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제2차 대륙 전쟁 (12)
그 시각.
미스틱은 척후병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드미트리 군이 추격대를 보냈습니다. 성벽의 보수가 끝나기도 전에 움직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다음 공격을 대비하기보다는 먼저 저희를 격퇴할 의도인 것 같습니다. 미스틱 님. 이대로 적들과 맞닥트린다면 전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빌어먹을.”
미스틱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예상 밖이었다.
아레스는 드미트리가 분명히 추격대를 보낼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미스틱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드미트리는 수성(守城)의 이점을 살려 승리했다.
사방이 보호받지 못하는 공간에서는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테고, 드미트리 따위가 감히 로만 드미트리 없이 성문을 열고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애써 부정했는지도 모른다.
연달아 드미트리에 패배한 일은, 미스틱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지금 남아 있는 힘으로는 공간 이동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무리하게 힘을 끌어올렸다간, 차원의 틈에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겠지. 나 혼자라도 몸을 피신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지만, 이번에도 그따위 결과를 보고하는 순간 알렉산드르 님이 날 죽일 것이다.’
최근.
알렉산드르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생겨나는 변수에 상당히 화가 났다는 것을 미스틱은 모르지 않았다.
전과가 필요했다.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
힘을 회복하고 반격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따르는 패잔병들이라도 일단 살려야 했다.
“지도.”
“예?”
“지도를 달라고!”
“아, 알겠습니다.”
촤르르르르륵.
간이 테이블에 지도를 펼쳤다.
동북쪽 일대.
도망칠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변방이라는 것은 그만큼 이동할 길목이 많지 않다는 의미였고, 드미트리 방향에서는 추격대가 다가오고 있을 테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최대한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
일단 시간을 벌다가 충분한 마나를 회복하면, 그때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추가 병력을 불러들여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
‘그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크로노스 제국은 수성의 이점에 패배했을 뿐, 처음부터 뻥 뚫린 공간에서 맞닥트렸다면 드미트리를 분명히 압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시간의 싸움이었다.
얼마나 시간을 끌고 상대를 충분히 유인하느냐에 따라, 드미트리의 추격대를 단번에 격퇴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고로.
지도를 챙겼다.
미스틱이 소리쳤다.
“다들 짐을 챙겨라. 지금부터 남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드미트리.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성질로 변했다. 포식자인 것처럼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는 그들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같은 포식자에도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드미트리가 날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의 무력이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걸음을 옮겼다.
서둘렀다.
미스틱으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행군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이동했을까.
차차차착.
“여기는 드미트리 반대 방향인데. 설마 대국(大國)이라 불리는 크로노스 제국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건가.”
남쪽의 퇴로.
그곳을 크리스가,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대동하고 가로막고 있었다.
* * *
미스틱의 표정이 굳었다.
크리스.
그가 벌써 드미트리에 나타나다니.
예상보다 빨랐다.
그리고 남부의 퇴로를 막아선 것은, 이미 자신의 의도를 간파하고 길을 선점했다는 의미였다.
‘퇴로는…….’
없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이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하늘에 떠오른 신호탄이 추가 병력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미스틱의 힘이면 본인만은 공간 이동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평소라면 그렇게 했을 미스틱이지만, 크리스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는 하나의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크리스는 드미트리의 핵심 인물이다. 전쟁에서 패배했을지라도, 저 녀석을 죽인다면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고 인정받을 수 있겠지.’
일촉즉발의 상황.
침묵은 평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각자가 무기를 움켜쥐고 서로를 주시하는 상황은, 언제 처절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침묵을 부서트린 것은 미스틱이었다.
“공격하라!”
“공격해!”
탓.
한 발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달려드는 상황에, 미스틱은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마력을 일으켰다.
“썬더 스톰(Thunder Storm).”
빠지지직.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번개 다발이 일어났다.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강렬한 불빛은, 그대로 폭풍을 동반한 강력한 힘으로 주변을 휩쓸어 버렸다.
드미트리의 마법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들도 빠르게 방어 마법을 사용하며 미스틱의 공격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7서클 마법의 파괴력은 일반적인 기준을 넘어섰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크악!”
“으아아아악!”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휩쓸렸다.
