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6화 (396/615)

396화 알렉산드르 (1)

처음 크로노스가 전쟁을 선포했을 때.

카이로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저벅저벅.

일단의 무리가 왕궁의 복도를 걸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회의실 앞에 도달하자, 경비병들이 예의를 차린 후에 회의실 문을 활짝 열었다.

“카이로 국왕 폐하가 입장하십니다.”

끼익.

회의실 내부.

미리 자리하고 있던 수뇌부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다니엘 카이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받아들이는 다니엘 카이로의 태도는 제법 익숙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뇌부들의 인사를 받은 그는, 상석(上席)에 앉은 뒤에 수뇌부들 또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모두가 자리하자.

다니엘 카이로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크로노스 제국이 휴전 협상을 어기고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는 우리가 바라지 않았던 일이나, 우리가 예상하고 대비한 일이기도 하다. 노르베르트. 현재 적의 상황을 보고하라.”

노르베르트.

정보를 총괄하는 인물이었다.

새로운 개편에서, 다니엘 카이로는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그를 요직에 앉혔다.

“크로노스 제국은 이번 공격에 약 50만의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난 전쟁보다도 많은 숫자이며, 동시에 움베르토 왕국에도 병력을 보냈다는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문제는 머릿수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번 전쟁에서 확실하게 승부를 보려는 의도인지, 크로노스 기사단과 자국 내에 있는 마법사들을 모두 소집했습니다. 그들이 지난 전쟁과 마찬가지로 ‘텔레포트’를 활용한 별동대를 운영한다면, 카이로 전역은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사이먼 기사단장. 카이로의 병력 현황은 어떻게 되지?”

발언권을 넘겼다.

니콜라스 백작이 죽으면서, 로열 나이트의 부기사단장이었던 사이먼이 군부(軍部)를 차지했다.

“카이로의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양해를 구한 바였기에, 그동안 훈련했던 대로 앞으로 3일 안에 병력의 편성을 끝낼 예정입니다. 그리고 서부 전선의 경우에는 대비를 끝냈습니다. 마법 방어는 물론이거니와, 워프 게이트를 통해 곧바로 지원할 수 있도록 이동 경로도 확보한 상태입니다.”

“마법사들은?”

“워 메이지(war mage)들을 최대한 고용했습니다. 그들은 수개월 전부터 카이로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곧바로 서부 전선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샐러맨더 대륙에서 활동하는 용병단들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하는 일이라 성공보수가 만만치는 않지만, 덕분에 약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서부 전선에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사이먼에 이어.

바통을 이어받듯, 재무를 관리하는 인물이 말했다.

“전쟁 자금을 미리 준비한 덕분에, 마법 소모품들의 재고나 용병들의 보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카이로의 귀족들이 전폭적으로 도와준 덕분입니다. 군량도 충분하기에, 장기전으로 이어진다고 한들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지난 일 년.

카이로가 놀고만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차례로 본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수뇌부들의 모습에, 다니엘 카이로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카이로의 역사는 항상 외세(外勢)의 침략에 고통을 받아 왔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카이로의 권력 체계는 타국의 간섭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베네딕트 후작은 크로노스를 등에 업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때의 카이로는 나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맛보았고,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강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묵직한 목소리였다.

앳된 국왕은 없었다.

그가 좌중을 압도하며, 강한 열망으로 타오르는 눈빛을 보였다.

“크로노스의 배신은 모두가 예상했던 바다. 우리는 이날을 위해 그동안 끊임없이 준비해 왔으며, 그렇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적들에게 증명하라. 카이로 왕국이 언제든 국경을 넘어와도 될 만큼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영토에 발을 들인다면, 처절하게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드미트리와 미래를 함께할 것이며, 더는 힘에 굴복하는 그런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

피가 끓었다.

다니엘 카이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따라서 일어나는 모습에, 그가 수뇌부들의 시선을 마주 보며 강력하게 말했다.

“투쟁하라. 적을 무너트려라. 앞으로 있을 혼란에, 지옥 같은 전장에. 나 또한 너희와 같이할 것이다.”

* * *

지난 일주일.

치열한 시간이었다.

