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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화 (368/615)

368화 남부의 무덤 (2)

발할라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무엇일까?

패배하는 것?

아니다.

오히려 강자와의 대결에서 패배하면 호탕하게 웃으면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는 얘기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데라스를 죽이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인간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수준의 자비였지만, 마치 누가 나와도 자신을 쓰러트릴 수 없다는 듯한 ‘다음’이라는 단어는 발할라 전사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인파 사이로.

불쑥 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그는 모르몬드라는 이름의 오라 검사였는데, 이전 차례였던 발데라스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실력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검을 뽑아 들며, 그가 비장한 눈빛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 발할라는 당신을 존경하며, 당신의 실력을 인정합니다. 그 누구도 일대일로는 당신을 이길 수 없겠지요. 하지만 방금 실수하셨습니다. 적당히 어느 정도 선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의 무력을 증명하셨다면 저희도 순순히 길을 열어 드렸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발할라의 입장은 두 부류였다.

상황을 관망하는 사람들, 어떻게든 막으려는 사람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전자의 사람들을 후자로 변하게 만들었다.

모르몬드 또한.

전자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전장에서 싸운 모습을 보았던 그는 절대 나설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승리를 확정하는 듯한 발언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발할라는 전사의 나라다.

상대가 제아무리 로만 드미트리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된 이상 쉽게 원하는 바를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제 실력으로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목숨을 바쳐서라도 최대한 발악해 드리겠습니다. 한 번이라도 검을 더 휘두르도록, 조금이라도 더 마나를 사용하도록. 일주일의 시간이 모두 흘렀을 때, 그때는 지금처럼 여유를 부릴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은 다짐이었다.

자기 자신과 발할라 사람들에게 말하는 다짐.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르몬드가 준비를 마치자, 발할라 황제가 신호를 보냈다.

펄럭.

팟-

선공은 모르몬드였다.

발데라스가 수비적으로 대응하다가 오히려 당했다는 사실에, 그는 먼저 공격함으로써 로만 드미트리의 체력을 빼낼 생각이었다.

오라가 폭발했다.

다리에서 분출되는 마나가 순식간에 로만 드미트리와의 거리를 좁혔고, 체력의 안배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채 시작부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퍽!

“커억.”

모르몬드가 눈을 부릅뜨며 무릎을 꿇었다.

분명히 폭발하는 오라가 로만 드미트리를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은 채 모르몬드의 복부를 강타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떻게 공격을 피했고, 어떻게 반격을 시도했는지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그는 가혹한 현실을 마주했다.

“다음.”

명백한 도발이었다.

모르몬드의 발언을 듣고도.

발할라 전사들이 분노하는 기색을 확인하고도.

똑같았다.

어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라는 반응에, 발할라의 전사들이 차례로 나섰다.

“진짜 적당히를 모르시네.”

“이번에는 제가 상대합니다!”

그들 모두.

승리를 바라지 않았다.

발데라스, 모르몬드가 생각했던 것처럼 체력을 조금이라도 갉아먹길 바랐고, 연이은 신호에 그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적당히를 모르냐면서 분노하던 대머리 사내는 얼굴을 강타하는 일격에 피를 흩뿌리며 나가떨어졌고, 이후에 도전한 사내는 산산이 조각나는 오라에 정신을 잃었다.

다음.

또 다음.

차례가 반복되었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전사의 시험이 예정되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예전 기록을 확인했고, 발할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도 전사의 시험에 도전할 때는 이처럼 무모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일주일간 진행되는 시험의 무대에서, 처음부터 이토록 빠르게 달리면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체력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게 상식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도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1분에 2명을 맞이했다.

한 명당 30초를 잡는 이유는 그들을 상대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승부 자체는 5초 내외로 결판이 나는데 쓰러지는 사람들을 치우는 시간이 있다 보니 30초가 소모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부상자가 속출했다.

도전은 끊임없었고,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콰득.

“크악!”

무릎을 꿇는 발할라의 검사.

