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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화 (384/615)

384화 제2차 대륙 전쟁 (7)

하루 전.

샐러맨더 대륙이 혼란에 휩싸인 그때, 발할라 수뇌부들은 당황스러운 소식을 전달받았다.

[마론 자작이 죽었습니다! 일단 포위망을 형성해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 내고 있습니다만, 벌써 수천의 병사들이 사망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남부 밀림 지대의 포위망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은 인원을 동원한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할 고수의 부재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황당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마론 자작에게 전권을 일임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 내라고 명령했다.

발할라의 새로운 실세인 스노딘 백작은 마론 자작을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의 인물로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수십만을 동원한 작전이기에 며칠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마론 자작의 사망 소식과 함께 절망적인 현실을 토해 내는 부관의 말에, 스노딘 백작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이런 쓸모없는 녀석들! 우리의 목적은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병사들을 전부 갈아 넣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막아라. 시간이 지날수록, 발할라에서 그를 오래 붙잡을수록. 로만 드미트리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 그조차도 대세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발할라 최강의 검사조차 아레스에게 무릎을 꿇은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겠다고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은 판단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소모전이 최선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체력을 갉아먹는다면, 결국 드미트리의 괴물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상식 안의 판단.

아니, 이조차도 상식 밖이었다.

애초에 한 명의 발목을 붙잡겠다고, 수십만의 병력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달아 도착하는 소식들이 공포를 유발했다.

[2차 저지선이 뚫렸습니다!]

[로,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따라잡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 대열을 형성한다고 한들 단번에 도륙해 버리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저희가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보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동하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크악!]

통신기 너머.

비명이 들렸다.

피로 물든 목소리가, 3차 저지선마저 뚫렸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괴물 같은 녀석.’

로만 드미트리.

그는 혼자였다.

드미트리의 사병들은 일부러 길을 열어 주었고, 그 혼자서 발할라의 넓은 영토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동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아무런 방해가 없어도 빠르다고 할 만한 속도였는데, 현실은 수십만의 병사가 그의 걸음을 늦추겠다고 목숨을 걸고 발악하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하루가 지났다.

스노딘 백작의 입이 바짝 말라 가는 그때, 또 다른 소식이 들렸다.

[……저, 저희가 착각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행적을 숨기지 않고, 포위망을 맞닥트릴 때마다 학살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가 너무 빨라서 도망친다고 느낄 뿐, 그는 단 한 번도 발할라를 상대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스노딘 백작님. 지금 이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를 한 달간 묶어 두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 무렵.

로만 드미트리는 엘타르를 지나쳤다.

확실해졌다.

추격을 달고도 이렇게 빨리 엘타르를 통과할 속도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프랑크 국경으로 들어설 것이다.

일주일은 너무나도 짧았다.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전력을 다해 전쟁을 선포했다고 할지라도, 일주일 만에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로.

발할라로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남부 삼국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시켰던 병력을 모두 로만 드미트리에게 보내라. 남부 삼국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개입을 막아 내는 것이 이번 전쟁의 포인트다. 그가 최대한 개입할 수 없는 판을 만들어야만, 우리가 드미트리를 무너트리고 로만 드미트리를 고립시킬 수 있다.”

입이 바짝 말랐다.

겨우 일주일.

이번 전쟁은, 로만 드미트리가 프랑크 국경에 들어서는 전후를 기점으로 판가름이 날 것이다.

* * *

그 시각, 드미트리.

맹렬하게 달려드는 크로노스 제국군의 모습에, 좌측 성벽을 맡은 플로라 로렌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2조, 마법 준비.”

“1조, 마법 발사!”

화륵.

화르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피닉스의 마법사들이, 플로라 로렌스의 명령에 마법을 발현했다.

“인페르노(inferno).”

“인페르노.”

콰앙!

화르르르르르르륵.

성벽 너머.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불길에 휩싸인 제국군은 살갗이 녹아내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열기의 여파에 목을 부여잡는 존재들도 있었다.

