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1화 (401/615)

401화 알렉산드르 (6)

백성이라는 단어.

머릿속에 파문이 일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알렉산드르는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천마 백중혁 님입니까?”

“그래.”

“하.”

몸에 힘이 풀렸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아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힘을 끌어모아 반격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는 그럴 수 없었다. 천마 백중혁이란다.

자신이 감히 신과 같은 존재를 상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알렉산드르는 고통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말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였구나.’

그동안.

진실을 확인할 기회는 수차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싸우는 모습을 확인하고도, 알렉산드르는 무공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심했다.

이야기꾼이 천마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놓고, 막상 천마를 마주했을 때는 눈뜬장님처럼 진실과는 무관한 결론을 내놓았다.

무림맹의 맹주, 천마신교의 간부급 인물 등등.

말도 안 되는 추측을 그럴듯하다고 여기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증명했다.

본인도 알았다.

이게 자신의 수준임을.

알렉산드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더라면, 전생의 자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었을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백중혁의 존재감이 주머니를 뚫고 세상을 호령하는 그때, 김판석이 평범한 사내로 살아간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걸 알기에.

욕심을 부렸다.

항상 손에 쥐고 있는 부귀영화가 모래처럼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끊임없이 욕심을 냈고 타오르는 갈증에 시달렸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삶은 전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황제라는 자리에, 오라의 창시자라는 명성에 만족했다면, 마왕의 속삭임은 그를 무너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고개를 들었다.

푸르른 하늘 아래,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이 그를 압도했다.

‘나는 천마 백중혁처럼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현생.

전생과 다르길 바랐다.

백중혁이 사람들의 환호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처럼, 본인도 백중혁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매일 상상만 하던 현실을 새로운 세상에서는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라의 창시자라고 불리던 시절에는, 알렉산드르는 그런 환상에 빠져 손이 피로 물들도록 검을 휘둘렀다.

천마 백중혁은.

알렉산드르에게 그런 의미였다.

꿈꾸는 존재였고, 동경하던 대상이었으며,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단순한 대륙 정벌이 아닌 백중혁과 같이 검 한 자루로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이었다.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갈피를 잃은 알렉산드르는,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하고 말없이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보았다.

‘……지금이라도 내가 동경하던 사람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이미.

늦었다.

자신의 영혼은 마왕의 소유였고,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건을 저질렀다.

차라리 진실을 몰랐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대충 이름 정도만 아는 무림의 고수였다면, 알렉산드르는 이처럼 감정의 동요에 휘둘리는 초라한 꼴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입술이 떨렸다.

힘겹게, 알렉산드르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늦어 버렸군요.”

그 순간.

번뜩.

로만 드미트리가 알렉산드르의 목을 베어 버렸다.

* * *

알렉산드르의 육신은 죽었다.

하지만.

정신은 살아 있었다.

영혼의 일부가 마왕에게 귀속되어 있었기에, 알렉산드르는 영혼의 상태로 마왕을 찾아갔다.

“마왕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이번에 패배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신다면, 패배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죽는 순간.

현실을 받아들였다.

천마 백중혁은 로만 드미트리가 되었고, 그동안 뒤얽힌 관계는 자신이 손을 내민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로 로만 드미트리는 단번에 목을 베어 버렸다.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알렉산드르는 정신을 차리고 현실에 집중했다.

아직도 천마를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했다.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보이며, 알렉산드르는 간곡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내가 한낱 인간에 불과한 너를 나의 종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들었다.

마왕의 모습은 인간과 같았다.

본체는 그렇지 않겠지만, 퀭한 눈빛과 치렁치렁하게 기른 흑발은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네가 차원의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네가 살아 있어야만 차원의 균열이 심해질 테고, 그것만으로도 너를 활용할 가치는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종으로 삼을 이유는 없었다. 내가 너를 받아들인 이유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너의 열등감(劣等感)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르.

재밌는 존재였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이미 우러러볼 만큼의 위치에 올랐건만, 자신의 보잘것없는 근본을 믿지 못하고 매일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것이 마왕의 흥미를 자극했다.

마왕이 악마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알렉산드르는 열등감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조금은 재밌었다. 원하는 것을 주었을 때, 더욱 불안해하는 네 모습은 제법 볼만했//었//거든. 그러나…….”

싸늘하게 웃었다.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발끝에서부터 차례로 괴물의 형태로 변하며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둠으로 물들었다.

거대한 육신에 머리 위로 돋아난 뿔.

갈기처럼 자라난 흑발과 시뻘건 눈빛에, 알렉산드르는 몸을 억죄는 압박감을 느꼈다.

“네 역할은 이것으로 끝이다. 더는 너로 인해 얻을 흥미는 존재하지 않으며, 네가 알렉산드르로서 살아오며 마계와 지상계의 경계는 이미 상당 부분 허물어졌다.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두 차원의 동화는 이루어지겠지. 머지않은 시기에 마계의 통로는 완전히 개방될 것이다.”

