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제2차 대륙 전쟁 (4)
베르데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행방을 찾을 수 없는 마탑주.
바닥에 널브러진 마법사들.
그리고 위협적인 기세를 풍기는 에드윈 헥토르의 존재는,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경고했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죽는다.’
확신이었다.
본능이 말해 주는 경고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상황을 파악하고 입막음을 시킬 생각이었지만, 베르데는 애써 표정을 감추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보고에 한달음에 달려왔을 뿐, 무언가를 해명해야 할 만큼 아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이 해명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마탑주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며, 무슨 이유로 천공의 마법사들을 공격하신 겁니까? 해명을 제대로 하지 않으신다면, 저로서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의 말처럼.
해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법사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싸자, 에드윈 헥토르가 무심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참 이상하지. 평소에는 둘만의 대화를 숨기지 않던 스승님이 왜 오늘은 사일런스 마법으로 대화가 새어 나가는 것을 차단했을까. 천공의 마법사들은 어째서 버틀러가 집무실을 확인하려는 것을 저지했으며, 소식을 듣고 달려온 너는 어째서 시체들을 발견하고도 분노하기보다는 마치 변명하듯 상황을 정리하려는 것일까.”
“괜한 억측으로 저를 매도하지 마십시오.”
“억측이라기에는 매우 공교로운 상황이지. 그래서 나는 이런 가설을 생각했다. 너는 천공의 마탑주와 한패다. 마탑주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부탑주라는 존재가, 크로노스의 지배를 받는 천공의 진실을 알지 못할 리가 없겠지. 그런데 네가 일부 마법사들만을 데리고 허둥지둥 달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단순히 의외의 변수 때문만이 아니다. 만약 이 일이 새어 나갈 경우,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는 의미겠지.”
짧은 시간.
에드윈 헥토르는 상황을 파악했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천공의 마탑은 대륙 제일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마법사들이 세력을 형성한 집단이다. 그들 모두를 정신 지배로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고, 그래서 너와 같은 몇몇 인물들이 진실을 숨긴 채 마탑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겠지. 베르데. 나는 네가 그런 이유로 헐레벌떡 뛰어왔다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내 말이 지금도 허무맹랑하고 괜한 억측인 것 같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가설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아닌, 허무맹랑한 이야기.
하지만 정곡을 지적당한 베르데는, 순간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찰나의 반응.
“진실을 들켰다는 표정이군.”
에드윈 헥토르가 웃었다.
가설은 진실이었다.
천공의 마탑은 세력을 성장시키기 위해 진실을 숨겼고, 베르데를 따라 달려온 소수의 마법사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급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에드윈 헥토르가 천공의 비밀을 밝혀 버린다면, 그동안 애써 쌓아 왔던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순간.
정적을 뚫고, 베르데가 마력을 일으켰다.
“당장 공격……!”
번뜩.
빠지지지지직.
눈이 멀었다.
잠깐 시력이 사라졌던 베르데는, 마법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넋을 잃은 표정을 보였다.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손가락을 치켜든 에드윈 헥토르.
그가 가리킨 공간에, 베르데의 명령을 이행하려던 마법사들이 새까맣게 타 버린 채 쓰러져 있었다.
* * *
체인 라이트닝.
3서클 마법이다.
천공의 마법사들이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이건만, 그 누구도 마법이 발현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3서클 마법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체인 라이트닝에 감전된 마법사들은 이렇다 할 반항도 해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
말을 잃었다.
베르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아는 바로는 에드윈 헥토르는 5서클 마법사였는데, 지금 보여 준 위력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체인 라이트닝을 이 정도 위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소 6서클,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혼란이 일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순간.
불길한 상상이 일었다.
천공의 마탑주가 사라진 이유가 어쩌면 에드윈 헥토르 때문일지도 몰랐다.
“버틀러, 베르데를 포박하라.”
“예.”
