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9화 (399/615)

399화 알렉산드르 (4)

이 세상.

인간들이 살아가는 지상계는 다른 차원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신이 정한 명백한 경계이며, 그렇기에 마계의 통로를 열었다고 한들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가 공개한 마계의 통로는 달랐다.

생명체가 출입하기에는 조그맣고 균열이 심했지만, 그것은 지상계에 완전히 동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쿠르르르르르릉.

마력이 휘몰아쳤다.

알렉산드르는 마계의 통로로부터 비롯되는 마력의 힘에, 존재감이 부풀며 흉흉한 눈빛을 보였다.

“나의 아이들이여. 어둠의 축복을 받아들여라.”

“크악.”

“크르르르르륵.”

리바이브로 살려 낸 망자(亡者)들이 거친 울음을 토해 냈다.

그들의 외피가 들썩이며 거대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일반 병사에 불과했던 존재들이 하나하나 대형 몬스터에 버금가는 조건을 갖추었다.

마계의 통로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완벽한 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일말의 힘만으로도 지상계에 생겨나는 변화는 극적이었다.

통로 너머.

어둠의 원천이 있었다.

통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망자들과 알렉산드르의 힘은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스스로를 제일 강한 인간이라고 자부하겠지. 내가 인간의 기준에서 살아가는 존재였다면, 너를 상대로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아라. 마계의 힘을 받아들인 나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너와 같은 존재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확.

마력이 들끓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마력에, 알렉산드르가 적의를 표출했다.

“그러니, 참담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어라.”

“캬악!”

“크르르르르륵.”

망자들이 달려들었다.

주변을 까맣게 물들 만큼 득실거리는 수많은 망자가, 일제히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파도가 밀려드는 것처럼 공격하는 그들의 모습에, 알렉산드르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다크 퍼니시먼트(dark punishment).”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어둠의 마력이 폭발했다.

마계의 통로에서 빨아들인 마력이 알렉산드르를 통해 발현되며, 그것은 강력한 소용돌이를 동반해 몰아쳤다.

퍼퍼퍼퍼퍼펑!

대기가 찢겨 나갔다.

망자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덮치는 순간, 어둠의 마력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주변에 있는 모든 존재를 찢어발겼다.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거대한 몸집의 망자들이 처참하게 찢겨 나갔고, 그런 와중에도 망자들은 몇 개 남지 않은 신체 부위로 악착같이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카악!”

번뜩.

공격해 오는 망자를 차례로 베었다.

단단한 외피가 가볍게 잘려 나갔고, 거칠게 들이닥치는 어둠의 마력을 정면으로 맞닥트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힘의 파동이 일었다.

폭발하는 오라가 어둠의 마력을 밀어냈고, 망자들을 맞닥트리는 족족 베어 버리며 알렉산드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속도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알렉산드르와의 거리가 훅훅 가까워졌지만, 알렉산드르는 얼굴 가득 웃음을 보였다.

“그래, 끝까지 발악하거라.”

확.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어둠의 마력이 그의 손길에 따라 휘몰아치며, 수천 개의 날카로운 가시로 변해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파파파파팟.

카카카캉!

격렬한 공방이었다.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고 수많은 공격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하나의 공격도 허락하지 않았다.

망자들은 어둠의 마력에 몸을 던지며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싸움이었고, 천마검법을 발현해 공간을 소멸시켜도 또 다른 망자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갈기갈기 찢겨 나간 망자들도 다시 재생되었다.

마계의 통로에서 어둠의 마력이 공급되는 한, 그들은 계속해서 재생되며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크흐흐흐, 어떠냐. 이것은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일부일 뿐이다. 우매한 인간들아. 현실을 받아들여라. 너희가 아무리 발악할지라도, 이미 이 세상의 미래는 정해졌다. 일루전(illusion).”

파스스스스.

알렉산드르의 존재가 나누어졌다.

처음에는 두 명으로, 네 명으로, 여덟 명으로 늘어난 존재가, 무려 수십 명에 달하는 존재로 변했다.

그러고는.

“헬파이어.”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륵.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발현했다.

