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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화 (415/615)

415화 승자 독식 (1)

스노딘 백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통신병의 말을 곱씹을수록, 붉게 달아오르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항명이라고 했나. 감히 제국을 상대로, 일개 왕국이 항명을 논하다니!”

콰앙!

탁자를 내리쳤다.

드미트리의 발언.

선을 넘었다.

발할라는 드미트리의 신하가 아니다.

그들의 명령을 따를 의무 자체가 없는데, 항명을 논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이것은 발할라를 무시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이런 말을 듣고도 그냥 넘어간다면, 사람들은 발할라를 더는 제국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수뇌부 중 한 명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스노딘 백작은 당장 드미트리에 연락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백작님. 침착하십시오.”

“침착? 항명이라는 소리를 듣고 대체 어떻게 침착하란 말이냐. 드미트리는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라는 의미겠지.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만만히 보이는 순간, 발할라는 아이른 남작의 세력에게 넘어갈 것이다.”

“맞습니다. 드미트리를 등에 업은 아이른 남작에게 이번 일은 기회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것 또한 로만 드미트리의 함정입니다. 그는 일부러 저희를 자극해, 발할라를 공격할 명분을 얻으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공격할 명분이라고?”

“예.”

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스노딘 백작은 더 말해 보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수뇌부가 말했다.

“크로노스 제국이 무너진 지금. 로만 드미트리에게 발할라 제국은 눈엣가시입니다. 지난 휴전 협상을 받아들였기에 공격할 명분이 없을 뿐, 상황만 만들어진다면 언제든 발할라를 무너트리려 할 것입니다. 항명이 선을 넘는 단어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분쟁이 생긴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무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발할라의 힘으로는 절대 드미트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는데도 참아 넘기라는 건가.”

“먼 미래를 보십시오. 지금은 굴욕적일지라도, 한순간의 분노로는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딜레마였다.

분노한다면.

발할라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대가로 상황이 어떻게 악화될지 몰랐다.

그렇다고 수긍한다면.

그날부로 제국의 위상은 끝이었다.

스노딘 백작은 참담한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었다.

아이른 남작을 회유해서 발할라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전쟁이 끝나고 이런 방법으로 압박할 줄은 몰랐다.

사실 크로노스가 무너진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미래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스노딘 백작은, 짧은 시간에 상당히 늙어 버린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대답을 미루어라.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이 가라앉으면, 그때 드미트리가 원하는 답을 주겠다.”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물러났다.

회의는 그것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몇 분 뒤.

다시 회의실에 나타난 통신병이, 절망에 빠진 얼굴로 예상치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로, 로만 드미트리가 워프를 요청했습니다. 그가 지금, 이곳 발할라의 수도로 직접 오겠답니다!”

* * *

워프 요청.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발할라와 드미트리는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낸 상태였기에, 로만 드미트리의 워프를 거절한다면 뒷말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짜증이 나고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로만 드미트리가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스노딘 백작은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마치 익숙한 공간인 것처럼 알아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스노딘 백작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이 또한.

명백한 하대였다.

마음 같아서는 들끓는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상황을 주도할 권리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있었다.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적진 한복판에 있는데도 당당한 태도에서는, 발할라가 어떻게 나오든 본인을 해할 수 없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실제로 그것이 진실이기도 했다.

스노딘 백작으로서는 그 사실을 알기에, 분노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본인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발할라를 찾으셨습니까.”

“이유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조금 전. 마법 통신을 통해 분명히 드미트리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각 나라의 대표들을 소집하는 자리를 가질 것이며, 이는 요청이 아닌 명령이라고 말입니다. 스노딘 백작님. 아직 발할라가 항명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의도로 대답을 미루신 겁니까. 마법 통신으로 이에 대해 곧바로 회신하라고 말했을 텐데요.”

단도직입적이었다.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적대적인 질문에, 스노딘 백작으로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울컥하는 마음에 탁자를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희로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드미트리가 주최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발할라는 제국입니다. 제국을 상대로 왕국이 강제적으로 소집령을 선포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기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겼다.

제국과 왕국의 관계를 걸고넘어져, 상대가 얼마나 무례했는지를 지적했다.

그런데.

“그래서, 항명하겠다는 겁니까?”

당혹스러운 대답이었다.

어떠한 해명도, 타협할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항명을 언급하는 모습에, 스노딘 백작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항명이라니요. 사람이 왜 이렇게 극단적입니까. 저희는 이 세상의 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항명이라 말하기에는, 발할라가 드미트리를 모시는 신하의 나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로서는 더는 해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드미트리와 발할라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은 서로를 향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끼익.

로만 드미트리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그들의 불안한 눈빛이 집중되자, 담담한 얼굴로 말을 툭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태도를 바꾸었다.

로만 드미트리도 알았다.

