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4화 (414/615)

414화 크로노스의 몰락 (5)

예상대로였다.

멤피스 후작의 사람들.

멤피스 후작이 처형당했다면 현실을 받아들였을 그들이,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밀실에 은밀히 모였다.

“……다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멤피스 후작의 절친.

카라스코 백작이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다들 침통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멤피스 후작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만약 그를 구출하고 반란의 불씨를 살린다면,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항할 힘을 갖출 수 있습니다. 물론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는 사실은 잘 압니다. 제국의 전력이 건재할 때도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지 못했는데, 얼마 남지 않은 병력으로 저항해 봤자 승산은 희박하겠지요. 하지만 이대로 멤피스 후작이 죽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멤피스 후작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정권이 바뀐다는 의미는, 살아남는다고 해도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고민.

권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체계에서 그들은 권력자로서 살아갈 수 없다.

전에는 멤피스 후작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든든한 배경이었다면, 앞으로의 미래에는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사실에 그들은 밀실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멤피스 후작이 아직 살아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 그들에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카라스코 백작이 말했다.

“며칠 전. 발할라의 스노딘 백작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만약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면, 발할라는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지금부터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권리를 되찾길 바란다면 멤피스 후작을 구출할 것이고,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멤피스 후작이 이대로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겠지요. 저는 여러분들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그 또한.

확신이 서질 않았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고민되는 상황이기에, 모두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 했다.

그러자.

한 인물이 말했다.

“다 좋습니다. 멤피스 후작을 구출하고, 스노딘 백작의 지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또 다른 전쟁을 벌일 기반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마법 방어를 겹겹이 설치한 성벽을 일격에 날려 버린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9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는 알렉산드르조차, 로만 드미트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스노딘 백작이요? 발할라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인물을 믿고 어떻게 일을 처리하겠습니까.”

그들 모두.

진실을 알았다.

선을 넘어 버리는 순간, 반역도로 분류되는 이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히 무력만 갖춘 인물이 아닙니다. 크로노스 황제는 공개적으로 죽이지 않았으면서, 멤피스 후작은 대놓고 전시하듯이 내걸었습니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는 하나의 선례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든 선을 넘어 버린다면. 저번 연설에서 강조했던 법도를 어긴 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보여 주겠지요.”

“……그래도 멤피스 후작은 우리의 은인입니다. 그가 죽는 것을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카라스코 백작님.”

시선을 마주쳤다.

카라스코 백작이 절친이라면, 지금 발언하는 귀족은 멤피스 가문의 사촌이었다.

“저는 멤피스 가문의 혈족(血族)입니다. 그런 제가 왜 이런 발언을 하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할지언정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로만 드미트리는, 처형대에서 말한 연설에서 새로운 기회를 주겠다고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초라해 보일 것 같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 말을 내뱉어야만 했다.

“더는 로만 드미트리 같은 괴물과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두렵습니다.”

* * *

그 시각.

처형대 앞에 한 사내가 있었다.

다소 앳돼 보이는 얼굴의 사내는, 멤피스 후작을 바라보며 살기(殺氣)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멤피스 후작. 꼴 좋구나.”

“너는……?”

낯선 음성에.

멤피스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며칠 내내 매달려 있는 바람에 시야가 흐릿했고 귀도 먹먹했지만, 그는 단번에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큭큭큭, 크로이트 후작의 자식이구나. 크로이트 가문을 멸문(滅門)시키는 과정에서 아들놈 한 명이 도망쳤다더니, 이렇게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나다니. 삶이 참으로 재밌어. 그래서, 내게 복수라도 할 생각인가?”

그의 말처럼.

크로이트 가문은 멸문의 위기를 맞이했다.

다행히도 크로이트 가문을 따르는 사람들이 막내인 조웰슨을 구출해 주었고, 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어 버렸다.

조웰슨은 매일 오늘과 같은 상황을 꿈꿔 왔다.

멤피스 후작을 처참하게 죽여서, 자신을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던 가족들에 대한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단검을 들어 멤피스 후작의 복부를 쑤셔 버리는 순간, 연약한 살이 찢겨 나가며 피가 터질 것이다.

진심으로 바라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난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날 죽이지 않는다니. 난 네 아비를 죽였다. 내게 항명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복부를 쑤셔 버렸고, 네 어미도, 네 누이도, 크로이트 가문의 사람들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런데 내게 복수를 하지 않겠다고? 조웰슨! 날 죽여라! 네 가문의 원수인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내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을 생각인가? 어서, 네가 염원하던 복수를 행하란 말이다!”

멤피스 후작이 소리쳤다.

이미 살 방법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바를 알기에, 그는 이 고통 속에서 얼른 해방되기를 바랐다.

자결은 불가능했다.

혀를 한번 깨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마법사가 다가와 혀를 다시 이어붙이는 치료 마법을 사용해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는 명백했다.

타인에 의해 죽는 것은 허용되나, 스스로 죽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건.

기회였다.

죽어 보겠다고 발악하는 모습에, 조웰슨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웃음을 보였다.

