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단 한 명의 존재감 (3)
당혹스러운 대답이었다.
카이로의 서부 전선도, 헥토르의 남부 전선도 아닌 크로노스 제국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겠다니.
위험했다.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작전에, 칼데론 드레이크가 우려를 표했다.
“……방금 말씀하신 작전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습니다. 일단 움베르토의 10만 병력으로 크로노스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며, 그렇게 공격한다고 한들 카이로와 헥토르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병법에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지만, 만약에라도 저희의 공격이 막히는 순간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이번 작전이 위험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자세를 바꾸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넓은 지도에 펼쳐진 상황을 한눈에 담았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번 전쟁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연달아 발생한 문제들을 순서에 맞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단 한 번이라도 어긋나는 문제가 왕국 연합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것입니다. 카이로와 헥토르. 두 전장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는 선택이 아닌, 두 전장에 영향을 미칠 방법을 택했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일단 프랑크와 레드포드 왕국이 무법 지대의 폭도들을 상대로 수성을 택한다면, 그들로서는 비교적 병력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들을 헥토르에 보낼 것입니다. 헥토르의 마법 전력과 더불어 발할라를 상대한다면, 전력이 약화된 발할라의 공격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말을 옮겼다.
프랑크와 레드포드를 상징하는 말이, 헥토르 영토에 위치하여 발할라를 맞이하는 형세가 되었다.
“문제는 카이로입니다. 발할라를 상대로 시간을 버는 사이에 서부 전선에 직접 개입하는 방향도 있지만, 그것은 적들 또한 예상하는 바입니다. 그들은 장기전으로 유도할 확률이 높습니다. 헥토르가 발할라에 무너지고, 무법 지대의 병력이 프랑크 국경을 무너트리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면. 대륙 전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왕국 연합의 숨통을 서서히 조일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크로노스 영토에 직접 타격을 입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서부를 공격한 크로노스 제국군은 자국의 상황에 조급해질 것이고, 발할라 제국 또한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불안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만약 발할라가 그대로 밀어붙인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결국, 발할라가 공격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다.”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웃음을 보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번 전쟁의 주체는 크로노스 제국입니다. 크로노스가 발할라를 움직였고, 크로노스의 영토가 불에 탄다면 그들 또한 최우선 목표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발할라가 헥토르를 무너트리려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헥토르를 넘어 드미트리를 공격하기 위함인데, 드미트리를 이끄는 제가 크로노스의 영토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면 그들로서는 가만히 방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분명히 병력을 움직이겠지요. 카이로 서부 전선의 병력이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퇴각함과 동시에, 발할라는 크로노스의 영토를 통해 움베르토 국경을 막아설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게 해야 제가 도망칠 길목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미끼를 자처했다.
위험한 작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시선을 유도할 수는 있겠지만, 그 대신 너무나도 위험했다.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적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공격은 제가 선봉에 설 것이고, 우리는 끝까지 밀고 나가 적들의 본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전장에 혼란을 주어야만 합니다. 적들이 퇴로를 막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인다면, 그때 왕국 연합은 ‘대륙 전체’가 아닌 크로노스 제국이라는 타국의 땅을 전쟁의 무대로 삼아 두 제국과의 전면전을 벌이면 그만입니다.”
그 말에.
칼데론 드레이크는 소름이 돋았다.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상황은, 왕국 연합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
크로노스를 직접 공격하는 위험성은, 로만 드미트리가 선봉에 서겠다는 말에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왠지 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만약 움베르토가 크로노스의 국경을 뚫어 내지 못한다면 완벽하게 실패할 작전이지만, 칼데론 드레이크는 로만 드미트리를 신뢰했다.
그라면.
가능할 것이다.
칼데론 드레이크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움베르토 왕국은, 로만 드미트리 님의 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크로노스 남부.
국경의 수비를 맡은 데니킨 남작은, 척후병으로부터 이상한 소식을 들었다.
“지휘관님. 뭔가 이상합니다. 움베르토의 군대가 카이로나 헥토르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남부 국경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뭐?!”
당황했다.
북진이라니!