반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에드윈 헥토르의 압도적인 마력에, 베르데는 넋을 잃은 채로 포박을 당하고 말았다.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양팔이 묶이는 와중에도, 그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정신의 세계.
그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에드윈 헥토르는, 어둠을 폭발시키며 천공의 마탑주의 마력을 그대로 흡수해 버렸다.
마력의 양은 방대했다.
그것은 다섯 개의 서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버틀러가 목격했던 장면처럼 몸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다.
그때.
상단전이 힘을 발휘했다.
상단전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열리며 마나를 받아들였고, 상단전과 서클의 순환이 이루어지면서 마나를 전부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기연이었다.
다섯 개의 서클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반적인 기준을 완전히 넘어설 정도로 커지고 단단해졌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새로운 서클이 생겨났다.
심장 주변에.
일곱 개의 고리가 생겨났다.
사람들이 말하길, 에드윈 헥토르에게 부족한 것은 재능이 아닌 세월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천공의 마탑주의 마력을 빨아들이면서 부족한 부분을 메워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으며, 에드윈 헥토르는 베르데가 달려오는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타타타탁.
“이게 무슨!”
“에드윈 헥토르! 부탑주님을 풀어 주어라!”
소란을 듣고 마법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실은 모르는 마법사들의 눈에는, 에드윈 헥토르가 부탑주를 포박하고 천공의 마법사들을 학살한 것처럼 보였다.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알기에, 에드윈 헥토르는 다른 마법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베르데를 인질로 확보해 두었다.
몰려든 마법사들.
그들이 적대적인 기세를 보이는 상황에, 에드윈 헥토르는 여유를 잃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진실을 보여 주마. 이미지 메모리(image memory).”
머릿속.
직접 경험한 기억을 실체화시켰다.
“너로서는 의문스럽겠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그동안 스승으로 모셨던 내가,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천공의 마탑주.
그의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당혹으로 얼룩졌다.
에드윈 헥토르에게 말하는 발언은 추악한 진실을 드러냈고, 방금까지 적의를 드러내던 마법사들은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때부터는 굳이 해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지 메모리가 말해 주는 기억이, 천공의 진실이. 베르데를 포박한 명백한 이유를 완벽하게 증명했다.
이윽고.
기억이 회수되었다.
갈피를 잃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이것이 내가 천공의 마법사들을 공격한 이유이고, 이것이 너희가 알지 못했던 천공의 진실이다. 천공의 마탑주는 크로노스의 개였다. 겉으로는 마법사들을 위하는 척, 마법사 실종 사건의 배후인 크로노스 제국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호시탐탐 재능 있는 마법사들의 서클을 먹어 치우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이 분노했다.
“천공은 길을 잃었다. 하지만 너희가 진실을 직시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위기는 곧 기회였다.
에드윈 헥토르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발할라 침공 이틀 전.
헥토르 왕국에서,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 * *
다음 날.
헥토르 왕국이 한고비를 넘긴 것과는 다르게, 움베르토 국경에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펼쳐졌다.
콰앙!
쿠르르르르르르릉.
성벽이 무너졌다.
오늘을 대비해 마법 방어를 겹겹이 설치했지만, 크로노스 제국의 폭발적인 마법 공격을 버틸 방법은 없었다.
공격을 시작하고 겨우 몇 시간 만에 성벽이 붕괴되었다.
수십만 대군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성안으로 밀려들었고, 그때부터 움베르토의 병사들은 수도 없이 죽어 가는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적들을 막…… 크악!”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어딜 보더라도 희망적인 광경은 보이지 않았다.
한번 뚫리자, 전체로 번져 나가는 죽음의 불길을 막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끝까지 버텨라! 이곳이 뚫리면, 움베르토 왕국에 희망은 없다.”
푹.
콰직!
칼데론 드레이크.
그가 오라를 일으키며 적들을 베었다.
이미 피로 흠뻑 물든 상태였고, 그는 수도 없이 밀려드는 적들을 마주하면서도 물러나는 기색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죽을 작정이었다.
