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단 한 명의 존재감 (4)
늘 의문이었다.
알렉산드르.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활약을 보이든, 그와 관련된 얘기들은 항상 오만하게 승리를 확신한다는 내용을 반복했다.
사실 크로노스의 행보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한 명으로는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전장에서 어떻게든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과연 그들의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이란 말인가.
확인하고자 했다.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그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그리고 알렉산드르가 정말 자신을 막을 만한 전력을 갖추었는지를.
마더 엘프의 말처럼 마계의 존재를 믿는 것이라면, 이번 기회로 그 실체를 확인할 것이다.
“공격…… 컥.”
번뜩.
명령을 내리려던 기사의 목에서 피가 튀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팽팽한 긴장감을 무너트리는 살육에, 크로노스 제국군이 악에 받친 얼굴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죽여!”
“공격해!”
익숙한 광경이었다.
다수가 하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천마검법 중반부 일초식.’
번뜩.
콰르르르르르릉.
오라의 폭풍이 전방을 휩쓸었다.
오라를 일으키며 달려들던 사람들은 바람의 칼날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그 광경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직시시켰다.
이것이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홀로 30만 대군을 무찌르고, 움베르토와의 전쟁에서도 상황을 역전시켰던 단 한 명의 존재감.
그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에 로만 드미트리가 파고든 뒤였다.
푹.
푸확.
학살이었다.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모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고, 로만 드미트리가 공간을 거칠게 파고들며 막아서는 이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렸다.
예외는 없었다.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던 일반 병사들은 동시에 목이 날아갔으며, 오라를 폭발시키던 오라 검사는 검과 같이 몸이 갈라졌다.
그리고.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강하게 땅을 밟으며 검을 휘두르자, 첫 공격과 같은 오라의 폭풍에 공간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당혹스러운 광경이었다.
일반적인 공성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고, 무턱대고 성벽 위에 떨어져서 학살을 벌이는 모습에 데니킨 남작은 어떠한 명령도 내릴 수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일주일을 버티라던 명령. 멤피스 후작은 처음부터 데니킨 남작이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누구보다도 로만 드미트리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주변 병력을 이곳에 보내지 않은 것만 보아도 의도가 명백했다.
이곳은.
버림받았다.
크로노스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일분일초라도 시간을 끌기 위한 용도에 불과했다.
“막아! 막으라고!”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쳤다.
항명(抗命)은 어차피 죽음으로 직결되기에, 수많은 병사에게 둘러싸인 로만 드미트리가 눈먼 검에 무릎을 꿇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 성벽 너머로 움베르토의 병력이 밀려들었다.
정상적인 대응법은 궁수들에게 공격을 명령해야 했다.
몇몇 궁수들은 데니킨 남작의 마음을 알았는지 활에 화살을 먹였지만, 발사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릉.
성벽 위.
로만 드미트리가 정상적인 대응을 차단했다.
그 하나를 처단하겠다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이대로라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였다.
“상부에 연락해. 날 막으러 오지 않는다면…….”
서걱.
쿠르르르르릉.
성문에 연결된 쇠사슬을 잘랐다.
거대한 성문이 해자 위로 떨어지며, 그 너머로 달려오는 움베르토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크로노스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 * *
크로노스의 수도.
대륙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수도의 사람들은 평화롭게 본인의 일상을 보냈다.
그 시각, 멤피스 후작의 집무실.
슥슥.
멤피스 후작은 황제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가 모종의 이유로 한발 물러나면서, 그동안 크로노스 제국의 대소사(大小事)는 모두 멤피스 후작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는 이번 전쟁을 추진하며 진실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크로노스 황제가 미지의 세력과 연관되어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르를 만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그때부터는 알렉산드르가 제시한 가이드에 따라,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일을 처리했다.
그때였다.
안으로 들어선 수하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최전방 방어 진지가 함락되었습니다. 데니킨 남작은 현장에서 죽은 것으로 판단되며, 로만 드미트리는 그곳에 불을 지른 이후에 곧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뚝.
펜을 멈추었다.
수하를 바라보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겨우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고?”
“예.”
“멍청한 녀석. 일주일을 버텨 보겠다고 말하더니, 말만 번지르르한 녀석이었어. 로만 드미트리가 최전방 방어 진지에 불을 지른 의도는 명백하다. 자신을 막으러 오지 않는다면, 크로노스의 영토를 점령하는 족족 회생 불가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경고성의 의미겠지.”
황당했다.
크로노스의 역사에.
이토록 호전적인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밀고 들어왔고, 그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크로노스의 본대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진실의 영역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멤피스 후작은 불안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크로노스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고,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확신이 있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위협하는 꼴이, 멤피스 후작의 심기를 자꾸만 건드렸다.
“이번 일은 우리의 선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제 궁금해지는구나.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상대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웃었다.
따로 명령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할 병력을 보냈고,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알렉산드르가 확신하듯.
멤피스 후작도 크로노스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였다.
* * *
벌써 세 번째 전투였다.
움베르토의 작전은 매번 똑같았고, 로만 드미트리가 한바탕 쓸어 버리고 난 뒤에 병력이 진입했다.
“한 놈도 남겨 두지 마라!”
“포로는 필요 없다. 모조리 죽여라!”
완벽한 승리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부를 혼란에 빠트리고, 성문마저 열어 버리니 크로노스 제국은 수성의 이점을 살리지 못했다.
지금부터는 크로노스로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세 개의 요새가 무너진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어디로든 뻗어 나가 크로노스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빠득.
성의 잔해가 발에 밟혔다.
칼데론 드레이크는 성으로 들어서며, 참담하게 변한 주변 광경을 둘러보았다.
‘이게 로만 드미트리의 힘인 것인가.’
사실.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작전을 반대했었다.
