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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화 (412/615)

412화 크로노스의 몰락 (3)

이질적인 상황이었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그 누구의 호위도 없이 홀로 존재하고 있었다.

‘함정인가.’

타당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감각을 확장해 주변을 확인했는데도, 황제를 제외하고는 생명체의 기운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마법적인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개의치 않았다.

무엇을 준비했든.

자신을 막지 못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크로노스 황제는 탁한 음성을 힘겹게 내뱉었다.

“……처음부터 나는 이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상했다. 멍청한 멤피스 후작은 끝까지 발악하다 보면 살길이 열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할 뿐이지. 로만 드미트리. 알렉산드르가 경외한 존재를, 어떻게 멤피스 후작 따위가 저지할 수 있겠나.”

한때.

크로노스 황제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황제이면서도 오라 검사의 경지에 올랐고, 모두가 역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하던 그는 지금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말을 내뱉으면서도 힘겨운지 자꾸만 숨을 헐떡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검게 파인 눈두덩이 속에서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그동안 직접 너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는 존재가, 어째서 너를 향한 무한한 경외심(敬畏心)을 느끼는지를. 알렉산드르는 누군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다. 오라를 창시하고 오랜 세월 대륙의 판도를 쥐락펴락한 괴물. 그는 스스로를 최고라고 여겼지만, 로만 드미트리 너에게만큼은 한없이 작은 인간이 되었다.”

빙의.

감정이 공유되었다.

알렉산드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로만 드미트리를 언급할 때마다 생겨 가는 감정의 동요를 읽었다.

충격적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괴물이건만,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에서 그는 심적으로 절대적인 약자의 위치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마음의 굴복이었다.

승패의 결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르는 자신도 모르게 로만 드미트리를 위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직도 너에 대한 진실은 알아내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물이 알렉산드르를 쓰러트리고 단 하루 만에 크로노스의 수도를 점령했다는 것. 알렉산드르의 경외심이 단순히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를 진심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심연의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돌던 그는, 본인의 삶을 되찾자마자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나 크로노스 황제는 너의 존재를 인정한다. 너는 나를, 이 크로노스를 무너트릴 자격이 있다.”

눈을 부릅떴다.

생명력을 쥐어짜 내며, 그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새로운 절대자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의 목을 취하라!”

* * *

그날의 일.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성인식을 치르던 도중 잠시 의식을 잃었던 크로노스 황제는,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게 무슨.”

성인식으로부터 수년.

시간이 삭제되었다.

머릿속에는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크로노스 황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일이 아니었다.

마치 무수히 많은 실에 조종되는 꼭두각시처럼.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움직였다.

수년의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은 크로노스 황제를 두려움의 상징으로 여겼고, 일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뒤늦게라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해진 틀을 벗어나자, 크로노스 황제의 의식은 다시 심연 너머로 빨려들었다.

꾸르르르륵.

숨이 막혔다.

답답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크로노스 황제는 마치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관전자처럼 살았다.

무의식의 꼭두각시는 알렉산드르가 명령한 삶을 살았고, 가끔은 알렉산드르가 직접 몸을 움직일 때도 있었다.

빙의가 반복되며 참담한 현실을 깨달았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꼭두각시로 만들었으며, 그 강력한 마력에 크로노스 황제는 심연 밖으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정신이 갉아 먹혔다.

폐인처럼 시간을 흘려보냈다.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변이 생겼다.

몸의 통제권을 얻은 크로노스 황제는, 자신으로 인한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거기 누구 없느냐. 누가 없냐고 물었다!”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이번 전쟁은 부당한 이유로 시작되었다. 나는 그 책임을 통감하고, 휴전을 선언할 것이다.”

전쟁을 끝냈다.

그때는 그것이 옳다고 믿었고, 자신의 의식을 장악한 알렉산드르에게 대항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크로노스의 진실이었다.

제1차 대륙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던 갑작스러운 휴전 선언은, 육체의 주인인 크로노스 황제가 의식의 통제권을 얻으면서 생겨난 일이었다.

또다시.

의식이 심연 너머로 빠져들었다.

크로노스 황제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알렉산드르. 언제고 이 지긋지긋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면, 나는 크로노스의 황제로서 올바른 일을 행할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버틸 것이다. 심연 속에서도 의식이 소멸되지 않고, 한순간이라도 내게 주어질 기회를 기다릴 것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내 의지대로 휴전을 선언한 것처럼, 네 세상이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심연 속.

의식을 잃어 갔다.

그런 와중에, 크로노스 황제는 단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로만 드미트리.’

언젠가.

자신이 삶을 되찾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알렉산드르가 경외하는 그 존재 때문일 것이다.

* * *

그리고 현재.

크로노스 황제가 말했다.

“이 세상은 크로노스 제국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사회가 붕괴되었고, 많은 사람이 지옥 같은 현실을 살아야만 했다. 나는 크로노스 제국의 황제로서 그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다. 내가 결단하고 명령한 것은 아니나, 알렉산드르 또한 크로노스의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르.

그는 명백한 악(惡)이었다.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계획했지만, 그가 벌여 온 만행은 크로노스 제국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도 크로노스의 황제였다.

오라를 창시하며 제국의 초석을 쌓은, 알렉산드르는 크로노스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존재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참혹한 현실에서 원망의 대상을 찾는다면, 알렉산드르와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크로노스는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크로노스 황제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심연 속에서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이 나라가, 그리고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평생 꼭두각시로 살아온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의미 있게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빙의로 인해 내 생명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삶을 유지하겠다고 아득바득 발악하기보다는, 나는 평생을 추악하게 살아왔던 내 삶을 가치 있게 마무리하고자 한다.”

