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승자 독식 (2)
방금의 발언.
스노딘 백작은 귀를 의심했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범국이라니요. 발할라는 공식적으로 휴전 협상에 체결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오해는 풀린 것이 아니었습니까? 앞으로 대륙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한 것인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른침을 삼켰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예민한 문제를 거론한 것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 당황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하지만 절대 분노하는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문제로 여길 만한 것도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아야만, 자신이 이 자리에서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이어진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스노딘 백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노딘 백작. 이번 전쟁의 시발점은 발할라 제국이었다. 발할라가 추악한 진실을 덮기 위해 나를 공격하면서부터, 전쟁의 불길이 대륙 전체로 번지게 되었지. 그런데 어떻게 발할라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나. 대륙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해야겠지.”
싸늘했다.
다른 대표들과는 다르게 예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서, 불안한 감정은 더욱 팽배해졌다.
함정이 확실했다.
이 자리에 발할라를 불어들인 이유는, 애초에 발할라를 심판대에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시선을 주자, 루카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드미트리 정보 길드에서 조사한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미트리와 발할라의 분쟁은 남부의 무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크로노스가 발할라의 역사에 직접 관여했다는 자료가 진실임을 확인하기 위해 그간의 행적을 조사했고, 그 결과 슈테른 발할라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당시 비에토 공작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경비대장이 비밀리에 기록한 그 자료에는, 비에토 공작이 주장한 것과는 다른 진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에토 공작이 슈테른 발할라와 연관이 있다면, 내란을 통해 그들이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병사들이 자료를 나누어 주었다.
경비대장의 비밀 일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소에서 비에토 공작의 행적이 드러났다.
“예민한 문제이니만큼 이번 발표에 추측성 발언은 배제하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슈테른 발할라가 피의 숙청을 벌이던 날, 비에토 공작은 그 자리를 주도하던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슈테른 발할라와 비에토 공작이 대립하던 내란의 진실은, 사실 처음부터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의 쇼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스노딘 백작은 비에토 공작과 많은 부분을 논의하던 인물입니다. 오래전, 피의 숙청이 일어날 그때부터 말입니다.”
루카스가 스노딘 백작을 보았다.
불안감으로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 담담한 음성으로 보고를 끝맺었다.
“이상입니다.”
* * *
외통수였다.
발할라의 진실.
비에토 공작이 피의 숙청을 주도한 인물이라면, 스노딘 백작 또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몰랐다는 변명?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정권자는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이번 문제는 전범국에 대한 처우였다.
발할라가 자신들의 추악한 진실을 묻기 위해 대륙 전쟁을 벌인 것이라면, 로만 드미트리가 처음 언급했던 부분을 반박할 수 없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알렉산드르는 용서받지 못할 존재였다. 개인의 욕망을 위해 흑마법의 힘을 끌어들였고, 그로 인해 대륙은 혼란에 빠졌다. 스노딘 백작. 앞으로 대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알렉산드르와 관련된 이들의 처우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저는 억울합니다. 비에토 공작님을 모셨을 뿐, 그분이 어떤 일을 계획했는지는 모릅니다.”
한발 물러났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의 무관함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에 자신의 의도는 없다는 사실을 주장해야만 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그건 올바른 대답이 아니야. 슈테른 발할라와 비에토 공작. 그들은 처음부터 목적이 같았고, 그 중심에는 알렉산드르가 있었다. 발할라의 내란은 철저하게 계산되었다. 서로를 위협하는 시늉만 했을 뿐, 막상 궁지에 몰아넣고는 숨통을 끊지 않았지. 사실 지금 돌아보면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비에토 공작의 반란군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 겨우 그만한 병력으로 발할라의 수도를 무너트리며 슈테른 발할라를 처리할 수 있었던 것. 일련의 과정에서 너는 비에토 공작과 모든 의사 결정을 함께했다. 그렇다면 네가 내세울 수 있는 진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거나, 다른 하나는 진실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를 만큼 무능하고 멍청했거나. 그리고 어떤 것이 진실이든…….”
심장이 뛰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시선을 마주 보며, 스노딘 백작은 마치 생명력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널 살려 둘 이유는 없다.”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예상대로였다.
비에토 공작이 죽고서 권력을 차지한 스노딘 백작에게, 이 상황을 회피할 방법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발할라의 추악한 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무덤의 자료를 공개해야 할 텐데, 그때는 더욱 처참하게 처형대에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히 크로노스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발할라의 수뇌부들과 의기투합하며 먼 미래를 말했다.
지금은 정말 굴욕적일지라도, 자존심을 버린 결정이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처참했다.
처음부터 모두 계획되었다는 생각에, 스노딘 백작은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휴전 협상부터 의도적이었어. 로만 드미트리는 내게 기회를 주려던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발할라를 배제하기 위해 휴전을 제안한 것이겠지. 이미 그때부터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을 자료를 확보했으면서도, 그는 우리를 가지고 완전히 농락했어. 만약 그때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눈치챘더라면 크로노스와 같이 끝까지 발악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대항할 여력이 없어.’
