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0화 (370/615)

370화 남부의 무덤 (4)

다크 엘프들의 수장.

다르칸은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도플갱어가 자멸(自滅)하는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설마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건가.’

경악했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명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떠나, 도플갱어는 애초에 현세의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다르다.

다크 엘프의 기록이 말하기를, 차원의 균열에서 떨어져 나온 마계의 생물을 포획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도플갱어였다.

마계의 생명체.

마물이었다.

문제는 이 마물이 마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도플갱어는 마계에서 추방당한 존재다. 그들의 욕심이 멸족에 이르게 만들었지.’

오랜 옛날.

도플갱어들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저질렀다.

마계에서 마물은 천한 존재에 불과한데, 한 도플갱어가 마족의 힘을 흡수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터득했다. 강력한 힘을 얻었다.

최초의 도플갱어를 시작으로 마족의 힘을 차례로 빨아들이면서, 그들은 마물의 신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 결과.

그들은 멸족을 당하고 말았다.

정확히는 그중 일부가 차원의 균열을 통해 도망쳤는데, 하필이면 다크 엘프의 영역에 떨어지면서 그들이 부리는 노예가 되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도플갱어의 진실이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놀라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다르칸의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의 힘조차 받아들인 도플갱어가, 인간인 로만 드미트리의 힘은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해 버리다니.’

분명했다.

도플갱어의 붕괴 현상이었다.

다크 엘프들은 포획한 도플갱어로 여러 실험을 진행했었는데, 그들은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받아들였을 때 붕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마족의 힘조차 받아들였던 도플갱어가, 한낱 인간에 불과한 로만 드미트리의 힘은 감당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넋을 잃었다.

믿기지 않았다.

세계수의 축복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세상에 이와 같은 인간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다르칸은 멍하니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다가,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구원자시여. 도플갱어가 구원자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자멸했습니다.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이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슥.

다크 엘프들이 길을 열었다.

거울의 시련.

정당한 방법으로 통과했다는 증거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고개를 돌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발할라의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남부의 무덤에 들어갈 것이다. 이 결과에 의문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 앞으로 나오도록.”

그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들도 똑똑히 보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수많은 도전자를 쓰러트리고, 마지막 거울의 시련마저도 상대가 자멸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굳

이 다크 엘프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얼추 돌아가는 상황만 보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진실을 들여다볼 자격을 증명했다.

고개를 돌렸다.

더는 대회가 무의미했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로만 드미트리.

로만 드미트리와 그의 병사들이 모두 지나가자, 다크 엘프들은 더는 출입할 수 없다는 듯이 길을 막아섰다.

* * *

남부의 무덤.

그것은 시험의 무대 지하에 있었다.

안내는 다르칸이 맡았다.

일정 구역에 다다르자, 다르칸은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온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곳부터는 자격이 있는 분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이곳에서 대기하라.”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번 발할라행은 크리스와 케빈, 그리고 사병 중 일부만을 대동하고 나섰다.

그들은 다르칸의 명령에는 반응하지 않다가,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자 그제야 대열을 갖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둠으로 물든 공간을 바라보며 다르칸이 말했다.

“부디 구원자께서 원하는 것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수고했다.”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마법적인 기운이 자신의 몸을 훑는 것을 느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나를 일으켜 그것을 저지하려 했지만, 곧바로 남부의 무덤이 자신을 확인하는 절차임을 알아차렸다.

남부의 무덤은 숨겨진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마음만 먹는다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고, 그렇다 보니 발할라의 선조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확실한 방비를 갖추었다.

전사의 시험은 정당하게 들어가는 방법이라면.

방금 로만 드미트리를 확인한 마나의 기운은 출입자의 정체를 확인해 제거할지 말지를 결정했다.

결과는 당연히 통과였다.

스르르 사라지는 마나의 기운에, 로만 드미트리는 안쪽 깊숙이 걸음을 옮겼다.

