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크로노스의 몰락 (1)
수도 경비대장.
알바로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모래 폭풍에 휘말리며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크로노스가 자랑하는 철옹성이.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한쪽 벽면이 내려앉아 휑한 공간을 드러냈고, 그 주변으로는 성벽 잔해에 깔린 사람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눈이 팽팽 돌았다. 크로노스는 이번 전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그 어떤 공격도 버틸 수 있다고 장담했건만, 마법 병기도 아니고 검 한 자루에 당하고 말았다.
상식 밖.
상식의 세계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압도적인 광경에, 알바로는 잠시 넋을 잃었다.
‘방금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우리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떻게든 단단한 성벽을 앞세워 최대한 장기전으로 이어 나갈 생각이었지만, 백병전이 시작된다면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겠지.’
이를 악물었다.
알바로가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맞았는지 이마에서 피가 흘렀지만, 미칠 듯이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멀리서 왕국 연합 병사들이 밀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한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기에, 알바로로서는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의 마법사들이여. 너희가 나설 차례다.”
스스스.
그 말에.
검은색 로브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크로노스 제국은 자력으로 마법사들을 육성했고, 알렉산드르의 가르침을 받아 ‘흑마법사 집단’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외적으로 절대 공개돼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알바로의 권한으로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현재 명령권자인 멤피스 후작은 자리에 없었다.
고로.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알렉산드르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크로노스가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상태였다.
알바로로서는 복잡한 문제보다는 일단 제국의 안위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크 웨이브(Dark wave).”
“다크 웨이브.”
확.
쿠르르르르르릉.
흑마법사들이 마력을 분출했다.
그들로부터 피어오르는 어둠의 마력이 파도처럼 일어났고, 성벽 밑으로 콸콸 쏟아지며 왕국 연합의 병사들을 그대로 쓸어 버렸다.
어둠의 마력에 쓸려 나간 사람들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그나마 마나를 사용할 줄 아는 이들은 어둠의 마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했지만, 그렇지 못한 존재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물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하나둘씩 쓰러졌다.
이어서.
“서먼 좀비(summon zombie).”
“나오너라, 망자들이여.”
죽은 사람들.
그들이 붉은 안광을 빛냈다.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금까지 동료였던 존재들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캬악!”
“적들이 흑마법을 사용했다!”
“침착하게 대항하라!”
순식간에 성벽 밖이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흑마법은 한 명의 마법사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야말로 살상에 특화되어 있는 마법이다.
단 두 번의 마법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다크 웨이브의 힘으로 사람들의 생기를 앗아 가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다시 망자로 살려 내고.
흑마법사들이 보여 주는 강력한 마력에, 알바로는 제 위치를 찾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위치로! 성벽을 사수하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성벽은 일부가 무너졌을 뿐, 로만 드미트리가 직접 공격하지 않은 곳들은 성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전장은 제한적이었다.
무너진 공간만 잘 틀어막는다면, 그사이에 멤피스 후작과 지원군이 도착한다면. 어떻게든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일단의 무리가 망자들을 헤쳐 나옴과 동시에, 하늘에서 밝은 빛이 번뜩였다.
“블레스(bless).”
쿠르르르르릉.
신의 축복.
그것은 바로 신성력이었다.
* * *
신성력의 주인.
루나의 사제들이었다.
그들은 두 손을 모은 채로, 찬란하게 내리쬐는 신성력 아래에서 그 힘을 증폭시켰다.
“블레스.”
“신의 힘으로 어둠을 밀어 내리라.”
화악.
불과 몇 년 전.
그들은 지금처럼 신성력을 발현하지 못했다.
사실상 루나 교단은 성녀 이사벨을 모시는 집단이나 다름없었는데, 최근 들어 루나의 사제들이 사용하는 힘이 강해졌다.
마더 엘프는 차원의 균열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각 차원은 경계선을 통해 명백하게 나누어져 있는데, 마계가 지상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현하면서 신을 모시는 사제들도 자연스럽게 신성력이 증폭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이사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제들의 힘만으로도, 흑마법사들이 발현하는 어둠의 마력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다.
사악-
어둠이 밀려났다.
왕국 연합 병사들의 몸에서 은은한 불빛이 일어났고, 신성력의 축복으로 인해 더는 어둠에 물들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망자들의 힘도 약해졌다.