뜨거운 열기에 기도가 타 버린 것이다.

일격에 수백의 병사들을 단번에 쓸어 버렸지만, 그만한 피해로는 기뻐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들의 자리는 순식간에 다른 이들로 대체되었다.

시체 위를 제국군이 짓밟았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얼굴로 성벽에 다가가더니, 차례로 사다리를 걸며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름을 뿌려라!”

“3조, 마법 준비. 궁수들은 원거리에 있는 적이 아닌, 사다리를 타고 오는 적들을 조준 사격하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조금 전.

성문이 열렸다.

플로라 로렌스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아레스는 변수였다.

예상하고도 대응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였고, 어쩌면 그가 만들어 낸 변수로 인해 드미트리가 이대로 함락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를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됐다. 병법(兵法)은 항상 기발한 작전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병사들을 통제하는 지휘관이 변수에 휘말리지 않고 평정심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기본을 지키는 것.

병법의 핵심이었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성문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기에, 플로라 로렌스는 애써 자신의 상황에 집중했다.

“1조 마법 준비, 2조 마법 발사!”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마법이 작렬했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걸 느끼며, 플로라 로렌스는 좌측 성벽에 필요한 적절한 판단을 빠르게 내렸다.

변수는 이미 발생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단한 전략으로 상황을 뒤엎는 것이 아닌 좌측 성벽에서 또 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플로라 로렌스와 같은 수뇌부의 역할이었다.

참모(參謀)이자 병사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은 그녀는, 명령을 내리는 와중에 본인도 직접 화살을 발사하며 적들이 성벽 위로 올라서는 것을 막았다.

지난 세월.

온실 속의 화초는 야생화가 되었다.

바르코, 카이로의 내란, 크로노스와의 전쟁 등등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퍽.

화살이 적군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런 광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플로라 로렌스는 담담하게 다른 적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전투는 치열했다.

본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자꾸만, 로드웰 드미트리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힐끗.

‘……제발, 끝까지 버텨 줘요.’

성문의 통로.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피와 불길로 얼룩진 상황에, 플로라 로렌스는 이를 악물었다.

“집중하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일단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드미트리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

미스틱이 전장을 바라보았다.

“참 성가신 녀석들이야. 그동안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티는 녀석들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새겼다.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알렉산드르를 향해 반기를 내민 존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크로노스 제국은 단 한 번도 위기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단숨에 성장한 드미트리는, 겨우 약소국 출신인 주제에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을 막아 낸 전적이 있었다.

그날.

스벤이 죽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데도 6성의 검사가 당했다는 사실에, 미스틱은 상당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유희도 이제는 끝이다.”

이번 전쟁.

알렉산드르가 결단을 내렸다.

대륙을 정벌하고 원대한 꿈을 이루겠다는 말에, 미스틱은 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꼈다.

한때는 그 또한 대륙을 호령하던 대마법사였기에.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사실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알렉산드르가 계획하는 미래를 확인하고는 그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있었다.

미스틱은.

거대한 운명에 무릎을 꿇었다.

화악-

마나를 일으켰다.

미스틱 뒤로.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지난 전쟁에서 미스틱은 공간 이동 마법으로 드미트리를 공격했고, 드미트리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드미트리 내부로 침투할 수 없도록 마법 방어를 형성했다.

미스틱으로서도 마법 방어를 뚫고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세(現世)에 허락되지 않는 힘을 사용한다면, 당분간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전제로 단 한 번은 소수를 이동시킬 수 있다.

그것은.

아레스에 이은 예상 밖의 변수였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 이전 전쟁을 통해 보완점을 찾은 것은 드미트리만이 아니었다.

“드미트리. 너희들이 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가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콰드드드득.

마력이 폭발했다.

휘몰아치는 마력이 공간을 찢어발겼고, 안으로 드러난 보랏빛 세계에 그림자들이 차례로 빨려 들어갔다.