지하는 제법 깊었다.

한참을 이동하고서야 길을 막아서는 거대한 문과 그 주변을 지키는 거인 동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상의 형태는 위협적이었다.

크기는 약 7~8m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발할라의 전사들처럼 근육질의 몸매에 크기에 걸맞은 거대한 무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출입자를 확인하는 일차 관문이 마법적인 힘이라면.

이곳은 물리적인 힘을 통해, 자격이 있는 자만 통과시키겠다는 발할라 제국의 강한 의지를 보였다.

끼익, 끼이익.

동상들이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빛이 로만 드미트리를 향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목소리가 웽웽 울렸다.

그들에게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로만 드미트리를 세세하게 확인했다.

[……자격이 확인되었다 ……길을 열어 주겠다.]

쿵, 쿵.

거인 동상이 움직였다.

그들이 문에 달린 손잡이를 움켜쥐더니, 양옆으로 힘껏 당겼다.

쿠르르르르르릉.

문이 열렸다.

드디어.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발할라의 진실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수수했다.

지하 동굴을 용도에 걸맞게 깎은 형태였는데, 공간은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발할라 황제들의 유골을 안치시킨 납골당(納骨堂)과 그들의 흔적을 기록해 놓은 공간.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납골당을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기록실로 이동했고, 생각보다 작은 공간에는 황제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책장에 분류별로 꽂혀 있었다.

그중.

로만 드미트리는 하나의 문서를 골랐다.

[카넬라스 발할라]

최초의 기록.

그는 바로.

발할라를 제국으로 도약시킨, 남부의 무덤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다.

* * *

남부의 무덤.

그곳이 탄생한 이유는 심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카넬라스 발할라가 남긴 기록은 시작부터 목적을 명확히 밝혔다.

[나는 후대에 발할라의 진실을 남길 공간이 필요했다. 남부의 무덤은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왕가(王家)의 핏줄을 타고난 자들이 아니라면 이곳에 출입할 수 없을 것이다. 단 하나의 예외는 시험에 통과한 자들. 그들은 발할라의 전사로서 진실을 들여다볼 자격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우리가 대대로 쌓을 진실을 특별히 공유할 것이다.]

진실.

카를로스의 발언대로였다.

그는 이곳에 발할라의 역사, 발할라의 추악한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

[발할라가 제국으로서 인정받은 본격적인 시발점은 헥토르 왕국과의 전쟁부터였다. 당시 강대국으로 분류되던 헥토르를 무너트림으로써, 사람들은 발할라가 크로노스 제국과 비견되는 저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내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남부 밀림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었을 뿐, 샐러맨더 대륙에서 우리를 이길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오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상했다.

글은 그것을 작성한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는데, 카넬라스 발할라는 묘한 두려움 같은 것을 보였다.

[어느 날, 크로노스 제국에서 사람을 보냈다. 그들은 본인들이 갖춘 힘의 ‘일부’를 보여 주었고, 나는 그 순간 발할라의 힘으로는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크로노스 제국은 발할라의 파멸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 대륙의 양대산맥으로서 공존할 것을 제안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협력 관계를 바랐다. 나로서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의 대가는 발할라의 파멸일 것이 분명하기에. 사람들이 발할라 제국의 도약을 축복하는 그때, 우리는 크로노스의 더러운 손을 잡았다.]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지금은 죽어 버린 발할라 황제.

사람들은 전대 황제와 크로노스 제국과의 연관성을 주장했는데, 카넬라스 발할라의 기록대로라면 그들의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밝혀진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발할라로서는 강제적이었다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대륙의 양대산맥이라고 불리는 발할라 제국이 실제로는 크로노스 제국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초반 부분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일부를 확인했을 뿐인데, 카를로스가 왜 추악한 진실이라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충격적인 진실은 아직 도입부에 불과했다.

