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7화 (377/615)

377화 악역(惡役) (4)

산체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왁자지껄 떠들며 로만 드미트리의 명예로운 도전을 지켜보겠다던 발할라의 전사들이, 단 한 명의 괴물을 감당하지 못해 모조리 죽어 버렸다.

도망친 이들 외에 생존자는 없었다.

검의 폭풍에 휩쓸린 이들은 감당하지 못할 힘에 찢겨 나갔고,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은 성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산체스로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발할라 황제가 죽은 순간.

그는 이성을 잃었다.

그때부터 자신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과 같은 참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드문드문, 조각난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의 명령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산체스는 그 자리에서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냈다.

“우웩.”

역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발할라의 전사들이 학살을 당했고, 로만 드미트리를 감당하지 못한 이들이 산체스를 버리고 후퇴를 결정했다.

산체스는 수차례 속을 게워 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붉게 달아오른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제게 진실을 말해 주십시오. 정말 발할라 황제가, 비에토 공작이 크로노스의 개였습니까?”

“그래.”

“하아.”

눈을 질끈 감았다.

참담했다.

모랄레스의 죽음 이후로, 자신의 전부를 바쳤던 사람이 실제로는 크로노스를 따르는 개였다니.

진실은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폭로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산체스를 비롯한 발할라의 전사들은 분명히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대화를 허락할 수 없었던 이유는 눈앞에서 발할라 황제를 죽인 충격적인 장면과 발할라 제국이 크로노스 제국의 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결국.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의 명령이 심지에 불을 붙였고, 발할라의 전사들은 감정에 휩쓸려 공격하는 선택을 내렸다.

“……당신이라도 발할라의 분노를 이해해 줄 수는 없었던 겁니까. 일단 발할라 황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시키고, 우리에게 이 현실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받아들일 시간을 부여했다면 발할라와 드미트리의 관계는 틀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습니까. 대체 왜, 대체 왜!!”

발악했다.

책임을 떠넘겼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상황에, 산체스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직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군. 발할라와 드미트리의 관계는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슈테른 발할라, 비에토 공작. 발할라 권력의 핵심인 두 인물 모두가 크로노스 제국을 따르는 개라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부터, 평화로운 타협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너는 비에토 공작이 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진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나.”

“그, 그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크로노스 제국에 의해 발할라 제국과 드미트리는 파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비에토 공작은 처음부터 미끼에 불과했다. 발할라 제국을 통치하든, 아니면 내가 그를 죽여 발할라의 원수가 되든. 어떤 방향으로든 상황을 악화시켰겠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비에토 공작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 것만 보아도, 애초에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판에 발을 들였다는 의미니까.”

알렉산드르.

영악한 존재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진실에 도달하자, 과감하게 미끼를 버리고 발할라 제국에 분노의 불씨를 던졌다.

산체스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제발 발할라를 구원해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이대로라면.

발할라는 끝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발할라의 명맥은 완전히 끊겨 제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말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산체스는 전사였다.

그리고, 어리석었다.

비에토 공작이 버려졌다는 것은 크로노스를 따르는 개들이 발할라의 수뇌부 자리를 이미 차지했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지금부터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진실과는 상관없이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비난하며 사람들을 선동할 것이다.

발할라 제국은 드미트리와의 전쟁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고로.

더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곧 죽을 녀석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든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이미 늦었다.”

번뜩.

머리를 날렸다.

사방으로 흩뿌리는 피에, 산체스의 몸뚱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 * *

예상대로였다.

발할라의 수뇌부.

새롭게 권력을 차지한 이들이, 남부 밀림의 사건을 보고받자 강력한 분노를 표출했다.

쾅!

“이건 발할라를 향한 선전포고입니다!”

“맞습니다. 감히 발할라의 땅에서 발할라 황제 폐하를 죽였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동안 발할라를 위해 고생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병력을 준비해야 합니다. 드미트리와의 전쟁을 통해, 로만 드미트리를 벌해야만 합니다!”

분노가 들끓었다.

당장에라도 전면전을 선포할 분위기에, 새로운 얼굴인 아이른 남작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습니까.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 황제 폐하와 크로노스의 결탁 여부를 의심…….”

탁!

“그게 대체 무슨 망언입니까!”

“사실 여부를 확인하다니요.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명백한 사실은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 황제 폐하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했다는 것이고, 무엇이 진실이든 그를 처벌할 이유로는 충분합니다. 아이른 남작. 머리가 있다면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십시오. 발할라가 개편하면서 운 좋게 이 자리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면 기회를 살릴 생각을 하셔야지,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맞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아이른 남작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엄청난 반대 의견에 주장이 완전히 짓밟혔고, 발할라 수뇌부를 이끄는 인물이 다시 한번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의 이름은.