이번 전쟁.

자신이 운명에 순응했듯.

드미트리의 멸망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 * *

쫘악.

공간이 열렸다.

드미트리의 하늘이 일그러지며, 수백의 그림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드미트리 도시를 향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보이는 족족 전부 죽여라.”

“큭큭큭큭.”

그들의 목적.

학살, 그 자체에 있었다.

마법 방어를 뚫고 침투시킬 수 있는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고, 그들만으로는 드미트리를 몰살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내성을 지키는 페르난도.

외성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병력의 존재가, 그림자들을 충분히 막아 낼 만큼의 전력이라는 것은 이전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그렇기에.

외성과 내성의 경계에 떨어졌다.

페르난도는 병력을 이끌고 나설 수 없으니, 그 사이에서 최대한 큰 혼란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악!”

“으아아아악!”

학살이 벌어졌다.

내성은 민간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기에, 일부는 외성과 내성의 경계에서 몸을 숨기거나 혹은 물자를 나르는 등의 일을 도왔다.

그들이 바로 그림자들의 목표였다. 민간인들을 아무리 죽인다고 한들 대세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미스틱도 모르지 않았지만, 인간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악인(惡人)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상황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은 곧바로 조나단 기사단장에게 보고되었다.

“조나단 기사단장님! 그림자들이 지금 도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콰득.

조나단 기사단장이 적군을 베었다.

그는 수성의 지휘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장에 나서 성벽에 올라서는 적들을 베었다.

“빌어먹을. 크로노스가 마법 방어를 결국 뚫었구나.”

크로노스의 전략.

일반적이지 않았다.

보통 공간 이동 마법이라는 것은 워프 게이트와 같은 매개체가 필요한데, 크로노스 제국은 이전 전쟁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매개체 없이 그들은 수십만의 병력을 드미트리에 보냈다.

이전에 한번 경험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아직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지난 전쟁.

드미트리 수뇌부들이 진행한 회의에서, 플로라 로렌스는 하나의 변수를 거론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정말 만약에, 크로노스 제국이 ‘마법 방어’를 뚫고 내부에 병력을 침투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합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을 때의 행동 매뉴얼을 지금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잔인한 현실이었다.

그날.

수뇌부들은 결정을 내렸다.

조나단 기사단장이 뒤로 물러나며, 소식을 전달한 병사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로서는 전력의 누수를 허락할 수 없다. 도시의 상황을 해결하겠다고 일부 병력을 빼돌렸다가는, 성문이 뚫린 지금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곳은 맥버니의 별동대(別動隊)에게 맡겨라.”

“……그들만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병사가 말끝을 흐렸다.

맥버니의 별동대.

그들은 특수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이번 문제는 별동대만으로 해결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맥버니와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신체 부위를 하나 잃었거나, 정신적인 문제 등으로 병사로서의 삶을 포기했던 이들이, 맥버니를 따라서 새로운 삶을 택했다.

비상시에 도시를 지키는 별동대.

그들도 일반 병사들과 같은 수준의 훈련을 받았다고는 들었으나, 상대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닌 크로노스 제국의 그림자였다.

걱정이 앞섰다.

그러한 반응에.

조나단 기사단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이 몰살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들의 죽음은 충분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목적에 집중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각자의 위치에서 끝까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다.”

시선을 돌렸다.

조금의 고민도 없었다.

변방의 기사단장.

한때는 겨우 그 정도의 자리에 만족하냐는 말을 들었던 조나단 기사단장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풍파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드미트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전과는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는 지난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때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맥버니의 별동대가 그들만의 사투(死鬪)를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조나단 기사단장은 이를 악물며, 혼란으로 뒤얽힌 전장이 요동칠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조리 죽여라! 감히 드미트리를 넘본 자들에게, 그 대가를 보여 주어라!”

콰르르르르릉.

폭발하는 오라.

조나단 기사단장이 4성의 오라를 발현했다.

그 또한.

검사로서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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