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1화 (411/615)

411화 크로노스의 몰락 (2)

조금 전.

폭발음을 듣고 황급히 움직이던 멤피스 후작은, 수도 경비대로부터 믿을 수 없는 보고를 들었다.

[멤피스 후작님! 로만 드미트리가 오라를 일으켜 성벽을 무너트렸습니다! 성벽의 균열이 전체적으로 퍼진 상태라, 시간을 끈다고 해서 보수를 진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농성(籠城)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현장에 오셔서, 저희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걸음을 멈추었다.

전신을 관통하는 서늘한 기운에, 멤피스 후작은 보고 내용을 되새겼다.

“……성벽이 무너졌다고?”

충격적이었다.

크로노스는 이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성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고받은 내용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성벽을 단숨에 무너트릴 만큼 강하다는 것이고, 크로노스 제국은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했다.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로서는 드미트리가 시도한 작전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노동자들을 이용해 성벽을 무너트렸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확실한 것은 농성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작전은 성벽의 건재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성벽이 무너져 버렸다면, 크로노스에게 승산이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불가능했다.

전쟁은 끝났다.

알렉산드르를 죽이고, 성벽마저 무너트린 괴물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들었다.

‘만약 이대로 크로노스가 패배한다면. 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도.

본보기로 처형될 확률이 높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런 인물이었다.

적어도 그와 대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명령권자들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살아남은 예가 없었다.

바르코, 베네딕트 후작, 발할라 황제 등등.

타협의 여지를 허락했을 때 받아들였다면 모르겠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자가 간절하게 빌어 대는 소리 따위는 먹히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민심보다는 확실한 선례였고, 그렇게 로만 드미트리의 적들은 모두 죽었다.

‘사실상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성벽이 무너진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할 방법이 없다면, 결국은 그 한 존재로 인해서 모두 죽고 말겠지. 성벽에 합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몰락하는 크로노스 제국을 위해, 내가 그들을 살리겠다고 목숨을 바칠 이유는 없다.’

“……후작님?”

가문의 기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를 보며.

멤피스 후작이 말했다.

“우리는 성벽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상황을 보고도 몰라?! 로만 드미트리가 성벽을 무너트렸다. 드미트리의 악마가, 지금 우리를 죽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결사의 항전 따위는 의미가 없다. 일단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도망가실 생각입니까? 저희에게 퇴로는 없습니다.”

그제야.

현실을 직시했다.

유일한 퇴로는 비밀 통로였다.

크로노스 황제를 앞세워 이동한다면 그곳을 통해 도망칠 수 있었겠지만, 생각해 보니 직접 명령을 내려 퇴로에 독가스를 뿌리고 폐쇄해 버렸다.

드미트리의 작전은 의도적이었다.

비밀 통로에 연기를 보내서 전력을 분산시킴과 동시에, 크로노스가 알아서 퇴로를 차단하도록 판을 만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대체.

로만 드미트리는 어디까지 계획했던 말인가.

자신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 오는 상황에, 멤피스 후작은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생각해야만 했다.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을.

마법 통신기에서는 계속 응답을 바란다는 말이 들려오고, 자신을 따르는 기사 중 일부는 이 상황을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전혀 상관없었다.

머리를 쥐어짜 내던 멤피스 후작은, 문득 알렉산드르가 빙의했던 크로노스 황제가 종종 찾았던 장소가 떠올랐다.

“그래, 밀실(密室)! 바로 그곳이야!”

확신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크로노스에 들이닥친 폭풍에 대항할 것이 아니라, 잠시 몸을 숨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참담한 현실이었다.

멤피스 후작이 도주했다는 사실에, 수도 경비대장 알바로는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이런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 혼자 살겠다고 나라를 버리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가 바라보는 시야에는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직접 상대해 보고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다.

처음에는 같은 인간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싸운다면 승산이 있다고 믿었지만,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상대하면서 그는 드미트리가 더는 변방의 약소국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강했다.