곧이었다.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은, 세상이 어둠으로 물드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세상에 너의 자리는 없다.”

* * *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알렉산드르의 영혼이 무저갱(無底坑)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영혼을 소멸시키는 장소.

영혼의 악마들이 주변으로 스멀스멀 몰려드는 상황에, 알렉산드르는 웅크리고 앉아 큭큭 웃었다.

“빌어먹을 새끼. 결국은 날 버리는구나.”

예상은 했었다.

마왕을 위해 살아가며,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차원의 균열을 유도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 목적을 이룬 이후에, 자신을 특별히 살려 둘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매달렸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알렉산드르를 바라보며, 마왕은 그동안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 현실을 말했다.

“크르르르륵.”

“크르르륵.”

악마들이 몰려들었다.

어둠 너머로.

붉은 불빛이 일렁였다.

알렉산드르는 몸을 더욱 웅크리며,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 내질 못했다.

“마왕이여. 너는 나를 이렇게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네가 나의 기억을 읽을 수 없도록, 버림을 받아 죽는다면 그 순간 모든 기억이 소멸되도록. 나는 머릿속에 정신 마법을 걸어 두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로만 드미트리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는 의미지.”

듣는 사람은 없었다.

홀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광기 어린 얼굴로, 붉은 불빛을 마주 보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계의 왕인 너조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과 같은 존재다. 알겠느냐. 네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나는 비록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지만, 앞으로 네가 하려는 일에 나를 버린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캬악!”

“캬캬캭.”

악마들이 달려들었다.

그림자가 스며들듯, 까맣게 일렁이는 악마들이 알렉산드르의 육신을 물어뜯었다.

정확히는 육신의 형태를 한 영혼이었다.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고통에도, 알렉산드르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 댔다.

상상에 빠져들었다.

무림을 호령하던 꿈을 꾸던 그때처럼.

육신이 뜯겨 나가는 현실과는 다르게, 상상 속에서 알렉산드르는 천마 백중혁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환상적이었다.

실물을 확인했기에, 상상은 더욱 뚜렷했다.

현생(現生).

매번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만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완벽한 해방감을 느꼈다.

콰득.

콰드드득.

거침없이 물어뜯는 악마들.

그렇게.

알렉산드르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그 시각.

카이로는 축제 분위기였다.

완벽한 승리였다.

크로노스 제국을 무찌른 상황에,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찬양하며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알렉산드르 황제.

그는 죽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승리했고, 사람들은 벼랑 끝에 몰렸던 전쟁이 반전되었음을 느꼈다.

그날 오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실에 참석한 수뇌부들은, 다들 잔뜩 상기된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알렉산드르를 처리한 덕분에, 전의를 상실한 적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대승입니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는 크지 않은 것에 비해, 적들은 완전히 궤멸했습니다.”

“이 기회를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무려 알렉산드르 황제입니다. 진즉에 죽었어야 할 과거의 망령이 살아 있다는 것은, 크로노스 제국이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 사실을 기반으로 크로노스 제국을 압박해야만 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세상에 알린다면, 발할라 제국으로서도 크로노스 제국을 도와줄 명분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알렉산드르는 흑마법을 사용했다.

죽은 자를 살려 내는 모습을 사람들은 똑똑히 목격했고, 그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대륙의 법도대로라면 금단의 영역을 침범한 이들은 대륙 전부가 합심해서 처벌해야 했다.

발할라 제국으로서는, 방금의 설명처럼 이번 전쟁에 참전할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카이로의 수뇌부가 말했다.

“맞습니다. 휴전 협상을 체결하게 된다면, 알렉산드르의 존재와 흑마법의 사용 여부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당장 전령을 보내, 왕국 연합의 뜻을 알리겠습니다.”

수뇌부들 모두.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그가 알겠다고 말한다면, 이번 전쟁은 이대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 우리는 전쟁을 속행할 것이다.”

“……끝을 보겠다는 말씀입니까.”

다들.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로노스의 남은 세력과 발할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할 텐데, 끝까지 가겠다는 말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지 않았던가.

휴전 협상을 잘 체결한다면, 크로노스 제국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서 안전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쉬운 길이었다.

굳이 어려운 길로 갈 필요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크로노스가 어둠의 힘을 사용했든, 사용하지 않았든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크로노스의 진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헥토르 왕국의 예시만 보더라도 그들을 비난할 증거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들을 건드릴 힘이 없었기에, 그들이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차마 진실을 들출 수 없었다.”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저희가 압박한다면, 크로노스로서도 백기를 내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을 수 없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앞으로 이번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대응이 필요하다.”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할수록.

그들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기회에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무너트리고, 샐러맨더 대륙을 정벌하고자 한다.”

대륙 정벌.

소름이 쫙 돋았다.

범인(凡人)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영역.

회의실에 참석한 수뇌부들이 모두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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