홀로 달려들어서 성문을 열겠다는 작전은, 머리가 달린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신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움베르토의 병력을 대동하면 충분히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을 텐데, 왜 홀로 위험을 감수하는지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이렇게 말했다.
“움베르토의 병력은 겨우 10만에 불과합니다. 크로노스의 영토에서 몇 번의 전투를 거듭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병력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크로노스가 느끼는 위험은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움베르토의 병력을 최대한 보존해야만 합니다. 저라는 존재를 적극적으로 살려, 크로노스가 이곳의 상황을 방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이번 작전의 최우선 목적입니다.”
대단했다.
상황을 판단하는 안목과 비정상적인 작전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천외(天外)의 존재였다.
만약 내뱉은 말을 증명해 보이지 못했다면 실망스러웠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짧은 시간에 정말 세 개의 요새를 무너트렸다.
움베르토의 병사들은 이제 광신도가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기세에, 칼데론 드레이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은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
크로노스가 야망을 드러낸 지금,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에도 요새에 불을 지르려고 했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제지했다.
“요새를 정비하고 수성을 준비해 주십시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보고받은 정보에 의하면, 크로노스 제국의 지원군이 인근에 도착한 상태입니다. 그들을 굳이 평야에서 맞닥트릴 이유는 없습니다. 일단 요새를 재정비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그들과의 전투를 치른 이후 상황을 판단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감탄했다.
지금은 전쟁 도중이다.
그런데 지원군의 상황을 파악하는 정보까지 언급하는 모습에,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칼데론 드레이크는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다음 날.
예상대로.
성벽 너머로, 크로노스의 지원군이 다가오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 * *
성벽 위.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움베르토의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로노스 제국군이 사정거리 바깥에서 대열을 형성했다.
그리고.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검은빛의 갑옷으로 중무장한 존재는, 육안으로는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마치 용을 형상화한 갑옷의 형태는, 크로노스 황제가 단 한 명의 인물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설마.”
“카스트로다.”
“카스트로가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
다들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크로노스 제일검이 전장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떠나, 카스트로는 황제를 지키는 황실의 수호신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황실을 벗어나지 않는 존재.
그런 그가 남부 전선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만큼 크로노스의 의지를 알 수 있었다.
필살(必殺).
강력한 의지를 표출했다.
본대를 회군시키는 것이 아닌, 크로노스 내부의 병력만으로 처리하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철그럭, 철그럭.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긴장감이었다.
카스트로는 사정거리 안에 당당히 들어섰고,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어 서더니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크로노스의 카스트로다.”
탁한 음성이었다.
투구 안으로는, 붉은 안광이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했다.
“로만 드미트리. 너에게 대전사 전투를 신청한다.”
그 말에.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 * *
지난 몇 년.
전장에서 금기시되는 일이 있었다.
“드미트리를 상대로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이지 마라.”
전장에서 죽어 간 이들의 뼈아픈 가르침이었다.
드미트리를 상대로 대전사 전투를 진행했던 이들은 모조리 처참한 패배를 맞이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절대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적 우위를 내세워도 쓰러트릴 수 없는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인데, 그와의 일대일 대결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당황스러움이 컸다.
설마 카스트로가,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전사 전투를 바랄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확.
로만 드미트리.
그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뿐하게 땅에 착지하더니, 담담한 얼굴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이지.”
슥.
검을 뽑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일었다.
카스트로도 똑같이 검을 뽑아 들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흉흉한 안광을 빛냈다.
“로만 드미트리. 전장에서 들려오는 네 소식에 나는 항상 이 순간을 고대해 왔다. 사람들은 황당하게도 이미 네가 나를 넘어선 것처럼 말하더군. 아레스가 발할라 랭킹 1위의 세자르를 쓰러트렸으니, 로만 드미트리가 수십 만의 대군을 홀로 도륙했으니. 나는 네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떠들어 대더군.”
쿠르르르르르릉.
대기가 요동쳤다.
어둠의 갑옷이 빛을 흠뻑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로부터 비롯되는 마나의 흐름이 격렬하게 들끓었다.
“참으로 우습더군. 나는 이미 수십 년도 전에 이 자리에 올랐다. 네가 검을 휘두르고 마나를 받아들였던 그 시점에도, 나는 적수가 존재하지 않는 대륙 제일검이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내가 황실에서 아무런 발전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를 황실에 가두고, 남들의 시선 밖에서 끊임없이 흘렸던 땀방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황실 안.
카스트로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크로노스 황제는 적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감히 그를 노리는 사람이 세상에 없기에, 크로노스 황제를 보호하는 카스트로는 제 역할을 해낼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매일 치열한 훈련을 반복했다.
혹시라도 크로노스 제국을 넘보는 존재가 세상에 나타난다면. 그때는 일반적인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그런 괴물일 것이 분명했다.
검을 휘둘렀다.
아침부터 밤까지.
땀을 비처럼 쏟아 냈다.
사람들의 카스트로에 대한 인식은 한결같았지만, 그는 반복되는 삶에서 조금씩이라도 발전했다.
그런 존재가 바로.
카스트로였다.
검을 뽑을 일이 없었을 뿐, 오래전에 세자르가 카스트로를 상대했을 때 그는 범접할 수 없는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라고 말했었다.
크로노스 랭킹 1위와 발할라 랭킹 1위.
대륙 랭킹으로는 겨우 한 단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둘의 대결을 지켜본 사람들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단언했다.
쿠르르르르르릉.
오라가 일어났다.
마치 세상을 집어삼킬 듯.
주변을 물들이는 오라는, 이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파괴적인 기운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내가 너를 처단함으로써, 이 카스트로가 대륙 제일검임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증명하겠다.”
확실했다.
카스트로의 오라.
그것은 대륙 역사상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
7성의 영역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