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6화 (376/615)

376화 악역(惡役) (3)

현생(現生).

비약적인 성장은 당연한 결과다.

천마로서의 경험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스스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크리스, 케빈, 지금은 죽어 버린 헨더슨 등등.

자신을 만나기 전에는 별 볼 일 없었던 존재들이 성장했듯, 자신의 성장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상함을 느꼈다.

화마의 불길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그게 전생의 힘만은 아님을 알았다.

‘아무리 염화신공을 사용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몸으로 화마의 덩어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한 재능이다. 문제는 이게 일반적인 재능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익히 생각하는 천재의 영역. 마나를 잘 받아들이고, 육체적으로 뛰어나다는 등의 재능과는 별개의 문제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로 눈을 떴을 때.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육체적으로 조금도 발달하지 않았고, 노폐물이 쌓여 엉망이 되어 버린 몸은 무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수차례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경험하며 새로운 육체의 진면목을 발견했다.

거부감이 없었다.

천마신공을 사용하든.

염화신공을 사용하든.

화마의 덩어리를 받아들이든.

새로운 것을 몸에 적용할 때 특유의 반발감이, 로만 드미트리가 전생에 경험했던 것에 비해서 현저하게 떨어졌다.

오히려 금방 제 것처럼 받아들였다.

완벽하게 흡수되어 백 퍼센트 이상의 능력을 발현했고, 덕분에 로만 드미트리는 몇 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냈다.

무공에는 한계가 있다.

기반을 닦고, 마나를 모으고, 그것을 일정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시간적인 한계가.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며, 전생의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성장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전생(前生).

지금 나이의 자신은 어떤 경지에 있었을까.

황당하게도, 현생보다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죽기 이전의 백중혁은 천의 경지에 올라 하늘에 닿았지만, 성장 과정의 백중혁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아직은 아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현생의 로만 드미트리는 벌써 날개를 달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 속도를 보였다.

그렇다고 특별한 기연이 있었을까?

없었다.

영약과 같은 외부적인 도움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스스로 단련하는 것만으로 전생의 성장 속도를 앞질러 버렸다.

전생의 자신보다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히 성장 속도만 놓고 보았을 때, 현생의 발전은 천마 백중혁의 상식조차도 넘어선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진실에 도달했다.

‘현생의 육체는 일반적인 재능과는 다르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들로서는 육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은 이 몸으로 그 무엇도 하지 못하겠지만, 전생을 경험한 나에게는 오히려 최적의 육체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정답을 알았다.

빙의.

몸에 맞지 않은 영혼을 받아들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몸.

일반적이지 않았다.

모두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존재가, 사실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재능을 타고났다.

확실했다.

현생의 로만 드미트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최상급자(最上級者)를 위한 육체였다.

모든 사람은 성장하는 과정이 있을 텐데,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다룰 수 없는 육체.

그리고 그 몸에.

천마 백중혁의 영혼이 깃들었다.

* * *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세상이 각양각색으로 물들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발할라의 전사들은 목숨을 걸었고, 자신의 전력을 폭발시키며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겠다는 열망을 드러냈다.

그들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죽겠지만, 발할라의 전사로서 그들은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를 알았다.

수많은 오라.

수많은 의지.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움켜쥐며, 그들을 향해 오라를 일으켰다.

일격이었다.

천마군림보의 여덟 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전력을 발현했다.

‘천마검법 후반부 이초식.’

번뜩.

빛이 폭발했다.

소음을 집어삼킨 빛의 소용돌이가 사방을 뒤덮었고, 뒤이어 엄청난 폭발음이 귓속을 찢어발겼다.

콰앙!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이었다.

그 안에 휘말린 수천의 전사들이 단번에 소멸했고, 폭발의 영향 범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시야가 닿는 공간이 폐허가 되어 버렸다.

아직은 천(天)의 경지에 오르지 못해 마지막 초식은 완벽하게 사용할 수 없지만, 여덟 번째 공격만으로도 전생의 백중혁은 무림을 정벌했다.

다들.

넋을 잃었다.

인간의 상식에는 허용 범위라는 게 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수천의 전사들이 죽는 상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나무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무로로조차도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세간의 소문은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강한지를.

그런데 사람들을 경악시키고 충격에 빠트린 소문들이 실제로는 전력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발할라의 전사들은 전신에 일어나는 소름에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일격은 수많은 공격 중 한 번일 뿐, 다음 공격을 위해 로만 드미트리가 그들의 코앞에 나타났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공간이 휩쓸렸다.

처음 맞닥트린 존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를 비롯한 주변이 찢어 발겨지자, 발할라의 전사들이 이를 악물며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려 했다.

팟.

사라졌다.

눈을 부릅뜨자, 무려 수십 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크악!”

“악!”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경악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보법을 극성으로 발현하며 자신을 둘러싸는 상황을 휘저었고, 발할라 전사들의 포위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막아서는 족족 찢겨 나갔다.

오라를 발현해 막으려고 하면 오라 자체가 부서져 버렸고, 발할라의 전사들은 어김없이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발할라를 위하여!”

“발할라를 위하여!”

“소모전으로 가면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

사람들이 악에 받쳤다.

발할라 황제가 죽었다.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아무리 강한 적을 상대한다고 한들 물러설 수 없게 만들었다.

달려들었다.

그리고, 죽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이 무섭게 부풀어 오르며, 달려드는 족족 머리를 베고 육체를 찢어발겼다.

콰득.

머리를 짓밟았다.