끝났다.
그렇다고 현실을 수긍할 수도 없었다.
인정하는 반응을 보였다간, 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여론에 호소하는 것밖에 없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다른 대표들이 존재하기에, 스노딘 백작은 표정을 바꾸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부당한 처사입니다. 드미트리는 발할라를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대표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미트리의 이런 방식을 지지했다간, 나중에 그 화살이 여러분들을 향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드미트리가 제시한 모든 혐의를 부정하며, 빠른 시일 내로 이에 관해 해명하는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벌떡 일어났다.
일단 자리를 회피하려고 했다.
그 순간.
콱.
빠악!
머리가 탁자에 처박혔다.
당황한 얼굴로 눈을 부릅떴지만, 아무리 바둥거려도 머리를 짓누르는 손길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케빈이었다.
케빈이 스노딘 백작의 얼굴을 짓누르며, 그의 귓속에 속삭였다.
“거기까지 해. 혓바닥 잘리기 싫으면.”
그제야 알았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차가운 시선.
이미 자신의 심판은, 사전에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스노딘 백작은 병사들에 의해 끌려갔고, 처형식은 이후 일괄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래를 논의할 차례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일단 가장 먼저 스노딘 백작을 포함해, 이번 대륙 전쟁에 관여되어 있는 인물들의 대대적인 숙청(肅淸)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어도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은 죄를 물을 것이며, 이번 기회에 알렉산드르의 잔재를 확실히 뿌리 뽑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공석이 되어 버린 자리는, 누군가는 대체해야만 합니다.”
레드포드 국왕이었다.
예상했던 질문에, 미리 준비한 계획을 설명했다.
“이번 전쟁의 목적은 두 제국을 무너트리고 병합(倂合)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발할라와 크로노스는 오랜 세월 본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고, 전쟁의 여파에서 각 나라가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는 본래의 체제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예전과 같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발할라와 크로노스는 여전히 한 나라로서 존재하겠지만, 그들은 왕국 연합의 통제를 받으며 이전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로, 공석은 다른 이들로 대체될 예정입니다.”
이미.
몇몇 인물을 추렸다.
그중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의 프로필을 정리해서, 각 나라 대표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번 전쟁에 도움을 주었던 두 제국 세력들과 논의한 결과, 그들은 자료에 나와 있는 인물들을 내세우길 바랐습니다. 발할라 제국은 아이른 남작. 발할라가 대륙 전쟁을 선포했을 당시, 나머지 세력을 규합하며 스노딘 백작에게 대항했던 인물입니다. 작위는 남작에 불과하나, 이미 그는 발할라 내부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조웰슨 크로이트. 크로이트 가문은 대대로 크로노스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이고, 크로이트 가문의 사람들이 이번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두 인물이라면 모두 자국 내에서 정통성을 충분히 인정받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지군요.”
“걱정되는 부분은 제국은 결국 제국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힘을 회복하고 난 이후에도,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부는 긍정적인 의견을.
일부는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움베르토 국왕의 물음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것이 왕국 연합의 존재 목적입니다. 왕국 연합은 이 자리에 참석한 국가들의 사사로운 이득만을 위해서가 아닌, 대륙 전체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을 것입니다. 드미트리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려 한다면, 그때는 왕국 연합의 힘으로 강력하게 제지하겠지요.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크로노스가, 발할라가. 훗날 걱정되는 일들을 벌인다고 한들, 그들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보십니까?”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르의 계획이 절정에 달했을 때도, 대륙의 양대산맥은 처참한 패배를 맞이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고 한들, 더욱 견고해질 로만 드미트리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애초에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로만 드미트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그가 만들어 갈 세상에서, 그 누구도 드미트리의 존재를 넘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진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만약 크로노스와 같은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아무도 그것을 제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을 말했다.
모두가 각자의 울타리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방안을 제안했고, 강자가 자신의 권리를 내어 주는 일이 쉽지 않음을 다들 모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에드윈 헥토르.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 *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말하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대륙 절반 이상의 인구수를 보유한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강제적으로 병합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화적 차이는 반드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겠지요. 하지만 그 이전에, 확실하게 매듭짓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이 격렬한 흐름에서, 에드윈 헥토르는 무엇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대륙을 주도하던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무너졌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세상에서,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법도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대륙을 통제할 존재가 필요합니다. 사실 이번 전쟁은 매우 비정상적이었습니다. 왕국 연합은 전력에서 밀렸으나, 로만 드미트리 님 단 한 명의 존재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때부터 상하(上下) 관계는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해서는, 며칠 전에 왕국 연합의 수뇌부들이 따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지금 하는 발언은.
왕국 연합의 결단이었다.
누구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스스로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에드윈 헥토르가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주군.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되어, 저희를 통치해 주십시오.”
그와 동시에.
다른 왕국의 수뇌부들도,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되어, 저희를 통치해 주십시오.”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되어, 저희를 통치해 주십시오.”
뜻이 통했다.
왕국 연합.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새로운 세상의 지도자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