스노딘 백작이었다.

비에토 공작이 위기에 처했을 때, 마지막에 병력을 지원하면서 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지금부터 우리의 작전은 간단합니다. 일단 대외적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악행을 알릴 것입니다. 그가 명백하게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왕국 연합으로서도 드미트리를 도울 명분이 애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의 수하들은 워프 포인트를 통해 발할라 영토 밖으로 나가도록 길을 열어 줄 생각입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아닙니다. 남부의 모든 워프 게이트를 폐쇄하고, 그가 고립되도록 길목을 차단할 것입니다. 남부의 밀림 지대는 넓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혹은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요.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를 고립시킬 겁니다. 그리고 그사이에…….”

탁.

지도 위의 말을 옮겼다.

발할라 군대.

그것을 표시한 말이 헥토르를 짓밟았다.

“발할라의 군대는 북진(北進)해서 드미트리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입니다.”

* * *

그날 오후.

대륙이 발칵 뒤집혔다.

발할라 제국이 로만 드미트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왕국 연합은 곧바로 화상 회의를 진행했다.

프랑크 국왕.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번 문제는 조금 애매합니다. 당연히 왕국 연합의 수장인 로만 드미트리 님을 도와주는 것이 옳은 일이나, 만약 발할라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무려 발할라의 황제를 죽인 사건입니다. 이건 도덕적으로 도와줄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타당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내뱉자마자, 세 화면에서 반발이 일었다.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발할라 황제를 죽였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병력을 보내야 합니다. 발할라 제국이 공개적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을 비난한 이유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군대를 움직일 것이고, 남부의 밀림 지대 안에서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 님을 처리하려고 하겠지요. 이대로 그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리고 발할라와의 전면전도 대비해야 합니다.]

세 인물.

각각 레드포드 국왕, 에드윈 헥토르, 카이로 국왕이었다.

대세가 기울었다.

다수결에 따르면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지만, 우려를 표하는 인물은 프랑크 국왕만이 아니었다.

[무조건적으로 드미트리를 지지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 그들은 명분을 멸시했기에 적폐(積弊)가 되었고, 부당한 이유로 타국을 핍박하는 더러운 일들을 일삼았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길을 밟아 나갈 수는 없습니다.]

움베르토 국왕이었다.

그 또한.

드미트리를 위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었다.

다만 움베르토는 그동안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냈고, 제국의 억압을 받으면서 권력자들에 대한 경계심이 생겨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륙의 양대산맥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런 명분 없이 살육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지금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했다.

찬성파와 반대파.

둘의 차이는 믿음의 여부였다.

찬성파는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를 경험하며,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결국.

“파비우스 백작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화면 너머.

심드렁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는 그에게 발언권이 넘겨졌다.

* * *

파비우스 백작이 말했다.

[만약 단순히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발할라 황제를 죽였거나, 지금 발할라 제국이 주장하는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고 한들. 뭐, 어쩌라는 겁니까?]

자세가 삐딱했다.

그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툭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지금 왕국 연합은 누구에 의해 지탱되는 겁니까? 우리가 국력이 강해서 제국이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그분이 존재하기에, 우리가 이렇게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자기주장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로만 드미트리 님이 죽는 순간 우리도 끽,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자리.

각국 권력자들이 모였다.

하지만 파비우스 백작은, 오로지 본인이 모시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들이받는 황소와도 같았다.

[명분을 따지려거든 옛날의 왕국 연합으로 돌아가십시오. 제국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제국의 핍박이 자연스러웠던 그때로 말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셨다면. 일단 실리를 취하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님을 도와주는 것이 우선이고, 그 이후에 사실 여부를 따질 문제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신랄한 비난이었다.

움베르토, 프랑크.

두 국왕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상식에 의한 생각을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여유가 생겼기에 나온 발언이었다.

벼랑 끝에 있을 때.

그들은 간절했다.

만약 그때였다면 어떤 명분이든, 일단 살려 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확실히 저희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이해했습니다. 일단 이번 문제를 해결하고, 이후에 사건의 진위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의견이 모였다.

발할라 제국.

그들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최악은 전면전(全面戰)까지 생각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움베르토 국왕 폐하! 큰일 났습니다!]

각국의 화면.

난리가 났다.

움베르토 국왕의 소식이 가장 빨랐을 뿐, 동시다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

[크로노스 제국이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발할라 황제의 죽음.

계획이 변경되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이려던 크로노스 제국이, 그간의 침묵을 깨부수고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전면전!

제2차 대륙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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