얼굴에 튀는 피를 그대로 맞으며, 로만 드미트리가 수십 개의 머리를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세상이 피로 물드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천마검법을 발현하면 공간 자체가 휩쓸려 버렸고, 적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파고들며 닥치는 대로 베었다.

눈이 팽팽 돌았다.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상황이 홱홱 변했다.

깜빡.

오른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한바탕 휩쓸린 공간에서, 악에 받친 얼굴로 검을 휘두르던 전사가 검과 같이 그대로 동강이 나 버렸다.

깜빡.

이번에는 왼쪽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었고, 복잡하게 뒤얽히는 공방 속에서도 정확히 그의 공격만이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러다 많은 전사가 몰려들었을 때는. 천마검법이 발현되었다.

공간을 휩쓸어 버리는 강력한 일격은 수적 우위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었다.

깜빡.

눈을 부릅떴다.

분명히 거리가 제법 있다고 생각했는데, 코앞에 나타난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 전사의 머리를 박살 냈다.

퍽.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벌써 몇 명이나 죽었을까.

무로로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괴, 괴물 같은 녀석.”

이제야 알았다.

함정에 빠진 것은 상대가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함정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을 들였고, 지금부터 진행되는 싸움은 사냥감을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일 대 수십만의 전쟁. 수십만의 목숨을 대가로 하고도,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을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알까?

로만 드미트리의 천마검법은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다.

공간을 휩쓸어 버리는 공격으로 몰아쳤지만, 사실 천마검법의 진정한 모습은 다수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힘을 집중시키는 일격.

그것을 상대가 감당해 내지 못하면서 주변이 그 여파로 휩쓸리는 것이지, 천마검법은 원래 단 한 명의 적을 쓰러트리기 위한 검법이었다.

그 말인즉.

그 누구도 일격을 받아 내지 못했다.

정상적인 공방조차 주고받을 수 없을 정도로, 로만 드미트리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찍어 눌렀다.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마나는 무한하지 않고.

끝은 있을 것이다.

무로로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이 그 끝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게 너의 전력인가.”

바로 눈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 * *

반격할 새도 없었다.

상대를 발견하고 반격을 시도한다는 생각 자체는 머릿속에 입력되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오른팔에서 피가 튀었다.

“크악!”

팍.

나무에서 추락했다.

바닥에 처박히며, 무로로가 비명을 질러 댔다.

이를 악물었다.

무로로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아직 남아 있는 왼팔로 주변을 경계했다.

“와라! 내가 상대해 주마!”

악에 받쳤다.

피로 물든 입으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발할라의 진실.

모르지 않았다.

발할라 황제가 크로노스의 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로만 드미트리가 언급했을 때, 무로로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발할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에는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로만 드미트리는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발할라의 전사들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진실을 들었는데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발할라는.

전사의 나라다.

죽음보다 명예를 아는 나라.

이 나라가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추악한 진실이 진실이라고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위대한 전사 카를로스.

사람들은 그의 최후를 알지 못했다.

추악한 진실의 존재를 말했던 그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자택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발할라의 근본이었다.

누구는 멍청하다고 비난하고.

누구는 부질없다고 말할지라도.

그들은 이 자리에서 죽는 것보다, 추악한 진실이 진실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바로 발할라의 무로…….”

퍽.

머리가 날아갔다.

보지도.

반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죽어 나갈 수많은 죽음 중 하나일 뿐이었다.

* * *

베고.

베고, 또 베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피로 물든 악귀처럼, 적들을 학살하며 피로 물든 이빨을 드러냈다.

“내게 말해. 이게 너희의 전력이 아니라고. 내 전력을 끌어올릴 만큼, 이보다 더 강하다고 말해.”

아귀(餓鬼)의 식탐처럼.

갈증이 일었다.

전생은 끝에 도달하기도 전에 정점의 자리에 올랐다.

현생은 다르길 바랐다.

그 누구도 자신의 검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적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을 파고들며 학살을 벌였다.

상황이 뒤바뀌었다.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를 함정에 빠트렸다고 생각했건만, 이건 마치 로만 드미트리가 사냥하는 것만 같았다.

목이 탔다.

발할라를 몰아붙였다.

이들의 끝에.

알렉산드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르는 분명히, 자신의 전력을 끌어올릴 무언가를 갖추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무력은 단단한 의지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 이건 아니야!”

“후퇴하라! 일단 본대와 합류하고, 다시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할 것이다!”

무로로는 구심점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의미 없는 죽음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할라의 전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발할라의 명예가 압도적인 무력에 짓밟혔다.

남부 밀림의 땅은 넓고,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이기에 분명히 다시 한번 그를 처리할 기회가 있다고 그들은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했다.

발할라의 전사들이 물러났다.

그들이 도망쳤다.

명예로운 땅에 몰려들었던 그들이,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사방으로 도망쳤다.

무로로가 간과한 사실이었다.

그는 진실을 알고도 목숨을 바쳤지만, 썩어들어 가는 세월 동안 모두가 그와 같지는 않았다.

끝났다.

한바탕 휘몰아친 전투에, 로만 드미트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허망한 눈빛을 보였다.

“날 이곳에 불러들인 이유가 단순히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함은 아니길 바랍니다.”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르든, 그 배후의 누구든.

이것이 끝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아직 전생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 경지에 도달하고도 그 이상을 노릴 수 있도록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빌었다.

알렉산드르가 오랜 세월 많은 준비를 했기를. 그가 갖춘 미지(未知)의 힘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기를.

그때였다.

“……아아.”

멀리서 새어 나온 신음성.

그곳을 확인하니.

정신을 차린 산체스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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