든 시련을 통과할 경우 다크 엘프들이 마지막으로 ‘남부의 무덤’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의 눈빛이 열망으로 일렁였다.
드디어.
“도전할 자는 앞으로 나와 신분을 밝혀라.”
시험의 무대가 막을 올렸다.
* * *
첫날부터 집단으로 도전하는 경우는 없었다.
발할라는 전사의 나라다.
일단은 일대일로 가능할 때까지 부딪쳐 보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고, 발할라 황제의 선언에 한 사람이 과감하게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웅성거렸다. 익히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었고, 처음부터 이 정도 급의 인물이 나설 줄은 몰랐다.
발할라 랭킹 10위.
발데라스였다.
발할라 황제의 최측근으로, 헤르나드를 무너트리는 과정부터 반란군에 가담했던 최상위 실력자였다.
그가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상대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발데라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존경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반란군의 입장이었기에,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이루었는지를 잘 알았다.
지금도 로만 드미트리가 부탁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다만.
이번 문제는 얘기가 달랐다.
직접 부탁하지도 않았거니와, 다른 사람들처럼 발할라의 전통이 무너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척.
대답 대신.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들었다.
완벽히 선을 긋는 행동에, 발데라스는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내 실력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을 직시했다.
아레스조차 쓰러트릴 수 없는 실력으로 승리를 넘보았다간, 아마 참담한 패배로 발할라의 명예에 먹칠을 할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선봉장을 자처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전사의 시험에 응하겠다는 의향을 밝히면서, 그는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압도적인 실력자다. 그간의 행보를 보았을 때, 그리고 내가 직접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대로라면 일주일을 충분히 버티고도 남는다. 그렇기에 나는 승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의 실력자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있도록, 상대의 체력을 최대한 갉아먹는 것을 목표로 한다.’
꽈악.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허무맹랑한 계획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분석했다.
지난 열흘 동안, 그는 폐관 수련을 진행하며 단 1분이라도 더 버티기 위한 전략을 구상했다.
할 수 있다.
상대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도, 발데라스 또한 발할라 랭킹 10위에 빛나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심판은 발할라 황제가 직접 맡았다.
그가 신호를 보내는 순간.
펄럭.
탓.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를 폭발시켰다.
일단 빠르게 뒤로 빠져, 로만 드미트리가 먼저 들어오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훅.
“……?!”
바로 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어느새 치고 들어왔다.
판단은 빨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보통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선호하기에, 이를 악물며 예상되는 공격 방향을 막아섰다.
아니, 막았다고 생각했다.
빠악!
비틀거리는 발데라스.
그가 현실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목덜미를 맞고서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뒤였다.
* * *
환호는 없었다.
모두 말을 잃었다.
10초?
아니다.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발할라 황제가 신호를 보내고 눈 한 번 깜빡일 사이에, 발데라스는 바닥에 나가떨어져 미동도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강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발데라스와 같은 인물이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발데라스는 대놓고 수비적인 모습을 보였다.
먼저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빠지려는 움직임은, 그가 대의를 위해 선봉에 섰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패배했다.
죽이지도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배려이자, 그것은 동시에 충분한 여유가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그때였다.
오랜만에, 로만 드미트리가 익숙한 단어를 내뱉었다.
“다음.”
그 단어가.
발할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