신성력에 그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물러나자,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단번에 망자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죽어!”
퍽.
반격의 시작이었다.
하나둘.
상황이 역전되었다.
어둠의 마력을 이겨 낸 병사들이 빠르게 망자를 정리했고, 새로운 망자를 생산하지 못하니 흑마법사들의 마법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흑마법사들은 연달아 추가 마법을 사용했다.
공격적인 마법으로 후속타를 시도했으나, 그때는 에드윈 헥토르가 상대의 존재를 포착한 뒤였다.
“파이어 레인(Fire Rain).”
화륵.
화르르르르륵.
하늘 위에서.
불비가 떨어져 내렸다.
흑마법사들은 공격 마법을 중단하고 방어 마법을 사용했으나, 펠릭스가 추가 마법을 사용하자 성벽 위의 존재들이 단번에 쓸려 나갔다.
흑마법사들은 알렉산드르가 아니었다.
에드윈 헥토르와 펠릭스가 버티고 있는 이상, 마법적인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의 마법 전력.
대륙을 기준으로도 최상위였다.
흑마법사들이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알바로가 바라지 않는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공격하라!”
“주군을 따르라!”
이번에도 어김없이.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한 그의 사병들이, 그대로 무너진 성벽을 통해 안으로 들이닥쳤다.
* * *
선봉을 따르는 병사들.
망설임이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먼저 적들과 맞닥트리고 나면, 그 이후의 상황은 그들에게 강한 확신을 주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섬멸(殲滅).
천마검법이 휩쓴 공간은 모두 폐허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고 달려들던 적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모든 시선은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그렇기에 드미트리의 사병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전생의 신과 같이한다는 생각에, 그들은 사방으로 퍼져 간신히 살아남은 적들의 숨통을 끊었다.
“크악!”
“컥!”
그중.
단연 발군은 케빈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재앙을 피한 존재들은, 뒤이어 들이닥치는 드미트리의 악귀를 마주했다.
“주, 죽어!”
제국군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창백해진 얼굴로 창을 찔러 넣었으나, 케빈은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공격을 흘려보내더니 상대의 가슴팍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케빈은 병사들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무차별적으로 살육을 벌였고, 로만 드미트리와 떨어진 공간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푸확.
부르르르.
기사가 몸을 떨었다.
그대로 무너지는 동료의 모습에, 크로노스의 기사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협공하라!”
“상대는 드미트리의 악귀다. 일단 로만 드미트리를 버리고, 이 녀석을 먼저 처리하라!”
전략을 바꾸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논외의 존재였다.
도저히 그를 쓰러트릴 방법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자, 크로노스의 기사들은 그나마 승산이 있어 보이는 케빈을 공략했다.
케빈이 더 날뛰게 두었다간 피해가 만만치 않을 터.
사방에서 철그럭, 철그럭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십의 기사들이 일제히 케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죽어!”
수십의 기사들.
그들은 모두 오라 검사였다.
5성부터 3성까지 제각기 스스로를 뛰어난 검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케빈의 존재를 인정하고 협공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방이 반짝거렸다.
강하게 휘몰아치는 오라의 폭풍은 단번에 케빈의 존재를 휩쓸어 버릴 것 같았지만, 케빈의 움직임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과감했다.
탁.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 한복판.
폭풍에 발을 디뎠다.
사방을 찢어발기는 폭풍 속에서 용케 공간을 찾았고, 순간 드러난 상대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번뜩.
“크악!”
그것은 마치.
짐승과도 같았다.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상대의 가슴팍을 물어뜯더니, 다시 한번 오라의 폭풍 속으로 사라지며 자신을 향해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숨이 턱턱 막힐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케빈은 그동안 수많은 전장을 경험하며, 이 정도의 상황은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이건.
위험한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현란하고 기민하게 공격을 하나하나 피해 내더니, 항상 마지막에는 예상치 못한 사각을 공략했다.
퍽.
이번에도.
기사의 머리가 날아갔다.
케빈은 피로 흠뻑 물든 얼굴로 마주하는 적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끝이 보였다.
마지막 남은 기사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달려들자, 케빈은 단번에 그의 팔 한쪽을 날려 버렸다.
번뜩.
팟.