[발할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크로노스 제국에게 대항할, 그들의 위협에도 스스로를 지킬 만한 힘을 갖출 시간이. 그런데 협약을 맺고 얼마 뒤, 크로노스 제국은 발할라에 이런 제안을 해 왔다. 시스템적으로 두 제국을 제외하고는 모두를 도태시키는 체계를 만들자고. 그것은 반드시 발할라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발할라의 전통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렇게 랭킹(ranking)이 탄생했다.]

* * *

사람들이 아는 진실과는 달랐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겨루고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발할라의 전통으로부터 랭킹이 탄생했다고 생각하는데, 진실은 크로노스 제국의 제안이 구체적인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는 이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기존의 체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조금만 세세하게 따져보면 랭킹의 탄생에는 의문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문제였다.

생각해 보라.

랭킹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나라가 어디인가.

바로 발할라 제국이다.

발할라 제국이 신전을 통해 랭킹을 관리함으로써, 그들은 뛰어난 실력자들을 먼저 선점하는 기회를 얻었다.

실제로 로만 드미트리도 발할라 제국의 제안을 받았었다.

문제는 이 사실을 크로노스 제국도 모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들은 랭킹이 자리를 잡도록 방관했다.

아니, 오히려 지지했다.

본인들도 랭킹 시스템을 받아들임으로써, 순위를 매겨 제국의 강자를 세상에 드러냈다.

[크로노스 제국이 말하길, 랭킹 시스템으로 제국이 얻을 이득은 두 가지라고 했다. 첫 번째는 제국의 전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대륙의 왕국들을 옭아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대륙 전역에서 탄생하는 인재들을 먼저 선점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발할라의 전통을 내세워 랭킹을 탄생시켰고, 랭킹은 순식간에 발할라의 자부심이 되었다.]

랭킹을 통해 얻은 정보.

그것은 크로노스와 공유되었다.

발할라만의 이득이 아닌, 크로노스 제국도 랭킹 시스템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발할라의 후손들은 이 기록에 실망할 것이다. 발할라가 실제로는 초라한 현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에, 분노하고 절망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진실을 알아야만 크로노스 제국의 야망에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할라를 협박했던 그때의 크로노스 제국은 이미 대륙을 정벌할 만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진정한 힘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것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발할라의 후손들이여. 나는 비록 크로노스의 힘에 무릎을 꿇었지만, 너희는 부디 발할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그것으로.

카넬라스 발할라의 기록은 끝났다.

* * *

복잡한 진실이었다.

발할라의 역사에 크로노스가 개입했다는 것.

그리고 카넬라스 발할라가 발할라의 미래를 걱정해, 이 남부의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는 진실.

문제는.

이것만으로는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대 발할라 황제, 그가 반란에 허무하게 죽은 이유를 알아내고자 이곳을 방문했다.

‘카넬라스 발할라가 죽은 이후, 크로노스 제국이 발할라 황실을 완전히 점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기록대로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대 황제의 죽음을 설명할 수 없다.’

전대 황제의 죽음.

발할라의 선조도, 크로노스 제국도.

그 누구도 이득을 보는 존재가 없었다.

발할라의 부흥을 원했다면 애초에 전대 황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크로노스 제국이 의도했다기에는 그를 죽일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발할라 황제는 명백히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하는 존재였다.

그를 버리고 비에토 공작을 황제의 자리에 내세우게 된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앞으로의 미래에 발할라, 드미트리 연합을 상대할 수도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발할라 황제라는 꼭두각시를 잘 관리했다면,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의문의 연속이었다.

누가 14번째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렸으며.

기껏 황제로 만들어 놓고 버린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배후가 있음은 확실했다.

배후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전대 발할라 황제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탁.

무언가를 집었다.

그것은 바로.

‘코르테스 발할라.’

전대 황제의 아버지.

반란이라는 복합한 과정을 통해 14번째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 낸, 바로 진실에 가장 근접한 인물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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