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1화 (371/615)

371화 남부의 무덤 (5)

문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고, 두 번째에는 관찰일지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코르테스 발할라가 가져온 자료가 아니다. 전대 황제이자 14번째 아들이었던, 슈테른 발할라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남긴 기록이겠지.’

발할라의 황제들.

남부의 무덤을 만들어 낸 카넬라스 발할라를 제외하고는, 즉위 이후의 상황을 이곳에 기록할 수 없다.

그 말이 무슨 의미겠는가.

남부의 무덤은 진실을 확인하는 용도이며, 코르테스 발할라가 후계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이 관찰 일지는 다음 황제의 소행일 수밖에 없었다.

팔락.

문서를 넘겼다.

처음에 눈길을 사로잡은 인물은 코르테스 발할라의 첫째 아들, 바로 황태자(皇太子) 제주스 발할라에 관한 내용이었다.

[……제주스가 처음 검을 잡았을 때, 나를 비롯한 황실의 수뇌부들은 제주스야말로 발할라의 미래를 이어받을 적임자임을 확신했다. 제주스는 전사의 핏줄을 타고났다. 겨우 7살의 나이에 마나를 깨우쳤으며,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특유의 검술은 싸움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발할라의 황제들이 대대로 그랬듯, 제주스는 선봉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용맹한 전사로 성장할 것이다.]

팔락.

[제주스는 검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다. 전략에도 관심이 많아,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살며 전술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런 일도 있었다. 발할라 최고의 참모와 가상으로 전략 대결을 진행했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참모의 입에서 항복을 받아 냈다. 그의 나이 불과 15살의 일이었다.]

팔락.

[제주스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도 알았다. 본인이 부족한 일에는 적절한 인재를 배치했으며, 사람들이 본인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도록 귀하게 대해 주었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제주스 발할라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그를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었고, 내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가신들조차도 제주스 발할라가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 또한 인정하는 사실이다. 확실하다. 제주스가 황위를 물려받는다면, 발할라는 반드시 더 나은 미래를 만들 것이다.]

팔락.

[고로, 불합(不合)이다.]

하나의 단어.

우뚝, 손길을 멈추었다.

코르테스 발할라는 장남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를 설명하더니, 그에 대한 결론으로는 불합을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14번째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린 것은 확실히 발할라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 크로노스 제국을 위한 일이라기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다는 것이다.

페이지를 넘겼다.

다른 후계자들을 지나, 로만 드미트리는 한 이름에서 멈추었다.

[슈테른 발할라]

발할라의 14번째 아들.

폭군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관찰일지였다.

* * *

[슈테른은 태생부터 나약한 아이다. 검을 제대로 사용하기는커녕, 나의 아들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열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미를 꼭 빼닮은 녀석이었다. 천한 궁녀 출신의 어미처럼, 슈테른은 황가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답지 않게 살았다. 검보다는 책을, 훈련장보다는 산책을, 내 눈에 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다른 부류들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

팔락.

[하인으로부터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슈테른을 백의(白衣)의 천사라고 불렀다. 매일 정갈한 옷을 입고, 황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챙기는 슈테른은 천사라고 불릴 만큼 남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일반 하인들이 굶주릴까 먹을 것을 챙기고, 힘이 들어서 쉬고 있는 이들의 말동무가 되어 주며, 어떤 이가 금전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비밀리에 도와주기도 했다. 슈테른은 신분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이기에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발전보다는 주변을 돌보는 것에 썼다.]

의외였다.

슈테른 발할라.

폭군이라고 불리는 존재.

그가 살아온 삶을 생각한다면, 이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발할라 황제는 살육을 즐겼다.

철저하게 성과주의를 따랐으며, 자신의 눈밖에 벗어난 존재들을 서슴없이 죽여 버렸기에 사람들은 발할라 황제에 대한 두려움을 보였다.

그런 그가.

한때는 백의의 천사라고 불렸다.

괴리감이 생기는 기록이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이어서 페이지를 넘겼다.

팔락.

[어느 날, 슈테른에게 물었다. 너는 이 아비의 자리가 탐나지 않느냐고. 슈테른은 일말의 욕심도 없으며, 지금처럼 사는 이유가 형제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경쟁자로 보일 것이기에. 슈테른은 투쟁보다는 타협하는 것을 택했고, 황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으로 자신은 경쟁력이 없음을 형제들에게 어필했다. 실제로 그의 노력은 유의미했다. 제주스 발할라가 내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그에 반대하는 그 어떤 세력도 슈테른 발할라의 목숨을 노리지는 않았다.]

팔락.

[어떤 이들이 말했다. 슈테른 발할라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냐고. 어쩌면 착한 황제로 인해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만들어질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발할라 제국은 슈테른으로 인해 내리막길을 걸으리라는 것이다. 변방의 소국이라면 그는 적임자일 것이다. 하지만 대륙을 평정해야 하는 제국에서, 슈테른 발할라는 절대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팔락.

[그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적임자다.]

모순이었다.

제주스 발할라와는 다르게.

부적격하다는 이유를 끊임없이 연설한 코르테스 발할라는, 적임자라는 상식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

* * *

탁.

문서를 덮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미스터리였다.

코르테스 발할라의 기록을 본다면 어느 정도 의문이 해소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관찰일지는 오히려 혼란을 부추겼다.

사실 코르테스 발할라는 남부의 무덤에 특별한 것을 남기지 않았다.

이것도 슈테른 발할라가 남겼기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그런 노력조차 없었다면 코르테스 발할라가 말도 안 되는 후계 책봉을 한 이유는 영영 역사 속에 묻혔을 것이다.