피가 튀었다.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케빈을 상대로는 분명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건만,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순간을 머릿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국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이다.
크로노스 제국의 기사로서 살아가며,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고 비겁하게 협공하고도 패배하는 이런 초라한 결말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사, 살려 주십시오.”
털썩.
무릎을 꿇었다.
빌었다.
아직 전쟁은 한창이었다.
주변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기사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에 자신도 모르게 항복을 말해 버렸다.
그렇게라도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노력해서 일구어 낸 삶이, 이토록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케빈이 이죽거렸다.
“그러게,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번뜩.
그대로 머리를 날려 버리는 검.
케빈은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돌리며, 따라잡지도 못할 만큼 멀어진 로만 드미트리의 흔적을 천천히 따라 걸었다.
* * *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시야가 닿는 곳곳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알바로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앙!
‘……이걸 막는다고?!’
불타오르는 오라.
알바로는 무려 5성의 오라 검사건만, 일반 병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리면서도 오라를 막아 냈다.
정말 눈이 돌아갈 것 같은 상황이었다.
1성의 오라는 2성의 오라보다 약하고, 2성의 오라는 3성의 오라보다 약하고, 3성의 오라는 4성의 오라보다 약한 것이 알렉산드르가 창조해 낸 오라의 체계다.
그런데.
자신에 비해 조잡하다고 표현할 만큼의 오라로 공격을 막아 내는 병사의 모습에, 알바로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버러지 같은 새끼가!”
카앙!
카카카카캉!
병사를 몰아붙였다.
대륙 제일의 검사인 로만 드미트리도, 드리트리의 섬광인 크리스도, 드미트리의 악귀인 케빈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얼굴 하나 알아보지 못할 일반 병사. 그를 상대로 알바로는 숨 가쁘게 몰아붙였다.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모습이 그의 속을 박박 긁었고, 드미트리의 사병들이 드미트리 내에서 어떤 위상을 지녔는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상대는 일반 병사일 뿐이었다.
그가 착용하는 복장이 그 사실을 증명하건만, 그를 단번에 쓰러트리지 못해 속이 뒤집혔다.
팟.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상대가 목숨을 걸고 날린 일격을 흘려보내자, 알바로는 마침내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오라를 부쉈다.
상대의 검을 부서트리며 가슴팍을 베어 버렸고, 그 와중에도 끝까지 발악하는 병사의 숨통을 악에 받친 얼굴로 끊어 버렸다.
상대의 몰골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오라에 갈기갈기 찢겨 버린,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해진 몰골에 알바로는 뒤늦게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후욱, 후욱.”
승리의 기쁨?
그딴 건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일반 병사를 상대로도 이렇게 고전하는 자신의 모습에, 그는 뒤늦게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했다.
‘이게 드미트리라니.’
그제야 알았다.
그간의 전쟁.
드미트리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논외의 존재를 배제하더라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능력도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이미 끝난 전쟁이었다.
그동안 단단히 준비해 두었던 성벽이 무너지고 흑마법이 먹히지 않은 순간부터, 드미트리를 필두로 몰아치는 왕국 연합의 공격을 막아 낼 방법은 없었다.
도대체.
드미트리는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제국을 궁지에 몰아넣을 만큼 강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바로가 황급히 물러났다.
서로 뒤얽혀 있는 전장에서 최대한 물러나더니, 그는 부관을 불러들여 유일한 희망을 찾았다.
“멤피스 후작님은! 멤피스 후작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지?!”
전투 전.
황궁이 공격당했다는 보고에, 멤피스 후작은 빠르게 병력을 동원하고 그곳을 지원하기 위해 사라졌다.
추가 보고에 의하면.
침입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돌아와야 했다.
자신이 아니라 멤피스 후작이 이 상황을 진두지휘해야 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라면 자신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정예 병력 또한 멤피스 후작을 따라갔다.
그들의 도움이 간절한 상황에, 알바로는 절박한 표정으로 통신을 맡은 부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부관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알바로가 바라지 않는 최악의 대답을 말했다.
“……십수 번을 연락했는데 단 한 번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래도, 멤피스 후작님은 항전을 포기하고 몸을 피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우뚝.
알바로는 모든 사고 회로가 멈추었다.
항전을 포기하다니.
그건 정말,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최악의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