순식간에 수십의 병사를 처리한 미스틱이, 양팔을 휘저으며 썬더 스톰의 방향을 조종했다.
목표는 하나.
크리스였다.
하지만 의도를 드러냈다간 그가 나서지 않을 수도 있기에, 미스틱은 그가 나설 수밖에 없도록 최대한 학살을 벌였다.
그사이 크로노스 제국군이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공격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세와는 다르게, 백병전에서는 오히려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제국군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카앙!
“죽어.”
푹.
제국군의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그간의 훈련으로 일반 병사를 상회하는 실력을 보였고, 동료들이 마법에 쓸려 나가는 모습에도 차분하게 공격을 맞받아쳤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상대로 밀렸던 이유는 질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수적으로 밀리기 때문이었고, 제국군의 숫자가 줄어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겨우 조금 많은 정도로는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결국.
미스틱과 크리스의 싸움이었다.
강렬하게 일어나는 번개 다발 속에서, 크리스가 달려드는 모습을 보였다.
파파파팟.
피가 튀었다.
크리스와 맞닥트리는 제국군은 눈 깜빡할 사이에 도륙되었다.
일반 병사, 오라 검사 가릴 것 없이 목이 날아갔고, 크리스의 눈빛도 미스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난 3일.
크리스는 분노를 억눌렀다.
드미트리에 도착하자마자 미친놈처럼 아레스를 찾아 나선 케빈과는 다르게, 크리스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드미트리를 위한 최선을 택했다.
그것이 바로 추격대를 이끄는 것이었다.
크로노스 제국군을 확실하게 격퇴한다면, 앞으로의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라이트닝 레인(Lightning Rain).”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미스틱이 마력을 폭발시켰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에서 불빛이 일었고, 크리스가 이동하는 공간마다 강력한 번개가 내리쳤다.
인간 하나 따위는 하찮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마법은 그야말로 자연재해(自然災害)였고, 계속해서 내리치는 번개에 크리스의 모습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죽었나?’
순간.
그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괴물이 아니다.
아레스를 상대로도 무릎을 꿇은 놈이라면, 마력의 폭풍에서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확.
콰르르르르르릉.
번개를 뚫고.
크리스가 튀어나왔다.
미스틱이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는 일단 마력을 일으켜 ‘블링크’를 사용하고자 했다.
그 순간.
번뜩.
‘일섬(一閃).’
목에 생겨나는 실선.
비틀리는 시야에, 미스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 *
그야말로 대승이었다.
제국군을 완전히 궤멸(潰滅)시켰다.
사람들은 엄청난 전과에 기뻐하면서도, 그 와중에 목격했던 크리스의 무력에 경악한 눈빛을 보였다.
크리스.
그는 홀로 수천의 병사를 도륙했다.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할 만큼 빠른 검술은 누구도 막아 내지 못했고, 특히 미스틱을 처리하는 장면은 모두를 경악에 빠트렸다.
크리스의 검술은 블링크를 베어 낼 정도로 빨랐다.
사람들로서는 크리스가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크리스가 미스틱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드미트리가 그간 진행했던 훈련과 연관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
로만 드미트리는 마법을 인정했다.
상단전의 개방이라는 마법 혁명을 일으키며, 그는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을 꾸준하게 훈련해 왔다.
마력의 폭발.
감각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마법의 허점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이루어진 훈련을 통해 드미트리의 검사들과 마법사들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했다.
마법사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검사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능숙해졌고, 검사들은 방금 크리스가 보여 준 것처럼 마력이 폭발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상대를 공략하는지를 터득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법사의 천적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검사들 또한, 마법사들이 정말 싫어하는 유형의 존재로 성장했다.
팍.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크리스는 방금 전력을 다했다.
쾌검을 사용하는 자신의 강점이 맞물려 미스틱을 생각보다 손쉽게 처리했지만, 그것이 크리스로서는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자신이 더 강했더라면. 미스틱을 산 채로 포획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링크를 허용했다간 전장의 양상이 어떻게 뒤바뀔지 알기에, 목숨을 걸고서 그의 목을 베었다.
미스틱은 연기로 흩어졌다.
제국군의 궤멸이라는 목적을 이루었기에, 크리스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빠르게 전장을 정리하라. 드미트리의 보수를 끝내는 대로, 우리는 카이로 서부 전선으로 향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볼칸.”