“이래서 널 죽이지 않는다는 거야. 네 모습을 봐. 크로노스 제일의 권력자인 네가, 볼품없는 얼굴로 삶을 제발 끝내 달라고 부탁하고 있잖아. 내가 대체 왜 너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지?”

멤피스 후작을 바라보며.

생각을 거듭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래도 직접 죽이는 것이 진정한 복수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현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크로이트 가문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에게 아직 인생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 주었다.

“나는 크로이트 가문을 다시 일으킬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하겠지. 나는 로만 드미트리 님이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적어도 그분은 크로노스 출신이라는 편견으로 날 배척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고 굳이 내가 손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네게 정말 지옥 같은 죽음을 선사할 것이 분명하기에.”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며 피가 흘러나왔다.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새로운 법도를 어기지 않을 거야. 크로노스의 시대는 끝났고, 우리는 이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알고 있어. 멤피스 후작. 널 보러 찾아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음에 내가 이 자리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죽어 버린 네 시체를 내 눈에 담기 위해서겠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모습에, 멤피스 후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안 돼! 날 죽여! 제발 날 죽여 달라고! 조웰슨! 네 손으로 직접 가문의 복수를 행하란 말이다!”

발악했다.

악에 받쳐 소리쳤다.

목이 나갈 정도로 그렇게 소리쳤지만, 조웰슨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햇볕이 뜨거웠다.

벌써 며칠이 흘렀는지 모른다.

몽롱해진 정신에, 멤피스 후작은 넋을 잃은 얼굴로 중천에 떠오른 해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지난 며칠.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갔다.

자신을 구경거리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고, 조웰슨과 같이 분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한 법도는 절대적이었고, 그것을 어기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감히 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멤피스 가문의 사람들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자신을 구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헛된 망상임을 알았다.

참으로 허망한 삶이었다.

권력자로서 살아갈 때는 자신의 삶이 완벽하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자신이 진정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참담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겠지. 과거의 나는 똑같은 선택을 반복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르는, 크로노스 황제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 전부였다. 이름도 모를 변방의 후계자 따위가,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리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겠지.’

과거의 그 누구도.

이러한 현실은 예상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돌연변이였고, 지금도 그의 존재는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실수는 크로노스를 위해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 찾아올 줄 모르고 너무 과도하게 충성한 것이었다.

크로노스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기에.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인물이, 이 판도를 뒤엎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숨을 헐떡였다.

의식이 흐릿해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원숭이를 구경하듯 이곳을 바라보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이었다.

그렇게.

털썩.

멤피스 후작은 고개를 떨구었다.

* * *

“……멤피스 후작이 죽었습니다.”

크리스였다.

딱 열흘.

열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는 보고에, 로만 드미트리는 살펴보고 있던 자료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사인은?”

“타살(他殺)이 아닌, 생명력이 다해 죽었습니다.”

“아무도 멤피스 후작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의미군.”

“맞습니다.”

의도대로였다.

멤피스 후작.

그를 처형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았다.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와 크로노스 제국 사람들의 관계를 정립하는 상징성을 의미했고, 그 사실을 알기에 아무도 멤피스 후작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에게 가족을 잃었고, 많은 것을 빼앗겼을지라도.

들끓는 분노보다도 로만 드미트리에게 항명하는 것이 더욱 큰 두려움을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로써 크로노스의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멤피스 후작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크로노스 제국이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겠지. 지금부터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것이다. 왕국 연합의 수뇌부들을 소집하라. 그리고 이번 소집령에는.”

탁자 위를 내려보았다.

그곳에는 발할라를 분석한 자료가 있었다.

“발할라 제국도 포함될 것이다.”

* * *

소집령.

그 사실이 전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를 불러들이는 상황에, 스노딘 백작을 따르는 사람들이 분노한 기색을 보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을 쓰러트렸다고 한들, 그들은 아직 왕국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감히 제국을 불러들이다니요. 이번 요청을 수락하는 순간, 발할라 제국은 끝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발할라 제국이 고개를 숙인다면,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들 날이 섰다.

왕국과 제국.

상하 관계에 있어서, 발할라 제국은 명백히 위에 있었다.

발할라 제국의 주도하에 드미트리를 불러들이는 것이면 몰라도, 드미트리가 마련한 자리에 불려 나가는 것은 볼품이 없었다.

물론 드미트리가 제국으로 도약할 기반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국으로써의 자부심에,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노딘 백작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는 명백하다. 대륙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를 주도함으로써, 발할라와 드미트리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생각이겠지. 우리는 그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주도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발할라가 휴전을 선언하면서 드미트리는 전쟁을 속행할 명분을 잃었다. 물론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드미트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제국의 정체성을 지켜 낼 수 있다.”

“알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현실의 딜레마였다.

아직은.

고개를 숙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맞으나, 드미트리가 발할라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회의실 한편.

통신병이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정말 힘든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이번 통신에서 드미트리가 강조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번 소집은 요청이 아닌 명령이며,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시 항명(抗命)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항명.

그 단어에.

사람들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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