드미트리의 강병(剛兵)들은, 웬만한 기사들조차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였다.

“네가 지휘관인가.”

저벅저벅.

누군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자 날카로운 눈매와 인상적인 금발이 보였고, 그로부터 풍기는 살벌한 기세에 드미트리의 섬광(閃光)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순간 피가 마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와 같은 녀석은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라면 나쁘지 않은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수도 경비대장 알바로다.”

꽉.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죽더라도.

전과는 남기고 싶었다.

수도 경비대장 알바로가 드미트리의 섬광을 죽였다는 사실 하나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처참하게 죽을지라도 이름을 남기고 갈 것이다.

눈빛이 매섭게 번들거렸다.

크로노스 황제는 알렉산드르의 꼭두각시였고, 그나마 크로노스를 이끌던 멤피스 후작은 비겁하게 도망쳐 버렸다.

이 나라는 끝났다.

상대를 예의주시하던 알바로는, 크리스가 한 걸음 다가오자 순간적으로 오라를 폭발시켰다.

“그리고 널 죽일 사내이기도 하지!”

팟.

콰르르르르르르릉.

폭발적이었다.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들었고, 알바로의 검에서 분출되는 오라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퍼져나갔다.

오라의 범람(汎濫)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알바로는 전신에 퍼져 있는 마나를 모조리 긁어모았다.

그를 죽이고.

본인도 죽을 것이다.

크로노스가 대륙을 평정하던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힘으로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번뜩.

퍽.

알바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크리스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예리한 틈을 파고들어 상대의 머리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일섬(一閃).

더욱 빨라졌다.

아레스를 상상하며, 케빈을 상상하며, 크리스는 자신을 갈고닦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동료들의 성장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공은 단순히 육체만을 단련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의 정신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서면서, 알바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상대의 공격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크리스가 걸음을 돌렸다.

목이 탔다.

케빈보다도 더.

그는 자신을 드러내길 바랐다.

* * *

크로노스가 전의를 잃었다.

시작부터 성벽이 무너지고, 멤피스 후작은 보이지 않았으며, 알바로는 더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전장으로 내몰렸기에 싸울 뿐. 그들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강한 열망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알았다.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급격하게 변하는 전쟁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했다.

‘아직도 멤피스 후작이 보이지 않는다. 크로노스 황제가 허수아비라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제일 발언권이 강한 명령권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전쟁을 포기하고 도망쳤다는 의미겠지.’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눈에 보였다.

지휘관을 잃어버린 적들의 혼란이.

그렇다면 드미트리로서는, 더는 피해를 각오하면서까지 아득바득 전투를 이어 갈 필요가 없었다.

‘천검.’

하늘 위로.

오라가 솟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더니, 신의 심판이 떨어지듯 눈앞의 공간을 단번에 쓸어 버렸다.

콰앙!

콰콰콰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사람들, 살아 보겠다고 도망치던 사람들, 어떻게든 대항하고자 오라를 일으키던 사람들 등등. 모조리 소멸되었다.

무차별적인 오라의 분출은 개개인을 상대로는 그렇게 강력한 수법은 아니나, 크로노스 제국의 사람들은 오라에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그 파괴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천외(天外).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정적에, 로만 드미트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너희의 지휘관인 멤피스 후작은 도망친 상태이며, 그 누구도 너희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너희에게 묻겠다. 크로노스 황제도, 너희를 이끌 지휘관도 존재하지 않는 전장이다. 대체 너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이냐.”

물음을 던졌다.

순간.

전쟁이 중단되었다.

피로 물든 얼굴의 사람들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고, 멤피스 후작의 도주 사실에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로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저 싸우라기에 싸우고 있었을 뿐, 멤피스 후작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충격은 컸다.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누가 해명해 주길 바랐다.

