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대륙 정벌 (7)
타닥타닥.
폐허가 되어 버린 땅에 불꽃이 피었다.
케빈은 피곤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에드윈 헥토르의 모습을 발견했다.
“수색조는 생존자를 확인하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할 공간을 확보하라.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할 것이다.”
이번 전투.
그야말로 완승이었다.
장피에르 백작은 시종일관 이리저리 휘둘리다 목이 날아갔고, 이후에 요새를 점령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에드윈 헥토르의 계획대로였다.
적들을 어떤 방법으로 공략할지, 적들의 움직임에 따른 대응 방법 등등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며칠 전.
에드윈 헥토르는 케빈에게 계획을 말해 주었다.
“적들을 공격하기에 앞서, 우리는 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현재 소집령에 포함되지 않은 자들은 절대 물러서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결사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을 그들에게, 왕국 연합이 세 개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은 기회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부분을 공략해야 합니다.”
촤르르륵.
지도를 펼쳤다.
장피에르 백작이 버티는 요새를 제외하고도, 아직 병력이 건재한 세 개의 영지가 표시되었다.
이와 같은 정보들은 모두 하오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들은 피난민들 사이에 녹아들었고, 비밀리에 정보를 보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전달했다.
“지금부터 계획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케빈 님은 수로를 통해 장피에르 요새에 진입할 것입니다. 적들은 만반의 준비를 했을 테니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경비병들을 대놓고 처리한 뒤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신호탄을 터트리십시오. 그렇다면 적들로서는 때마침 왕국 연합의 군대가 시야에 보이는 상황에서, 내부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생각에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상황을 지켜볼 것입니다. 적들이 밤잠을 설치도록 만들면서 체력을 갉아먹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부여한다면 장피에르 백작으로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 무너지느니 지원군을 불러들여 반격을 시도해 보자. 이곳에 로만 드미트리 님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안일하게 만들겠지요.”
에드윈 헥토르는 손을 뻗어 말을 집었다.
주변 세 영주를 상징하는 말을 옮긴 뒤에, 협소해 보이는 길목에 내려놓았다.
“주변 영주들이 이동할 수 있는 최단 거리 이동 경로입니다. 그들이 병력을 합쳐 빠르게 이동하길 바란다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기회입니다. 환영(幻影) 마법으로 왕국 연합의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속인 뒤에, 본대는 이곳에서 매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적들이 도착한다면 지리적인 이점과 마법을 활용해서 격퇴. 이 소식이 장피에르 백작에게 전달되고 요새를 공격할 준비를 끝냈을 때, 케빈 님이 직접 움직여 적의 성문을 열면 됩니다. 그동안 쌓인 피로와 주변 영주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으로 인해, 그들은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감탄했다.
모든 상황.
에드윈 헥토르는 미래를 예견하는 것처럼 상황을 들여다보았고, 케빈은 그를 믿고 작전에 나섰다.
사실 그의 역할은 매우 위험했다.
수로를 통해 내부로 진입해서 며칠을 버텨야 하고, 적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을 뚫고 성문을 여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드윈 헥토르는 이 상황을 재밌다고 표현했다.
헥토르의 전력으로는 절대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작전이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다룬다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그리고.
계획은 성공했다.
단 며칠 만에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켜 버린 상황에, 케빈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런 지휘관과 함께라면. 우리가 크리스 님보다 더 빠르게 수도에 도달할 수 있다.’
불타오르는 경쟁의식.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갈증에, 케빈은 한참이나 생존자를 찾아 주변을 배회하고 다녔다.
* * *
그 시각.
크리스가 이끄는 2군은 아직도 행군의 연속이었다.
대부분 요새를 비우고 후퇴했기 때문이었고, 먼저 전공을 세웠다는 소식이 크리스의 귀에 전해졌다.
“대단하네요. 벌써 주변 영주들을 정리해 버리다니. 사람들이 왜 헥토르의 별을 고평가하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그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지 않았어도, 분명히 성공했을 인물입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펠릭스였다.
크리스는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에드윈 헥토르의 능력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었기에, 그가 드미트리와 같은 강군(強軍)을 지휘한다면 시너지가 대단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전략을 완벽하게 성공시킨 케빈의 활약상에, 크리스는 오히려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이제 드미트리에 어울리는 검사가 되었구나. 하지만 절대 내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은 없다. 너희가 아무리 초반부터 치고 나간다고 한들, 수도에 먼저 도착하는 것은 우리일 것이다.’
“모두 멈추어라.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날이 어느새 저물었다.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령한 뒤에, 크리스는 자신을 따라나선 수뇌부들을 불러들였다.
펠릭스가 물었다.
“정보에 의하면, 이틀 거리에 있는 요새에 적들이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만약 일반적인 공성전을 시도한다면, 우리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현재로서는 정공법(正攻法)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지도를 보았다.
현 위치에서 수도까지.
남쪽으로 돌아가는 이동 경로에는 조심해야 할 포인트가 세 곳 정도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적군과의 전투에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면, 크리스가 이끄는 2군은 제일 늦게 수도에 도착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로서는 원하지 않는 그림이었다.
케빈과의 경쟁 구도를 떠나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소모한다면 왕국 연합으로서는 모든 병력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고로.