32명의 알렉산드르가 헬파이어를 일으키자, 마치 세상이 화염의 지옥으로 뒤덮이는 것처럼 뜨거운 불길이 한 번에 밀려들었다.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화염의 내성을 가진 로만 드미트리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불길에 휩쓸린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캬악!”

“크아아악!”

동시에 망자들이 매달렸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불길에 휩싸일 미래를 알면서도, 망자들의 공격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결국.

콰앙!

화르르르르르르르륵.

화염이 들이닥쳤다.

로만 드미트리가 화염에 휩쓸리는 모습에, 알렉산드르는 희열에 차오른 미소를 보였다.

* * *

찰나의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강력하게 휘몰아치는 화염의 힘에,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어둠의 마력에.

머릿속에 존재하는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며, 로만 드미트리는 그대로 화염에 휩싸이는 길을 택했다.

콰앙!

화르르르르르르르륵.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올랐건만,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고통을 선사할 만큼 헬파이어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육체적인 고통은 로만 드미트리를 조금도 동요시키지 않았다.

새카맣게 타 버린 채로도 끝까지 달려드는 망자의 머리를 짓밟으며, 전생의 기억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천(天)의 경지에 오르던 순간도 이와 같았다.’

그날.

백중혁은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힘이 몰아쳤고, 자연 그 자체를 받아들이며 육체가 붕괴했다.

그 순간 죽음을 예감했다.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면서도, 온갖 위기를 극복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던 백중혁이었지만, 자연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는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서, 귀에서, 코에서.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살갗이 녹아내리고 터지면서 인간의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는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할 만큼 고통에 몸을 떨었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자연의 힘을 집어삼켰다.

자연과 동화되어 한 단계 나아가는 순간, 백중혁은 전신에 휘몰아치는 강력한 힘의 존재를 느꼈다.

알렉산드르는 예상이나 했을까.

화염이 몰아치는 공간.

어둠의 마력.

익숙했다.

헬파이어의 열기는 자연을 받아들이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고, 어둠의 마력은 천마신교의 힘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맥락이 있었다.

사실 어둠의 마력을 어둠이라고 칭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기준이었다.

마계는 어둠의 힘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힘 중 파괴적인 것들을 추구할 뿐이고, 그것들이 여러 방면으로 발현되어 어둠의 마력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고로.

천마신교와 같았다.

분명히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비슷한 맥락을 보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충분했다.

마력을 받아들였다.

화염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겼다.

알렉산드르와의 대결.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은 감히 다가서지도 못할 만큼 엄청난 싸움이었고,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라 할지라도 알렉산드르를 상대로는 생사(生死)를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알렉산드르가 강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로만 드미트리는 생사의 경계선에 들어선 상황을 수련의 일부로 활용했다.

만약.

승부를 보려 했다면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직접 마주한 알렉산드르는 아직 자신을 위기감에 빠트릴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장단에 놀아 주었다.

화염이 일렁였다.

그 밖에서 환희에 차오른 표정의 알렉산드르는, 화염 속에서 로만 드미트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차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죽음을 예감했고.

알렉산드르는 승리를 확신했다.

격렬하게 폭발하는 마력이, 크게 요동치는 생명력이, 알렉산드르를 승리했다는 착각에 빠트렸다.

* * *

“끝난 건가.”

싱거운 싸움이었다.

알렉산드르는 화염 속에서 사그라지는 생명력에, 다소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

전생에 자신이 우러러볼 만큼의 존재였다면, 예상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길 바랐다.

그래야 쓰러트릴 맛이 있을 테니까.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증명함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의 무공을 얻었을 때의 희열은 정말 대단할 것이다.

결국.

인간일 뿐이었다.

실망스러운 얼굴로 마력을 회수하려는 그때, 화염으로 물든 공간을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

화륵.

화르르르르륵.

눈을 부릅떴다.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온몸이 화엽에 휩싸인 상태였는데, 피부가 녹아내리지도, 그렇다고 머리카락조차 타오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비현실적이었다.

일루전으로 본체를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헬파이어를 사용한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마법이건만,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걸어 나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확인하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위험했다.

본능이 말하는 경고에, 알렉산드르는 황급히 마력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번뜩.

반응하지 못했다.

한 번의 번뜩임.