기록을 확인한 이후.

생각할 수 있는 가설은 하나였다.

코르테스 발할라와 크로노스 제국의 결탁.

생각해 보면, 발할라와 크로노스는 서로의 경계를 이용해 항상 두 국가만 유리한 판도를 만들었다.

양대산맥이라는 말은.

두 제국을 떠받치는 판도를 의미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반복되는 의문은 어떤 이유든 간에 슈테른 발할라를 후계자로 책정할 이유도, 힘겹게 반란을 일으켜서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은 그를 죽일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본인의 기록이 필요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에는 슈테른 발할라의 기록을 확인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머리맡에는 그동안 소중하게 키웠던 고양이의 사체가 있었다. 그것의 형태는 처참했고, 피로 물든 침대에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인을 불렀다. 그때부터 끔찍한 일이 반복되었다. 고양이, 쥐, 새, 강아지 등등 온갖 동물들의 사체가 항상 내 머리맡에 놓여 있었고, 그것을 치워야 할 하인들은 항상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알아서 치우라는 듯이. 나는 그날부터,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일기였다.

잘 정돈된 글씨가 그때의 감정을 생생히 전달해 주었다.

[오늘은 밥을 먹다가 돌을 씹었다. 처음에는 착각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날수록 내가 먹는 모든 것에서 이물질이 나왔다. 물을 마시다 보면 기름이, 고기를 먹다 보면 벌레가, 어떤 것을 먹든 정상적인 것은 없었다.]

팔락.

[문이 열렸다. 조그마한 틈으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너무 놀라서 경비병에게 제발 저 존재를 치워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비웃었다. 그런 존재는 없다면서 내 정신을 의심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 나는 의문의 존재와 밤새 시선을 마주쳤다.]

점점.

글씨가 엉망으로 변했다.

정신이 무너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슈테른 발할라는 처음부터 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떠한 목적에 의해 정신이 갉아 먹히기 시작했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슈테른 발할라를 방관했다.

후반부에는 아예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악필(惡筆)로 가득했다.

정신이 나간 듯, 알아볼 수 없는 글씨와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글들로 일기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마지막.

그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이러다 난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죽기 전에, 나를 죽이려는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 반드시 이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것이.

슈테른 발할라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 * *

일기의 의미는 명백했다.

전대 황제.

그는 무언가의 꼭두각시였다.

코르테스 발할라가 어째서 자기 아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들 중에서 제일 나약한 인물을 택해 반란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발할라 황실이 피로 물든 날. 광기로 얼룩진 슈테른 발할라는 자신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다.

사람들은 그날을 기억하며 발할라 황제를 폭군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은 폭군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전대 황제의 행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왜 미쳐 살았는지, 그가 국정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과거가 그의 행동을 설명했다.

‘내가 남부의 무덤에서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발할라의 과거에 크로노스 제국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 두 번째는 코르테스 발할라는 의도적으로 발할라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을 황제의 자리에 올렸다는 것, 세 번째는 슈테른 발할라는 본인의 생존 여부 자체도 결정하지 못할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

비에토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꼭두각시는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특별한 의도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건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버려졌다.

끼익.

의자에 몸을 기댔다.

부족했다.

남부의 무덤에는 충격적인 진실들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알맹이는 없었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이 일에 배후가 있다면, 발할라 황제들이 대대로 확인할 수 있는 남부의 무덤에 자신의 행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조각조각 나누어진 정보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유추해야만 했다.

“왜일까. 그는 어떻게 황제가 되었으며, 어째서 지금 배후의 버림을 받았을까.”

왜.

똑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생에도, 그리고 현생도.

로만 드미트리는 문제를 맞닥트렸을 때, 오히려 피가 차갑게 식으며 머릿속이 맑아졌다.

‘진실이 빠져 있는 이상, 나로서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조각조각 나누어진 정보를 기반으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사실에 집중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누가 이 상황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았을까.’

눈을 지그시 감았다.

결국.

음모라는 것은 명확한 결과로 직결되었다.

음모는 특별한 목적이 있기에 행해지는 것이고, 그 결과는 어째서 이러한 음모가 발생했는지를 증명해 주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결과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그로부터 이득을 보는 존재들.

그들이 음모의 주도자일 가능성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는 상관관계였다.

물론.

그것은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생각에 잠겼던 로만 드미트리가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제.

다시 밖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시험의 무대.

사람들은 그곳에서 계속 기다렸다.

마침내 다시 나타난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발할라 황제는 밝은 얼굴로 마중을 나왔다.

“필요한 것은 얻으셨습니까?”

“예,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발할라의 위대한 전사라고 평가받는 카를로스가, 남부의 무덤에 발할라의 추악한 진실이 있다고 표현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씁쓸한 일이지요. 저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를 나누시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하기에는 적절한 내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또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남부의 무덤에 들어갔다.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발할라 제국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그로서는, 크로노스 제국이 랭킹과 연관이 있다는 충격적인 정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남부의 무덤에 특별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다른 황제들도 그와 같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는 발할라의 진실만 확인하고는 밖으로 나와 버렸다.

둘의 대화.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었다.

작은 목소리기도 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의도적으로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차단했다.

그때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진실을 확인할수록 의문이 들더군요. 카넬라스 발할라, 코르테스 발할라, 슈테른 발할라. 그들의 기록이 모두 사실이라면, 발할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득을 보는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없습니다.”

결론을 쫓았다.

과정이 아닌 결론부터 시작해, 이 과정을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는 한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발할라 황제. 아니, 비에토 공작.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이득을 본 존재는 네가 유일하다.”

그 말에.

순간.

발할라 황제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