전략이 필요했다.
크리스의 시선이 ‘크로이트’라고 표시된 영역에 머물렀다.
“남부에 남은 자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집령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멤피스 후작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전쟁 포로 사건이 있었을 무렵. 한때 크로노스 제국의 권력자로 평가받았던 크로이트 후작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유는 항명에 의한 즉결 처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진실은 황제의 명령이 아닌 멤피스 후작의 독단적인 결단이었습니다.”
“그 말은…….”
“예. 지금부터 우리가 상대해야 할 이들이 바로 크로이트 후작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크로이트 후작의 죽음으로 갈피를 잃었습니다. 멤피스 후작에 대한 반발감에 소집령은 응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왕국 연합에 타협할 수는 없으니 서로 뭉친 것이지요. 우리는 그들의 마음에 생겨난 균열을 공략할 것입니다. 스스로 성문을 열게 만든다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수도로 직행할 수 있습니다.”
“아!”
수뇌부들이 감탄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무력으로 인정받았던 존재가, 지략(智略)마저 증명하는 상황에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한 수뇌부가 물었다.
“만약 적들이 타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때는 간단합니다.”
표정이 변했다.
크리스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협상을 위해 한자리에 몰아넣은 뒤, 적들을 한 번에 일망타진할 것입니다. 협상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배려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 * *
시간이 흘렀다.
매일 밤낮이 바뀔 때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소식에, 멤피스 후작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장피에르 백작과 주변 영주들이 모두 전멸당했습니다!”
“후작님!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던 크로이트 후작의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왕국 연합에 투항했습니다. 남부가 완전히 먹혔습니다. 그들이 이제 수도로 밀고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전부 다.
패전(敗戰) 소식이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멤피스 후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간의 패배.
이해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마저 쓰러트린 괴물이기에, 그를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크리스와 에드윈 헥토르는 얘기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 전장에서는 반드시 크로노스가 승리해야 하건만, 들려오는 소식은 충격적일 정도로 참담한 패배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밀렸다.
왕국 연합은 세 방향으로 빠르게 밀고 들어왔고, 아무리 수도에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한들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대로라면 크로노스 제국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 그가 정체를 밝힌 것이 문제였어.’
오라의 선구자.
한때는 크로노스를 대표했던 존재가 시궁창에 처박히면서, 크로노스 제국의 내부가 어수선해졌다.
그리고 현 황제를 따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 마탑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마법사들의 실종 사건에 크로노스가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더는 크로노스와 공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때부터였다.
크로노스가 휘청거렸다.
제국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절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크리스와 에드윈 헥토르.
양방향에서 병력이 밀고 들어오는 지금, 멤피스 후작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아니었다.
부관이 말했다.
“최후의 보루마저 함락당했습니다. 앞으로 며칠 안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이끄는 본대가 수도 인근에 도달할 것입니다.”
곧.
그가 나타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크로노스를 재앙에 빠트린 괴물이.
멤피스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아주 잠시라도 현실을 외면했다.
* * *
마침내.
크로노스의 수도가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어려운 길을 택했지만, 다른 부대보다도 먼저 목적지에 도달했다.
일단 병사들을 대기시켰다.
그러고는.
홀로 수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로만 드미트리다.”
“그가 나타났어.”
“빌어먹을.”
성벽 위.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다.
전장의 악마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다리가 후들거렸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지고 말았다.
크로노스는 만반의 준비를 끝냈고,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나약한 마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병사들을 둘러보며, 목소리에 마나를 실었다.
“마지막이다. 투항하라.”
짧은 말.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달콤한 제안도.
구구절절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짧게 메시지를 전달한 로만 드미트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수많은 시선을 마주했다.
한 1분 정도 흘렀을까.
크로노스의 병사들로서는 마치 억겁(億劫)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자, 로만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이제 기회는 없다.”
그것을 끝으로.
별다른 말 없이 걸음을 돌렸다.
점차 시야에서 멀어지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그제야 차가운 현실을 직시했다.
정말 끝이었다.
죽거나, 살거나.
그들에게 이제 선택할 기회는 없었다.
* * *
며칠 뒤.
크리스와 에드윈 헥토르의 부대도 합류했다.
단 하루 차이로 크리스가 먼저 도착했지만, 크리스와 케빈 모두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며칠이나 일찍 도착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
본인들이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간접적인 대결은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크로노스가 있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철옹성(鐵甕城)이 단단히 버티고 있는 모습에,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회의가 진행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우리는 이틀 뒤. 크로노스의 수도를 무너트릴 것이다.”
“정공법을 택하실 생각입니까?”
크리스였다.
크로노스.
이대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의 전투와는 다르게 하루 이틀로 결판나지 않을 것이며,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감당해야만 했다.
멤피스 후작과의 종전 협상을 거절한 그때부터. 피를 흘리지 않고 수도를 함락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니. 수도를 공격하기 전, 우리는 그들을 혼란에 빠트릴 것이다. 루카스.”
“예.”
회의실 한편.
루카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크리스와 같은 주요 간부들도,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루카스가 말했다.
“지금부터 정보 길드에서 비밀리에 진행해 왔던 작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
크로노스와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
루카스는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하나의 명령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