그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번 전쟁은 크로노스가 주도하는 판일 뿐, 적들이 역으로 반격하는 상황은 계산에 넣어 두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합류로 솔레르 백작의 군대가 박살이 났다. 겨우 움베르토 왕국의 병력만으로도 그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괴물인데, 만약 그가 남부 국경을 공격한다면 이곳의 병력만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 낼 수 있을까?’
단 한 명의 존재.
자신이 없었다.
높디높은 성벽과 단단한 마법 방어는 적의 침입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그간 보여 준 행보는 상식의 범주를 벗어났다.
무엇보다도 현재 크로노스 제국은 카이로 서부 전선에 집중하는 상태.
데니킨 남작은 자신의 권한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알았다.
그는 곧바로 상부에 연락했다.
멤피스 후작과의 마법 통신에, 로만 드미트리가 북진해서 크로노스를 공격하려 한다는 가능성을 말했다.
[……정말 어이가 없군. 이 와중에도 수비가 아닌 공격을 택하다니.]
화면 너머.
멤피스 후작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병법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자칫 잘못했다간 공격과 수비를 모두 실패할 수도 있다.
크로노스의 방어를 무너트리지 못하고 카이로가 백기를 내거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 실패는 왕국 연합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릴 것이다.
그런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남부 국경으로 밀려드는 병력은, 본인들의 목적을 대놓고 드러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와의 대립에서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었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치킨 게임(chicken game)에서, 기어코 발할라를 무너트리는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데니킨 남작. 크로노스는 발할라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크로노스가 대륙 제일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대륙 전체를 공격하고도 충분한 여력이 남아 있을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크로노스의 본대.
그들을 물릴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이고, 크로노스의 남은 병력만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 낼 생각이었다.
[일주일만 버텨라. 지원군과 같이 카스트로를 보내겠다.]
“……카스트로를 말입니까?”
데니킨 남작이 눈을 부릅떴다.
카스트로.
현재는 사실상 로만 드미트리를 대륙 제일검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1위의 자리에 랭크 되어있는 존재는 카스트로였다.
크로노스 제일검. 그를 보내겠다는 의미는 크로노스 또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본진을 털어 버리려는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정면에서 찍어 누르겠다고 말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상대하는 크로노스 제국은,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대륙 제일의 강대국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데니킨 남작.
단 일주일.
그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시간을 벌겠다고 다짐했다.
* * *
이틀 뒤.
국경 너머로 움베르토의 군대가 보였다.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곳에 도착하는 데만, 로만 드미트리는 이틀의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성벽 위.
데니킨 남작이 부관에게 말했다.
“적의 전력은?”
“약 10만 명 정도입니다. 움베르토로서는 방어 전력을 제외하고는 전부 끌어모은 수준이고, 이렇다 할 마법 전력도 없습니다. 사실상 로만 드미트리만 아니라면 경계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겨우 저 정도 전력으로 공격을 감행하다니. 로만 드미트리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야.”
현재.
카이로와 헥토르의 상황은 매우 격정적이었다.
두 왕국은 드미트리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위기를 넘기는가 싶었지만, 두 제국의 파상공세(波狀攻勢)로 인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은 위협적이었다.
카이로와 헥토르 중 어디를 도와주었든 나머지 한 곳은 무너졌을 텐데, 크로노스의 영토를 공격하면서 두 제국 또한 시간적인 여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시간의 싸움.
모두가 벼랑 끝에 몰렸다.
먼저 무너트리지 못한다면, 전장의 전세는 분명히 급격하게 바뀔 것이다.
“우리는 반격을 포기하고 오로지 수성에만 전념할 것이다. 마법 방어를 다시 한번 확인하라. 로만 드미트리가 어떠한 수작을 부리든, 지원군이 도착하는 일주일 동안은 이곳을 어떻게든 지킬 것이다.”
“알겠습니다.”
부관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병사들에게 명령해,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부분들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성.
그가 해 온 일들에 대해 들었기에, 데니킨 남작은 초조한 기색으로 국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척척척.
움베르토의 군대가 대열을 형성했다.
그러고는.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로, 로만 드미트리다.”
“아아, 신이시여.”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두려움에 물든 얼굴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악명(惡名).
그를 상대하던 이들이 어김없이 죽었다는 사실에, 제국을 등에 업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탁.
걸음을 멈추었다.
사정거리 바깥이었다.
데니킨 남작이 긴장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외쳤다.