“예.”
볼칸이 앞으로 나섰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며 피로 흠뻑 물든 그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케빈이 지금 아레스를 찾는다고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다. 만약 정말 아레스를 맞닥트리는 날에는 케빈조차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테니, 병력을 보내 케빈을 도와라.”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었습니다.”
볼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스.
위험한 존재였다.
만약 그가 미스틱과 같이 힘을 합쳤다면, 방금의 전투가 이렇게 쉽게 마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른 아침.
크리스와 병사들은 아레스를 찾아 나서겠다는 케빈을 말리고자 했다.
그만큼 아레스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기에 내린 판단이었지만, 케빈의 눈은 맛이 간 상태였다.
드미트리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곳곳에 시체가 보였다.
아레스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케빈의 힘만으로는 절대 아레스를 감당할 수 없겠지.’
확신이었다.
볼칸이 병력을 꾸렸다.
일단 그가 케빈의 위치를 찾고, 크리스 또한 상황을 정리하고 그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케빈?!”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놀라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크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너 대체.”
정말 케빈이었다.
그리고 경악스럽게도, 그의 손아귀에 잡힌 아레스가 피떡이 된 얼굴로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 * *
그날 오후.
움베르토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최전방 방어 진지가 함락된 이후, 연전연패(連戰連敗)를 거듭하는 상황에 그들은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수뇌부 중 한 명이 말했다.
“이대로라면 가망이 없습니다. 프랑크와 레드포드에서 지원군을 보냈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크로노스의 진격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방법이 필요합니다, 방법이! 드미트리와 카이로, 헥토르가 모두 공격을 받는 지금, 움베르토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움베르토.
그들은 국경과 수도가 멀지 않았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고, 그렇기에 어떻게든 최전방 방어 진지에서 승부를 봐야만 했다.
절망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드미트리와의 연합을 후회할 정도였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크로노스는 대국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그들의 전력이 아니었고, 동시에 이렇게 공격한다면 로만 드미트리라고 할지라도 타국을 챙길 여력이 없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왕국 연합의 지원을 기다린다고 해도, 만약 그들이 패배한다면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집니다. 그리고 솔직히…… 카이로와 드미트리가 크로노스의 공격을 막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까.”
막막했다.
카이로, 드미트리, 헥토르.
삼국이 공격받았다.
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왕국 연합을 형성했건만, 어느 한 곳도 상황이 희망적인 곳이 없었다.
칼데론 드레이크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될 문제입니다. 드미트리를 따르는 것이 움베르토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오델리아 왕국이 멸망했던 꼴을 보면, 애초에 제국을 따르는 선택지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냥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답답해서!”
그들 모두.
진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왕국 연합의 숨통을 열어 주었지만, 그가 유일한 희망이기에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한참 절망적인 의견이 분분하던 회의실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소식이 도착했다.
“승전보(勝戰報)입니다! 드미트리가 오늘 아침, 크로노스 제국군을 완전히 격퇴했답니다!”
“뭐!?”
순간.
다들 화들짝 놀랐다.
드미트리는 무려 수십만의 제국군이 공격한 상태고, 7서클 마법사까지 공격에 가담했다고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없이는 불리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며칠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들이 제국군을 격퇴했다는 소식을 들을 줄은 몰랐다.
상황이 변했다.
절망적인 말만 내뱉던 수뇌부가 말했다.
“역시 드미트리! 그들은 왕국 연합의 수장을 맡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드미트리가 지원군을 보내 준다면, 일단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드미트리로서는 최우선 문제가 바로 국경이 붙어 있는 카이로와 헥토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특히 헥토르가 발할라에 무너진다면, 드미트리는 발할라와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런.”
안색이 창백해졌다.
산 넘어 산이었다.
두 제국.
양대산맥의 연합은 생각할수록 숨을 턱 막히게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들은 드미트리의 승전 소식보다도 믿을 수 없는, 정말 충격적인 보고를 추가로 전해 들었다.
“조금 전. 헥토르가 발할라와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했답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국 연합은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헥토르의 승리.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움베르토의 수뇌부들로서는, 도대체 샐러맨더 대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