머리가 날아갔다.

특별한 힘의 파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시야가 팽그르르 돌아가며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툭.

데구루루.

“……이, 이게 무슨.”

당황했다.

머리가 다시 본체에 흡수되었으나, 알렉산드르는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눈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재생되는 머리를 바라보며, 알렉산드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내뱉었다.

“천의 경지에 올랐을 때. 세상 그 누구도 내 일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알렉산드르. 네가 정말 불사의 존재라면, 끝까지 버텨라. 내 힘을 어디까지 막아 낼 수 있는지를 직접 확인할 생각이니까.”

슥.

자세를 바꾸었다.

특별하지 않았다.

천마군림보의 첫 번째 걸음.

천마검법의 전반부 일초식.

간결했다.

일반 병사들을 상대로도 사용했던 그 힘이, 검을 통해 표출되는 순간 이전과는 완전히 광경이 펼쳐졌다.

팟.

세상이 번뜩이지도.

엄청난 폭발도 없었다.

무언가가 몸을 베어 버린다고 느끼는 순간.

“크아아아아악!”

영혼을 소멸시키는 듯한 강렬한 통증에, 알렉산드르의 몸에서 피가 튀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 * *

“웩.”

후두둑.

피를 토해 냈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예전에 죽었어야 할 몸뚱이를 어둠의 마력으로 유지하는 것이고, 어둠의 마력이 계속해서 공급되는 한 알렉산드르는 절대 죽지 않았다.

그렇기에 머리가 날아가도 무사할 수 있었다.

마계의 통로마저 열어 버린 상황이라면, 그야말로 알렉산드르는 무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득한 피를 토해 냈다.

검게 변한 핏물이 입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알렉산드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 어떻게.”

방금의 일격.

존재 자체를 베었다.

육신과 더불어 마력마저 찢겨 나가자, 어둠의 마력으로 유지되는 육신으로는 버텨 낼 수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차갑게 내려보았다.

“결국, 그게 네 한계인 건가.”

단 한 번의 공격.

알렉산드르는 버텨 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알렉산드르는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하나, 공격을 버텨 냈을 뿐 그 이상으로 싸울 여력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가 이보다 더 강하기를 바랐다.

전생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천의 경지에 오르면서 자신을 대적하는 존재가 세상에 없었다.

알렉산드르가 말을 잃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르. 너의 뒤에는 분명히 배후가 존재하겠지. 네게 어둠의 마력을 부여하고, 마계의 통로 너머에서 지상계를 호시탐탐 노리는 존재. 나는 그 존재가 나를 만족시킬 만큼 강하기를 바란다. 그러니 내게 그것에 대한 정보를 부여하라. 처음부터 네 역할은 겨우 그 정도였을 뿐이다.”

확.

환마의 술.

의식을 장악했다.

알렉산드르를 강하게 억압하고, 그의 기억을 빨아들였다.

심연(深淵) 속.

로만 드미트리가, 억겁의 세월을 들여다보았다.

* * *

강압적이었다.

정신이 장악되었다.

알렉산드르는 엄청난 무력감에,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세계를 완전히 내어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라. 내 머릿속의 진실을 들여다보고, 대신 네 정체를 알 수 있는 실마리라도 내게 부여해다오.’

마지막 힘을 끌어올렸다.

정신이 장악되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기억을 읽었다.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저히 알렉산드르의 상식으로는, 무지렁이에 불과했던 김판석의 상식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다.

쿠르르르릉.

정신 방벽(防壁)의 저항이 대단했다.

머릿속을 완전히 내어 주고 영혼을 바쳤는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기억에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인간의 기준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였다.

이와 같은 정신 방벽을 보유하고 있다면, 어떤 정신 마법으로도 로만 드미트리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단 하나만을 노렸다.

대단한 정보가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전생에 보유했을 이름.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특별하게 분류하지 않았을 기억에, 알렉산드르는 애처로울 정도로 악착같이 매달렸다.

그때였다.

머릿속에.

한 이름이 떠올랐다.

‘천마 백중혁.’

순간.

알렉산드르가 눈을 부릅떴다.

천마라는 이름.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감히 상상해서도 안 될 그런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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