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2화 (402/615)

402화 대륙 정벌 (1)

헥토르.

그곳에서는 매일 처절한 전투가 반복되었다.

뚫으려는 발할라 제국과 막으려는 헥토르 왕국.

무너진 성벽으로 밀려드는 적들의 모습에, 에드윈 헥토르는 서클의 마나를 쥐어짜며 마법을 발현했다.

“파이어 스톰(Fire Storm).”

비틀.

몸이 휘청거렸다.

강력하게 휘몰아치는 화염이 적들을 휩쓸었지만, 순간적으로 마나 고갈 현상이 일어나며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며 버텨 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병사들의 의지가 약해질 것을 알기에, 핼쑥한 안색으로도 강인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방패병들을 투입해 잠시 시간을 벌어라! 천공의 마법사들이 마나를 회복할 시간을 가지고, 다시 한번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헥토르는 그동안 그들만의 전쟁을 치렀다.

드미트리의 지원군이 도착했다지만 전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고, 에드윈 헥토르의 지휘 능력과 천공 마법사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텨 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달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에드윈 헥토르의 모습에, 버틀러가 적군을 베어 내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왕자님!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헥토르 왕국의 근간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국경.

헥토르의 전력을 쏟아부었다.

겨우 한 번의 패배가 아닌 완전한 몰락으로 직결될 수도 있는 상황에, 버틀러는 먼저 후퇴를 제안했다.

헥토르는 할 만큼 했다.

무려 열흘이 넘도록 발할라 제국의 발목을 붙잡은 것만으로도, 그들을 비난할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물러나지 않았다.

버틀러의 시선을 마주 보며, 강렬한 열망을 보였다.

“우리는 물러날 수 없다.”

“왕자님!”

“객기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버틀러. 발할라 제국에게 국경을 내어 주고 물러난다면, 그다음 우리에게는 어떤 미래가 남아 있지? 한 번의 패배는 도미노처럼 우리를 무너트릴 것이다. 그리고 발할라 제국의 행보는 드미트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겠지. 그렇기에 버텨야만 한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승패를 논할 문제가 아니라, 패배하는 순간 왕국의 몰락으로 직결될 것이다.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

팟.

화르르르르륵.

화염을 일으켰다.

성벽 위로 올라서는 적을 불태우며, 에드윈 헥토르는 창백한 안색을 보였다.

“본질을 보아라. 드미트리가 무너진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 크로노스 제국을 막아설 대항마(對抗馬)가 사라진다는 것은, 헥토르가 흉작을 겪었을 때와 같은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버팀으로써 드미트리가 승리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진다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막아 낼 것이다. 설령 헥토르 전체가 화마에 휩싸인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이 헥토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도 알았다.

절망적인 현실을.

에드윈 헥토르는 영리한 사람이었고, 미래를 예상했기에 미련하리만큼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헥토르의 미래.

드미트리가 동반되어야만 했다.

본인들의 야욕을 위해서는 흑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크로노스가 대륙을 정벌했다가는, 헥토르의 백성들은 고통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용납할 수 없었다.

훗날 헥토르의 역사가 자신을 미련한 지도자로 기억한다고 한들, 그는 해야만 일을 감당할 뿐이었다.

번뜩.

버틀러가 적군을 베었다.

이미 피로 흠뻑 물든 그가, 담담해진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왕자님이 어떤 결단을 내리든, 저는 끝까지 왕자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들은.

패배의 역사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헥토르가 나라다운 나라이지 않을 때 권력을 쥐었기에, 그들이 권력자로서 살아온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나라를 버리는 매국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나약한 마음가짐이었다면, 버틀러는 오래전 발할라 제국이 비밀리에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길을 붙잡았을 것이다.

강렬한 의지와는 달리.

현실은 참혹했다.

성벽 곳곳이 무너지며 적들이 계속해서 밀려드는 상황에, 이제 국경은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에드윈 왕자님! 승리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승리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오는 통신병.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통신병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방금 들은 정보를 말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완전히 격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황제를 죽였다는 보고를 방금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 말에.