벌써 몇 명이나 쓰러트렸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아직도 건재한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지켜보던 사람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체 저 괴물은 지치기는 하는 거야?”

그 말이.

발할라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 * *

자세 하나.

호흡 하나.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땀조차 흘리지 않는 모습에, 사람들은 절망적이지만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건가.’

선구자(先驅者).

오라 혁명의 주인공.

확실히 달랐다.

하루만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발할라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1일 차 시험은 이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벌써 해가 저물었다.

전사의 시험.

본래 그것은 밤낮으로 이루어졌다.

도전하는 이가 조금도 휴식을 취할 수 없도록 극한으로 몰아붙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험의 기준이 완화되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한 존재도 일주일을 밤낮없이 싸울 수는 없었다.

마나라는 것은 한계가 있고, 마나가 바닥을 드러내면 그때는 끝이었다.

생각해 보라.

발할라 전체를 상대하는 일이다.

밤새 회복할 시간을 주더라도, 하루 내내 이루어진 대결의 피로를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다.

그렇게 조금씩.

체력적으로 갉아 먹히는 것이다.

체내에 보유한 마나는 전날처럼 완벽할 수 없고, 육체적인 피로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몸을 느리게 만들었다.

사실 이러한 룰은 성공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사의 시험에 도전할 정도라면 발할라에서는 인재라고 불릴 만한 인물들이었고, 그들이 허무하게 죽는 모습이 속출하면서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밀림에서의 밤.

생각할 시간을 부여했다.

밤새 하루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면, 또다시 하루가 반복된다는 생각에 공포가 엄습했다.

그렇게 날이 밝았을 때.

대부분이 그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중간에 포기했다는 겁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고 한들, 이런 무모한 대결에 의미 없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택의 기회는 로만 드미트리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지금 보여 준 모습만으로는 포기할 것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차별을 할 수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은인이다. 아무리 실패하길 바란다고 한들, 비겁한 방법으로 은인을 무너트리는 것은 이전 황제와 다를 바가 없다. 발할라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전사들의 나라.

그 이름에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았다.

패배할지언정, 발할라 황제는 뒷말이 나올 일을 처음부터 벌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진행하시죠.”

로만 드미트리였다.

그가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더는 개인과의 대결은 의미가 없는 것 같으니, 지금부터는 다수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 *

정말이지.

적당히를 몰랐다.

그가 강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개인과의 대결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걸 굳이.

로만 드미트리는 들쑤셨다.

발할라의 나약함이 지적받는 듯한 상황에, 발할라의 사람들도 더는 배려할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

“지금부터는 저희도 예의를 갖추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새로운 인물들이었다.

약 십여 명의 사내.

그들의 등장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용병대장을 제외한 개개인의 랭킹은 그리 높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벨레린 용병단. 발할라의 5성 검사인 벨레린을 필두로 만들어진 용병단으로서, 그들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합공(合攻)의 달인이었다.

사람들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선 것도 의외인데, 겨우 첫날부터 벨레린 용병단과의 대결이 성사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발할라의 역사상.

이토록 빠른 페이스는 없었다.

전사의 시험을 통과했던 카를로스 또한, 3일이 지났을 때 다수의 대결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로만 드미트리의 승리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벨레린 용병단을 시작으로 로만 드미트리는 매우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팔락-

대결의 시작.

벨레린 용병단이 달려들었다.

개인의 대결과는 달랐다.

그들은 사방으로 퍼지더니, 로만 드미트리의 사각을 공략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세 명은 정면에서, 두 명은 뒤로, 두 명씩 양옆으로.

그것만으로도 눈이 팽팽 돌아가는 상황에서, 사각을 노리는 공격들은 도망칠 틈이 보이지 않았다.

카앙-

카카카캉.

공격이 막혔다.

로만 드미트리는 동시다발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공격들을 차분하게 막아 내더니, 가장 적극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존재의 다리를 걸었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는 사내.