매일같이 공격해 오는 크로노스 제국으로 인해, 서부 전선은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이 끊기질 않았다.

“으아아악!”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면 모든 게 끝이다!”

성벽 위.

카이로의 병사들이 악에 받쳐 무기를 휘둘렀다.

계속되는 마법 공격으로 인해 성벽 일부가 무너진 상태였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사방이 시체 더미였다.

의지가 대단하다고 한들 완벽하게 공격을 막아 낼 수는 없었고, 피로 물든 성벽이 지난 일주일의 시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증명했다.

위태로웠다.

하지만 버텼다.

카이로가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지탱하는 두 가지의 요소 덕분이었다.

첫 번째.

“좌측 성벽이 위험하다! 예비 병력을 보내, 그곳을 지원하라!”

혼란스러운 전장 속.

다니엘 카이로가 있었다.

위험을 같이하겠다던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고, 그는 서부 전선에 직접 나타나서 카이로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전략적으로 대단한 역할을 맡지는 않았다.

실질적으로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반덴버그 후작이었지만,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병사들의 의지에 불을 붙였다.

“죽어!”

“카이로 국왕 폐하가 지켜보고 있다! 끝까지 싸워라!”

“적들에게 절대 밀리지 마라!”

다들 악에 받쳤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과거.

카이로는 나라답지 않은 나라였다.

다니엘 카이로가 국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갈기갈기 찢겨 나간 권력의 체계로 인해 카이로의 백성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말았다.

항상 제국이 우선이었다.

크로노스가, 발할라가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하는 순간. 카이로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들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다니엘 카이로는 자국을 우선으로 여겼다.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았고, 드미트리와의 연합을 통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물러날 수 없었다.

어떻게 찾은 자유인데, 이렇게 내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번뜩.

파파파팟.

크리스가 전장을 활보했다.

며칠 전.

카이로는 정말 무너질 위기에 놓였지만, 드미트리가 지원군을 보내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크리스를 비롯한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발군의 무력을 보였다.

그야말로 밀려드는 제국군을 마주치는 족족 도륙해 버렸고, 피닉스의 마법사들은 마력을 폭발시키며 일당백의 역할을 맡았다.

아슬아슬했다.

무너질 듯 말 듯.

카이로는 버텨 냈다.

누군가는 겨우 일주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카이로가 그동안 철저하게 준비한 노력의 성과였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꽈악.

다니엘 카이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물론.

서부 전선은 위태로웠다.

하지만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포위망을 뚫고 움베르토 왕국을 도와주기 위해 움직인다고 했다.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합류하는 순간부터는 반격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고, 크로노스 제국이라는 거물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

정말.

정말, 어쩌면.

“끝까지 투쟁하라! 카이로가 어떤 나라인지를, 적에게 똑똑히 보여 주어라!”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어둠의 공간.

알렉산드르는 싸늘한 얼굴로 여러 화면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화면.

드미트리였다.

미스틱과 그림자들을 동원해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 그곳을 무너트리려고 했건만, 오히려 궤멸당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그 과정이 알렉산드르의 심기를 건드렸다.

공간 이동 마법에 특화되어 있는 미스틱이 크리스에게 죽었으며, 아레스 또한 케빈에게 당해 산 채로 붙잡히고 말았다.

두 번째 화면.

헥토르였다.

사실 헥토르는 변수로 취급하지도 않을 만큼의 약소국이었고, 천공의 마탑주는 계획대로 에드윈 헥토르를 집어삼키고 그들을 무너트리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에드윈 헥토르가 오히려 천공의 마탑주를 흡수하고 7서클에 도달.

천공의 마법사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 내더니, 발할라를 상대로 무려 일주일을 버텨 내는 모습을 보였다.

짜증이 일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건만, 배신자를 심어 둔 두 전장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할라는 로만 드미트리의 추격에 실패했다.

포위망이 뚫렸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알렉산드르는 보고했던 존재를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끝까지 발악하는구나.”

하나씩.

그렇게 하나씩.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녹아든 완벽한 계획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로 인한 변화는 대륙 전체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 로만 드미트리가 움베르토에서 나타났다.

움베르토를 무너트리려던 계획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그가 오히려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에 더 이상은 웃음으로 넘길 수 없었다.