‘아직 끝나지 않았다.’

꽉.

에드윈 헥토르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 * *

드미트리의 승리.

전세(戰勢)가 뒤바뀌었다.

한순간에 왕국 연합이 분위기를 잡았고,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곧바로 화상 회의가 진행되었다.

남부 삼국.

헥토르.

카이로.

드미트리.

주요 인물들이 모두 참석했다.

사전에 회의의 내용을 전달받았기에, 레드포드 국왕이 먼저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정말 이대로 전쟁을 속행하실 생각입니까. 전쟁이란, 결국은 제 살을 갉아먹는 일입니다. 크로노스가 빌미를 제공한 상황을 살리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저도 레드포드 국왕과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전력은 아직 건재합니다. 제국의 만행은 벌을 받아 마땅하나,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움베르토 국왕도 말을 보탰다.

충언(忠言)이었다.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물러나려는 것이 아닌, 정말 필요한 일인지에 대한 의문을 보였다.

대륙 정벌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상대로 적당한 자리를 마련한다면 전쟁을 이대로 끝낼 수 있지만, 벼랑 끝으로 밀어낸다면 독 안에 든 쥐는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제가 이번 기회를 살리고자 하는 이유는 크로노스와 발할라 모두 지휘 체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발할라는 황제를 잃었습니다. 반란이라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겨우 평화를 되찾은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혼란에 그들은 전장으로 내몰렸습니다. 현재 발할라를 이끄는 스노딘 백작은 발할라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임시로 황제 대행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크로노스의 진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백성들을 이끌 힘은 없습니다.”

대륙 정벌.

감정적인 판단이 아니다.

상황을 되돌아보고, 충분히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크로노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크로노스는 황제를 중심으로 단단한 권력을 형성해 왔으나, 알렉산드르가 본인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큰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동안 크로노스를 지배했던 황제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당분간은 내부에 분란이 생기겠지요.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혼란은 안정될 것이고, 새로운 권력 체계에서 살아남고자 또 다른 위험 요소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모래성이 되어 버린 두 제국을 무너트린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위험을 모두 제거할 수 있습니다.”

화면 모두.

각 나라의 대표들이 말을 삼켰다.

동감했다.

확실히 좋은 기회였으나,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에 선뜻 따를 수는 없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에드윈 헥토르였다.

이미 그의 충성을 받아 냈지만, 공적인 자리이기에 로만 드미트리도 예를 갖추었다.

“말씀하십시오.”

[저 또한 좋은 기회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현재 왕국 연합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자국의 영토에서 적들을 막아 내는 것은 가능하나, 국경을 넘을 여력은 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두 제국을 무너트릴 생각입니까. 적의 영토에 들어서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타당한 물음이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만약 에드윈 헥토르의 물음에 완벽하게 대답한다면,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따를 생각이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알렉산드르를 쓰러트린 순간.

상황이 변했다.

“알렉산드르는 9서클 마법사였습니다. 그런 존재를 쓰러트린 지금, 적들에게 ‘저’라는 존재가 어떻게 비추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지금부터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할 것입니다.”

두려움.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치명적인,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무기였다.

* * *

며칠 뒤.

크로노스 국경에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새롭게 국경의 수비를 맡은 지휘관 로렐로 남작은, 적들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걸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얼마 전.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알렉산드르와 관련한 문제는 확인하고 있으니, 일단 어떻게든 드미트리의 공격을 막아 내라는 명령이었다.

로렐로 남작으로서는 속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들려온 소식대로라면 상대는 전장의 악마였지만, 그렇다고 로렐로 남작은 순순히 길을 열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이곳에 배치된 이유.

로렐로 남작은 극성의 애국자였다.

막막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미련하게 자리를 버틸 사람이기에 새로운 지휘관으로 배정되었다.

그와는 달리.