“크로노스 제국은 흑마법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르가 그 사실을 증명했으며, 방금의 전투에서도 흑마법사들이 동원되었다. 정녕 그것이 너희가 바라는 이 나라의 모습인가.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흑마법을 사용하면서까지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너희는 끝까지 목숨을 바칠 생각인가.”

그들은.

전쟁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강제적으로 전장에 내몰린 사람들이기에, 전쟁을 끝낼 마지막 기회를 부여했다.

“만약 너희가 끝까지 크로노스를 위해 싸우기를 바란다면, 나는 지금부터 단 한 명의 전쟁 포로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일 것이다. 선택하라. 너희 스스로가 미래를 선택할 유일한 기회다.”

그 말에.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는 그때, 사람들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제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일반 병사였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일반 평민에 불과한 그가 사람들 앞에 나섰다.

* * *

병사가 말했다.

“제가 알기로 당신은 절대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투항할 기회를 놓쳤고, 조금 전까지도 당신의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아득바득 발악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녕 저희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겁니까?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데, 저희가 대체 무엇을 믿고 무기를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간절한 목소리였다.

그로서는.

권력을 가진 존재들을 믿을 수 없었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며, 멤피스 후작은 병사들에게 강조한 사실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장의 악마다. 그가 적을 살려 주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크로노스 제국은 이미 로만 드미트리에게 적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겨라.”

그 말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드미트리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끝까지 무기를 휘둘렀다.

어차피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1분 1초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기보다는, 실낱같은 승리의 가능성에 매달려 싸우는 것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지휘관들이 도망쳤단다.

간절하게 믿던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상황에, 앞으로 나선 병사는 애처로운 눈길로 모두의 입장을 대변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희가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자였다면, 단언컨대 나는 두 번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결정권자들의 영역이다. 이 나라의 황제나, 조금 전까지 너희를 전장으로 몰아넣었던 멤피스 후작 같은 사람들이 그 영역에 속하지.”

자비를 베풀려는 의도가 아니다.

선례라는 것은.

명확한 대상이 필요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임으로써 하나의 선례를 남길 수 있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기꺼이 학살을 감행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명령권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이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린다고 해서, 전장의 참혹함이 남길 선례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은.

통치해야 할 땅이다.

무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다른 세력의 사람들을 받아들였듯, 이들 또한 백성이 될 존재들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기회를 주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땅에도 앞으로 나를 위해 살아갈 사람들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너희가 나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너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피지배층이 바라는 대답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기회를 주겠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반 병사들로서는 더는 싸울 이유가 없었다.

툭.

“항복하겠습니다.”

무기를 버렸다.

그가 시작이었다.

투두둑.

쨍그랑.

하나둘.

사방에서 무기를 버렸다.

그것은 마치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져 나갔고,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항복하겠습니다.”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크로노스와의 기나긴 악연.

마침내 그 끝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완전히 투항했고, 루카스가 현재 파악한 상황들을 보고했다.

“예상대로 멤피스 후작은 도망친 것 같습니다. 추격대를 보내 흔적을 조사하고 있으며, 크로노스 황제는 황궁 밖으로 나간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알겠다. 멤피스 후작을 반드시 찾아라.”

“예.”

루카스가 물러났다.

이제는.

황궁을 점령할 차례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크리스와 케빈이 따라붙었고,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행렬을 이루었다. 숨이 막히는 광경이었다.

크로노스의 황궁으로 향하는 길인데, 그 누구도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휑했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카스트로와 황실 기사단.

황실을 지키는 존재들은 알렉산드르의 개였고, 그가 죽은 이상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크로노스 황제를 위해 싸울 존재는 없었다.

그야말로 무혈입성(無血入城)이었다.

정적으로 맴도는 공간에, 어쩌면 빙의가 풀린 크로노스 황제가 이미 자리를 비우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달했다.

거대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의외의 광경이 눈앞에 보였다.

“겨우 하루 만에 수도가 함락당한 건가.”

크로노스 황제.

야위어 병약해 보이는 얼굴의 그가, 홀로 도망치지 않고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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