“너희 크로노스 제국은 휴전 협상을 일방적으로 어겼다. 그리고 발할라를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왕국 연합을 공격했다. 대륙의 법도는 굳이 운운하지 않겠다. 이번 전쟁의 승자가 대륙의 절대자로 거듭날 테니, 대륙에 어떤 법도가 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
묘한 분위기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높디높은 성벽을 앞에 두고도, 평화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 전쟁으로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스스로를 대륙 제일의 강대국이라고 표현한다. 너희의 주장대로라면 어떤 적을 상대로든 물러날 이유가 없을 텐데, 이번 전쟁은 비열하다고 표현할 만큼의 모습을 보였다. 나를 피해 공간 이동 마법으로 드미트리를 직접 공격했고, 나를 피해 카이로와 헥토르, 남부의 삼국을 공격했으며, 내가 전쟁에 참여할 수 없도록 발할라의 영토에 발을 묶어 두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은 비난할 생각이 없다. 문제는 크로노스가 일부러 나를 배제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막을 수 없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툭툭.
자존심을 건드렸다.
사실 의문스럽기도 했다.
크로노스가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전력을 갖추었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지금부터 내 의문을 직접 확인하고자 한다. 내가 방어가 아닌 공격을 택했을 때. 크로노스가 어떻게 대응할지, 그리고 크로노스가 정녕 나를 막을 기반을 갖추기는 했는지를. 만약 너희의 전력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초라하다면, 나는 이대로 황제의 목을 베어 제국의 수도에 드미트리의 깃발을 꽂을 것이다.”
순간.
다들 소름이 돋았다.
오만한 발언이었다.
정신이 나갔다고 비난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기에 그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가능할 것 같았다.
그간 보여 준 모습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그때였다.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날 막아라.”
그가 천천히.
크로노스의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움베르토 왕국군.
그들은 뒤에 늘어선 채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데, 로만 드미트리 홀로 크로노스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선을 넘었다.
사정거리에 도달하는 순간, 데니킨 남작이 벼락같은 명령을 내렸다.
“공격해!”
파파파파팟.
하늘 위로.
수많은 화살이 발사되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팟.
파파파팍.
목표를 잃은 화살들이 땅바닥에 박혔다.
로만 드미트리는 어느새 빠르게 성벽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고, 데니킨 남작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대자 화살이 끊임없이 발사되었다.
단 한 명의 적을 처리하기 위해 수천 발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할 수만 있다면, 물자가 고갈되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익스플로전(Explosion).”
“스톤 레인(Stone Rain).”
콰앙!
화륵, 화르르르르륵.
사방에서 마법이 발사되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통은 다수를 상대로 나서야 할 마법사들이, 마나를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마력을 폭발시켰다.
콰앙!
땅이 무너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조각조각 난 땅덩어리를 밟으며 뛰어올랐고, 화살 공격은 오라의 막을 형성해서 가볍게 막아 냈다.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성벽과의 거리가 훅훅 가까워졌다.
마법사들은 악에 받쳐 마법을 사용했지만, 화염 마법의 경우에는 방어 없이 맨몸으로 그냥 뚫어 버렸다.
훅.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이었다.
데니킨 남작은, 현실을 부정하듯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미친.”
설마.
저 괴물이 홀로 성문을 열 생각이란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와 같은 일을 대비해, 데니킨 남작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함정도 있었다.
“지금이다.”
삐비비빅.
마법 폭탄이 반응했다.
동시에.
“라이트닝 레인(Lightning Rain).”
빠직.
빠지지지지지직.
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마법을 발현했다.
마법 폭탄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킴과 동시에, 하늘에서 내리 떨어지는 수백 발의 번개가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불빛이 일었다.
먼지구름이 매캐하게 피어올랐고, 환한 불빛으로 물든 세상은 생명체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리했다.’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대도 인간일 뿐이다.
만반의 준비를 한 함정에 발을 들였으니, 연약한 인간의 몸뚱이로는 버틸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 순간.
“어어어……?!”
병사들의 당혹스러운 음성.
모두가 하늘을 보았다.
인간의 형태가, 그대로 성벽 위로 떨어져 내렸다.
쿠웅.
쿠르르르르르릉.
그제야 눈앞의 광경을 직시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홀로, 성벽 위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