병사들은 불안에 떨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착착착착.

왕국 연합의 병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로만 드미트리였다.

사람들의 불안감이 팽배해지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성벽 위를 훑어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드미트리의 로만 드미트리다. 지금부터 1시간 뒤에 나는 너희를 공격할 생각이다. 성벽을 무너트리고, 보이는 모든 적을 도륙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너희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성벽 위.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기회라니.

그들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현 크로노스 황제는 알렉산드르의 꼭두각시였다. 알렉산드르는 영생(永生)을 살아가며 흑마법에 손을 댄 악마였고, 그는 그동안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너희에게 묻겠다. 크로노스의 진실을 알고도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인가.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영혼마저 바치는 악마를 위해 싸울 생각이라면, 무기를 들고 그 자리를 지켜라.”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알렉산드르의 존재는, 현재 크로노스를 혼란에 빠트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원한다면. 1시간 안에 성문을 열어라. 만약 너희가 굳게 닫힌 성문으로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면, 그때는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로만 드미트리는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 * *

성안.

두 개의 파벌로 나누어진 사람들이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다.

반대파가 말했다.

“절대 성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백성입니다. 성문을 열고 드미트리를 안으로 들인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버린 매국노의 미래는 처참할 뿐입니다. 당장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만약 휴전 협상이라도 체결하는 날에는 우리는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혀 이도 저도 아닌 신세가 될 겁니다.”

“끝까지 싸웁시다. 이곳은 제국의 영토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제국을 믿었다.

대륙 제일의 강대국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아직은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한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다들 미쳤습니까?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9서클 마법사인 알렉산드르를 단숨에 베어 버리고, 수십만의 제국군을 도륙한 괴물입니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대체 어떻게 버티겠다는 겁니까. 다들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장담하건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곳은 무너질 겁니다.”

그의 이름.

헤르만이었다.

크로노스 제국 출신의 병사인 그가,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크로노스 제국의 전력이 건재할 때도, 크로노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가 대승을 거둔 이후에 병력을 이끌고 국경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목적은 저번과 같은 단순한 휴전 협상이 아닙니다. 크로노스를 끝내 버리겠다는 작정으로 찾아온 그를 상대로, 미련하게 애국을 외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말조심하거라!”

사람들 사이로.

로렐로 남작이 나타났다.

치열한 설전을 듣고 있던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의 유구한 역사는 항상 승리로 장식되어 왔다. 나는 이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불리한 상황이지만, 멤피스 후작님이 결사의 항전을 명령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걸음을 옮기며,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우리는 크로노스다. 대륙의 지배자고, 드미트리 같은 녀석들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살 수 없는 포식자다. 그런데 항복을 유도하는 말에 흔들린다면, 현재의 크로노스를 이룩한 선조들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싸워라. 지켜라. 우리가 목숨을 걸고 크로노스를 위해 헌신한다면, 대륙 제일 강대국으로서의 영광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찬란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크로노스의 진실이 무엇이든.

로렐로 남작은 나라의 안위를 우선으로 두었다.

드미트리에게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것은, 그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걸음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분주하게 수성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푹.

“……?!”

로렐로 남작이 눈을 부릅떴다.

시선을 내리자.

빨갛게 물든 가슴과 툭 튀어나온 검 끝이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악에 받친 헤르만이 등을 찌른 모습이 보였다.

“로렐로 남작님. 우리는 일개 백성일 뿐입니다. 애국을 부르짖는다고 해서, 크로노스의 영광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일단 살아야겠습니다.”

털썩.

로렐로 남작이 쓰러졌다.

그로부터 번지는 피에, 충격받은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차마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헤르만이 검을 뽑았다.

거칠게 피를 털어 내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 이대로 죽기 싫다면, 당장 성문을 열어!”

겨우 30분.

로만 드미트리가 예고한 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크로노스는 성문을 활짝 열어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것은.

크로노스의 수뇌부들로서는 예상할 수 없는 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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