이 상황의 불합리함을.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발할라는 지금, 드미트리를 상대로 항명하겠다는 건가.”

* * *

회의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스노딘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의 물음에, 제국과 왕국의 관계를 언급하며 상황을 회피하려 했다.

그런데.

문제 자체를 짓밟아 버렸다.

선을 과감하게 넘으며, 발할라를 대우해 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말문이 막혔다.

일반적으로는 분노하는 것이 올바른 대응이나, 이 정도로 대놓고 적대적일 줄은 몰랐기에 스노딘 백작은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다.

상대는 제국을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사과를 받아 내기에는, 발할라 제국은 드미트리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였다.

정적을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동안 발할라와 크로노스, 두 제국이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 있었지. 누가 옳은지 그 사실을 떠나서, 너희는 힘의 논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왔다. 스노딘 백작. 내가 만약 너희의 행동을 항명이라 취급하고 이 자리에서 모두 죽여 버린다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나.”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대놓고 사람들을 핍박해도 제국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너희는 내게 책임을 물을 힘이 없다. 정말 간단한 문제야. 발할라와 드미트리의 문제를 상식적으로 처리하길 바랐다면, 크로노스 제국이 무너지기 전에 뭐라도 했어야지. 아이른 남작을 필두로 너희를 압박했어도, 너희는 끝까지 항전하며 제국의 위치를 지켰어야지.”

이죽거렸다.

말문이 막힌 사람들을 둘러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세상이 변했다. 너희가 공명정대(公明正大)하지 않았는데, 새로운 세상이 너희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길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너희의 선택을 강제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부터 벌어지는 모든 일에서, 드미트리가 상식적으로 너희를 대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마지막으로 묻겠다.”

웃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두려움 어린 시선들을 마주하며, 발할라의 수뇌부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 버렸다.

“그래서, 내게 항명하겠다는 건가.”

* * *

며칠 뒤.

드미트리가 주관하는 회의가 진행되었다.

장소는 주인을 잃은 크로노스의 수도였고, 예정된 시간이 되자 각 국가의 대표들이 속속들이 모였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얼굴이 좋아지셨군요.”

움베르토, 레드포드, 프랑크 삼국의 국왕.

에드윈 헥토르와 다니엘 카이로.

그들은 서로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던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렸고, 지금부터는 그 결과를 즐길 차례였다.

그들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앉으며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발할라 제국의 대표인 스노딘 백작은 외톨이처럼 홀로 구석에 앉았다.

‘……빌어먹을.’

참담했다.

발할라 제국.

과거에는 항상 어느 자리에서든 주인공의 역할을 맡았다.

사람들은 발할라를 대표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부를 서슴지 않았고, 스노딘 백작은 발할라 제국을 대표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흘깃 마주치는 시선에서 왠지 모르게 자신을 무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를 악물었다.

사실 드미트리의 부름에 정말 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먼 미래를 보고 자존심을 버렸다.

‘발할라는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힘이 없지만, 먼 미래를 보고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언제고 드미트리를 무너트릴 수 있겠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불가능하다면 그다음 세대에서라도, 그때도 불가능하다면 그다음 세대에서라도. 나는 철옹성과 같은 드미트리의 성벽을 무너트릴 것이다. 내가 겪었던 이 수모를, 언젠가는 반드시 보복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수도를 방문한 날.

회의는 밤새 진행되었다.

발할라의 미래를 말하는 상황에, 발할라의 수뇌부들은 악에 받친 얼굴로 모두 뜻을 모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적당히 타협할 길을 열어 주었다면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였을 텐데, 발할라를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에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발할라는 이대로 몰락할 나라가 아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거대한 폭풍에 휘말렸지만, 발할라 제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분노를 억눌렀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약자로서의 위치가 익숙하지는 않으나, 스노딘 백작은 복수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입장하십니다.”

문밖에서.

기사의 음성이 들렸다.

문이 열리고 주인공이 등장하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로만 드미트리를 반겼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신분은 엄연히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입장이었다.

가볍게 인사하는 정도만 해도 충분한 예의인데, 그들은 일어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스노딘 백작 또한.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굳은 얼굴을 환하게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로만 드미트리의 입장을 반겼다.

현실을 직시했다.

지금, 이 모습이.

승자가 취할 권리이자, 앞으로 대륙이 맞이할 현실이었다.

* * *

로만 드미트리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스노딘 백작의 심기만 불편할 뿐, 모두가 그 자리의 주인이 로만 드미트리임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모두 모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을 둘러보더니,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여러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이유는 앞으로 샐러맨더 대륙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일단 크로노스 제국과 관련한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먼저 정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번 회의.

대륙의 판도가 결정될 것이다.

스노딘 백작도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이어진 발언은.

“첫 번째 안건은 전범국(戰犯國)인 발할라 제국의 처우입니다.”

스노딘 백작으로서는 예상치도 못한.

그야말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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