화가 났다.

짜증이 치밀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복잡해진다면, 알렉산드르가 모시는 그분에게 자신의 자질을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네가 기어코 날 움직이게 만드는구나.”

쿠르르르릉.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 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리라.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만큼, 그가 죽어서도 고통을 받도록 만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카스트로를 보내 나의 방식을 증명받을 것이다. 나의 방식으로는 정말 쓰러트릴 수 없는지,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패배한다면 그의 영혼을 되살려 전생(前生)을 들여다볼 것이다. 대륙 정벌에 버금갈 정도로,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온 삶을 알아내는 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개인적인 열망이었다.

그가 모시는 그분과는 상관이 없는, 알렉산드르라는 인간이 마음속에 품어 두었던 강렬한 열망.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정해졌다.

알렉산드르의 시선이 한 화면을 향했다.

‘카이로.’

서부 전선.

카스트로가 소리쳤던 것처럼, 알렉산드르의 목표는 바로 카이로 왕국이었다.

* * *

날이 밝았다.

카이로와 크로노스.

반복되는 일상처럼, 그들은 성벽을 앞에 두고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다.

“죽어!”

“적들을 모조리 죽여라!”

치열했다.

서로를 향해 살의를 보이며 피로 뒤덮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알렉산드르는 천천히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머리에 화살이 관통당한 병사가 뒤로 나가떨어지는데도, 그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였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알렉산드르가 성벽을 바라보더니 심드렁한 눈빛을 보였다.

“이젠 끝이다.”

화악.

마나가 일었다.

알렉산드르의 손끝이 성벽을 향했다.

“라이트닝 퍼니시먼트(Lightning Punishment).”

번뜩.

세상이 환해졌다.

하늘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세상을 전부 물들이는가 싶더니, 사람들의 귀가 순간적으로 멀었다.

이윽고.

콰앙!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폭발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가 흘러나오는 귀를 붙잡았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따위 통증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벼락이 떨어진 장소가 파괴되었다.

마법으로 겹겹이 보호하고 수천의 병사들이 아득바득 지키고 있었던 공간이, 단번에 파괴되며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갔다.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아직 이게 현실인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때, 하늘의 분노는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수차례 벼락을 내리쳤다.

번쩍.

콰르르릉.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엄청난 위력에 모두 휩쓸려 버렸고, 카이로 왕국으로서는 어떻게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파닉스의 마법사들이 방어 마법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발현되는 방어막이 벼락을 막아 냈지만, 세상이 한번 번쩍이자 방어막이 부서지며 마법사들의 머리를 관통했다.

압도적이었다.

단 한 번의 마법에,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아아.”

성벽 위.

폐허가 되어 버린 공간에 다니엘 카이로가 있었다.

문득.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델리아를 멸망시킨 존재. 그는 신(神)의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법으로 수도를 통째로 날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날의 기억.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법사들은 감히 9서클의 경지를 언급했지만, 사람들은 그때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라며 의견이 분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셰피르의 8서클 마법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크로노스 제국이 9서클 마법사를 보유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9서클의 마법사를 상대한다는 것은, 아무리 발악해도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눈앞에.

알렉산드르가 나타났다.

그가 성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에, 다니엘 카이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모두 퇴각하라! 일단 이곳을 벗어나, 상황을 재정비할 것이다!”

빠른 판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괴물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닌 한발 물러나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전장에서 벗어났다.

그간의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이곳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발악했건만, 도망치는 뒷모습은 무력하고 초라했다.

“큭큭큭.”

알렉산드르가 웃었다.

전장을 걸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도망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는 장난을 치듯 손가락 끝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죽어라.”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가리킨 공간이 폭발했다.

수많은 병사가 폭발에 휩쓸렸다.

재밌었다.

항전을 포기한 적들의 모습에, 알렉산드르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에 마나를 실었다.

“그래! 그렇게 비명을 질러라! 절망에 빠져라! 겁쟁이처럼 그대로 도망쳐,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려라! 나 알렉산드르가 세상에 강림(降臨)했음을. 내가, 이 대륙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드디어.

알렉산드르 황제.

그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