균형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의 얼굴에 주먹이 작렬했고, 황급히 커버하러 오는 동료의 가슴팍마저 베어 버렸다.

푸확.

피가 튀었다.

죽지는 않을 정도의 얕은 일격.

순식간에 두 명을 처리한 로만 드미트리는, 여유로운 얼굴로 뒤이어 밀려드는 공격들을 맞닥트렸다.

일대 다수.

확실히 일대일의 대결과는 달랐다.

하지만 격렬하게 부딪치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서로 복잡하게 뒤얽혔다.

벨레린 용병단은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합공을 보여 주었지만, 어떤 방식의 공격이든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쓰러지는 사람이 발생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실력자라고 자부하는 존재건만,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반격이 작렬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을 몰랐다.

일련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는 호흡을 조절했다.

전력을 다했다면 벨레린 용병단을 더 빠르게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도 일주일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 사람들을 경악에 빠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지금의 상황이 호흡을 조절하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천마 백중혁의 싸움.

다수와의 대결은 익숙했다.

한 번의 호흡으로 체력을 소모했다면, 한 번의 호흡을 들이키며 체력을 회복시켰다.

전신 곳곳으로 퍼져나간 마나의 기운이 근육을 어루만지며, 체력의 손실을 처음부터 방지했다.

발할라의 작전.

잘못되었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강한 자가 강한 것이 아닌.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고.

로만 드미트리는 무력을 갖추지 못하던 시절.

끝까지 살아남는 지구력까지 갖추었던, 발할라 사람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존재였다.

콰득!

얼굴이 박살이 났다.

마지막으로 쓰러지는 벨레린의 모습에, 그 뒤로 경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

덤덤히 내뱉는 말.

사람들은 겨우 첫날부터, 이 시험에 희망이 없음을 직감했다.

* * *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발할라 황제는 말을 잃었다.

‘……이게 정녕 한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란 말인가.’

밤새.

대결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다수로 진행되는 대결에 사람들은 유의미한 결과를 기대했지만, 날이 밝은 지금 현실은 참담했다.

주변이 피로 물들었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려 나갔고, 발할라에서 대단한 명성을 떨치던 존재들도 이름값이 무의미한 결과를 보였다.

이쯤 되니 머릿속에 혼란이 일었다.

상식적으로는 위대한 카를로스조차 불가능한 업적을, 로만 드미트리는 현실로 보여 주고 있었다.

문득.

발할라 황제는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같이 싸운 기억이 없었다.

자신은 헤르나드.

로만 드미트리는 북부.

서로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고, 서로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는 정보로만 들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어째서 로만 드미트리를 찬양하는지를.

산체스가 반란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는 상식을 벗어났다.

그 많은 사람을 쓰러트리고도, 아직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산체스가 다가와 말했다.

“……황제 폐하. 이대로는 끝이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히 체력적으로 뛰어나기에 건재한 것이 아니라, 체력을 보존하는 그만의 방법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를 쓰러트리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호전적인 산체스의 입에서.

처음으로 타협이 거론되었다.

그의 말처럼.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전부 실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발할라가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을 이렇게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참 거슬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달려드는 부류의 인간들. 발할라의 역사는 전장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전사의 자질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말투가 달라졌다.

밤새 달려드는 전사들.

끝까지 굽히지 않는 그들의 눈빛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발할라는.

결국, 굴복시켜야 할 존재다.

그들과 일시적인 타협을 맺었으나, 그들은 다른 왕국과는 다르게 밑으로 들어올 존재는 아니었다.

저들의 눈빛이.

저들의 의지가.

그들이 맹수임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결과를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자 했다.

“지금부터는 순서를 구분하지 않고 전부 공격해도 좋다. 내가 남부의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날 쓰러트려라. 그 대신…….”

슥.

검을 들었다.

기세가 달라졌다.

겨우 이틀 차의 해가 떠오르는 지금,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첫날은 그간의 관계를 생각해 자비를 베풀었으나, 지금부터 도전하는 자들은 목숨으로 도전의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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