파르르.

몸이 떨렸다.

눈꺼풀이 자꾸만 감겼고, 속에서 역하게 올라오는 기운에 당장 모든 것을 토해 내고 싶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할 말이 많기에, 크로노스 황제는 억지로 의식의 끈을 부여잡으며 홀로 이곳에 남은 이유를 말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죽여라. 암흑의 시기를 대표하는 나를 죽임으로써, 크로노스 제국의 모든 영광을 차지하라. 제국의 명성, 제국의 영토, 나의 백성들. 알렉산드르와 같이 대륙을 파멸로 몰아넣은 나를 처단하는 자는, 그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후(死後).

자신의 뒤를 이어 이 땅을 다스릴 존재.

크로노스의 미래를 선택하는 것만이, 죽음을 앞둔 크로노스 황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실은 억울했다.

자신은 그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이 참담한 현실에 희생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살아갈 날이 남아 있었다면, 크로노스 황제는 고개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해서라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기에.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네 제안은 거절한다.”

돌아오는 대답은, 크로노스 황제를 충격에 빠트렸다.

* * *

크로노스 황제.

사연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의 상황, 그의 결단,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그가 바라는 바를 들어줄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크로노스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의 제안.

상대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알아서 목을 내주고 악의 상징으로 죽어 주겠다는데, 대체 왜 이런 제안을 거절한단 말인가.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사람들은 간혹 그런 착각에 빠지고는 하지. 스스로가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착각. 크로노스 황제. 너는 패배의 역사다. 너를 비롯한 역대 크로노스의 황제들은 무능했기에 알렉산드르의 지배를 받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무고한 사람들이 감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왜 너의 의지를 물려받아야 하는 거지? 만약 네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네 말은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네게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로만 드미트리! 나는 승패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나의 마음이,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나의 결단이. 네게 그리도 우스운 일인 것이냐!”

눈을 부릅떴다.

들끓는 분노에, 격한 감정을 토해 냈다.

이해했다.

크로노스 황제에게 있어, 그 결단은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착각이라는 것이다. 패자에게 있어, 현실은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

전생.

로만 드미트리는 밑바닥에서 정점에 올랐다.

크로노스 황제와는 다르게, 매번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지배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다.

“크로노스 황제. 너는 태생부터 결정권자의 삶을 부여받았고, 그렇기에 이 상황을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것이겠지. 사람들 대부분은 불합리한 삶을 살아간다. 평민이라는 이유로,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결정권자들이 저지른 잘못을 감당하며, 그것을 일상처럼 받아들인다. 지금 네 삶은, 네 상황은. 네가 받아들여야 할 불합리한 현실이다. 크로노스가 알렉산드르라는 재앙을 통제하지 못한 순간부터, 너는 홀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가여운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패자의 삶을 살아갔을 뿐이다.”

크로노스 황제의 이야기.

숭고하지 않았다.

그가 불쌍할 수는 있어도, 그의 삶을 특별하게 치켜세울 이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패배했을 뿐이다.

알렉산드르에게 굴복했고,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지 못했다.

본인으로서는 억울하고 참담한 이야기임에는 분명했다.

이미 거대한 계획에 집어 삼켜진 크로노스 제국의 후계자로 태어나, 어떻게 반항할 새도 없이 삶이 잡아먹힌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분을 바꾸어 생각하면 그만 참담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약자로 태어나 잡아먹히는 삶을 당연하게 여겼던 케빈과는 달리, 크로노스 황제는 적어도 황가의 후계자로 태어났기에 삶의 마무리를 치장할 권리라도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제고 크로노스 황제가 이러한 결단을 내렸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화되길 바라지 않았다.

“역사는 오늘을 안타깝게 여겨서는 안 된다. 너는 알렉산드르에게 지배당한 무능력한 황제로 남을 것이며, 제국을 위한 숭고한 희생 따위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은 강인하고 그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지도자를 바라겠지. 그것이 내가 바라는 미래다. 네가 미화될 여지는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이 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하게 할 것이다.”

“……그게 무슨.”

크로노스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 한 번도.

로만 드미트리처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으나, 그에게는 이 상황을 통제할 권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크로노스 황제.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이곳에서, 너는 그렇게 무력한 죽음을 맞이하라.”

번뜩.

목을 날렸다.

크로노스 황제.

그로서는 바라지 않았던, 허망하고 초라한 최후였다.

* * *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초라하게 널브러진 시체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로만 드미트리는 미련 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이는.

자신을 잔인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죽음을 받아들인, 평생을 심연 속에서 살았던 크로노스 황제가 바라는 최후조차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연민과 현실은 분리해야만 했다.

그가 아무리 기구한 사연을 지녔다고 한들, 그가 남길 이야기는 훗날 어떤 파급력을 낳을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은.

다음 페이지가 없기에 의미가 있는 법이다.

앞으로 자신이 쌓아 갈 미래에, 패배자의 과거를 미화시킬 여지를 남길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참 안타까운 존재였다.

다른 이들은 삶을 결정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크로노스 황제는 그러한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할 현실에 있었다.

그가 도망치지 않고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했을 때.

그를 개처럼 끌고 가서 처참하게 죽이지 않은 것은, 끝까지 자리를 지킨 적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밖으로 나오자.

루카스가 다가와 말했다.

“멤피스 후작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밀실에 몸을 숨긴 것 같습니다.”

머지않은 미래.

멤피스 후작은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크로노스 황제와는 달리, 자신은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을.

로만 드미트리가 차갑게 말했다.

“안내해. 내가 직접 가겠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