움베르토 제일의 방벽(防壁)이 이리도 허무하게 뚫린다면, 최전방 방어 진지를 시작으로 움베르토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오라를 일으켰다.
안에서 날뛰는 크로노스의 기사를 베어 내며, 그가 수하를 다그치듯 물었다.
“지원군은?”
“상황을 반전시킬 만큼의 지원군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무법 지대에서 일어난 폭동이 심각해지면서 그곳에 보낸 토벌군의 발목이 묶여 버렸고, 발할라가 프랑크 국경 인근에 병력을 보내면서 프랑크와 레드포드도 발할라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병력을 차출해 보낸다고는 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크로노스의 대군을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길!”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막막했다.
새로운 왕국 연합이 창설되고.
칼데론 드레이크는 미래를 보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이 체계에서는 적어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오랜 세월 대륙을 지배한 제국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웬만해서는 움베르토만의 힘으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보고 싶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영토를 벗어날 시간.
적어도 제국이 야망을 드러낸 이때, 드미트리가 아니더라도 왕국 연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진실은 뻔했다.
처음부터 그들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왕국 연합은 이토록 빌빌 기지 않았을 것이다.
푸확.
적군을 베었다.
그리고는.
“지금 당장 드미트리에 연락하라. 지원군을 보내 주지 않는다면, 움베르토는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실낱같은 기대감과는 다르게.
몇 분 뒤.
칼데론 드레이크는 드미트리마저 크로노스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절망적인 보고를 전해 들었다.
* * *
익숙한 그림이었다.
드미트리 성벽 너머.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미스틱을 필두로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로노스, 정말 무서운 나라구나.”
성벽 위.
조나단 기사단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륙이 발칵 뒤집혔다.
크로노스 제국은 움베르토와 카이로를 동시에 공격, 무려 백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드미트리에 따로 병력을 보냈다.
게다가 이번에도 워프 게이트 없이 수많은 병력을 이동시키는 경악스러운 광경에, 자신들이 전쟁을 벌이는 상대가 누구인지 새삼 다시 한번 체감되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도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날의 일.
상처로 남았다.
드미트리가 공격당한 날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헨더슨과 같은 인물들은 드미트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때부터 드미트리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만약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와는 다른 결과가 만들어지도록. 로만 드미트리가 없더라도 드미트리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나단 기사단장을 필두로 모두가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 왔다.
부관에게 말했다.
“수성 준비는?”
“모두 끝냈습니다.”
“병사들에게 전하라. 우리는 단순히 버티기 위해 수성하는 것이 아니다. 감히 드미트리를 공격한 적들을 박살 내고, 지난 일의 복수를 행할 것이다. 드미트리는 이제 함부로 넘볼 수 있는 땅이 아님을 세상에 증명할 것이다.”
“그 말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결의에 찬 눈빛을 보였다.
이만.
걸음을 옮겼다.
조나단 기사단장이 각자에게 지정된 위치를 명했는데, 그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한 명 있었다.
“아레스 님.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아레스.
새롭게 드미트리의 이인자로 떠오르는 인물.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없어도, 아레스가 있기에 강적이 출연하더라도 막아 낼 수 있다고 말이다.
“아레스 님이 지정된 위치는 그곳이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오른쪽 성벽 위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왜 성문 근처에 있는 그곳에 계신 겁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며칠 전.
하오문의 루카스가 경고했다.
혹시 모를 만일의 변수를.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을 따라 발할라로 떠나지 않은 이유가, 정말 단순히 피곤하기 때문이 맞습니까?”
발할라행.
아레스는 제외되었다.
타의(他意)가 아니다.
스스로가, 발할라에서의 임무가 고됐기에 드미트리에 남겠다고 말했다.
조나단 기사단장의 발언.
순간.
“……말의 뉘앙스가 상당히 위험하게 들리는데, 제 착각인 겁니까?”
아레스가 차가운 표정으로 조나단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