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승자 독식 (3)
회의에 참석한 이들 모두.
각 나라를 대표하는 거물들이건만,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제국(帝國).
그리고 그곳의 황제.
드미트리가 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대륙을 통치하라는 그 말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언젠가는 이와 같은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드미트리는 매번 정점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목적을 향해 나아갔고, 그 과정에서 같이 산전수전을 경험한 사람들은 전쟁이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아직.
드미트리 왕국의 국왕은 로메로 드미트리였다.
하지만 드미트리 내부에서 후계와 관련한 논의는 모두 끝난 상태였고, 전쟁이 마무리되는 대로 그 자리를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각 나라의 대표들은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드미트리의 속사정을 알기에, 지금이야말로 세 번째 제국을 선포할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각 나라 대표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로만 드미트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이미 저와 미래에 대한 논의를 끝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분명하게 말했던 부분이나,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니엘 카이로.
에드윈 헥토르.
둘은 이미 충성을 맹세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약속했기에,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남부 삼국을 향한 메시지였다.
“그동안 샐러맨더 대륙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존재, 발할라와 크로노스의 연합. 그들을 무너트리는 과정에서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각자의 역할을 해냈지만, 저는 이 순간을 같이했다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맹목적인 무언가를 약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새롭게 만들어 갈 세상에서 제가 정한 법도를 어기는 존재가 있다면, 그간의 관계와는 별개로 반드시 처벌할 것입니다.”
가볍게 들을 문제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각 나라의 대표들이 그동안 경험했던 존재는 내뱉은 말을 철저하게 지켜 왔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한다면. 처형대에서 말라 죽었던 멤피스 후작처럼, 죄에 걸맞은 처벌을 내릴 것입니다. 면죄부(免罪符) 따위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 말들이 여러분들에게는 잔인하고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는 본인들만의 잇속을 챙기며 살았지만, 그들을 무너트리고도 여러분들은 권력을 마음껏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한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상의 법도를 따르겠다고 말한다면,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약속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래전.
처음 빙의하던 그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 말하려는 미래를 그려 왔다.
“앞으로 그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는, 각자의 영역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제가 바라는 앞으로의 미래입니다.”
* * *
전생.
백중혁으로 살아가던 시절, 사천왕 중 한 명이었던 괴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고생해서 얻은 권력을 누리지 않을 생각이라면 대체 왜 그렇게 힘들게 무림을 정벌하신 겁니까? 저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군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얻었습니다. 저처럼 첩을 수십 명씩 거느리고, 매일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어 나가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데, 지금 주군은 마치 정파의 고리타분한 녀석들처럼 시시한 삶을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괴마.
무림 정벌 이후, 단언컨대 그만큼 현실을 즐기는 존재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괴마처럼 살아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괴마는 그동안 모았던 재산을 탕진하며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살아도 재산이 마를 일은 없었다.
그는 무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성과제로 보수를 받았고, 그렇게 쌓인 재산은 그를 무림 제일의 거부로 만들었다.
백중혁이 차를 마셨다.
매일 일어나 차를 마시고, 산책을 나가고, 땀이 날 정도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괴마의 불만은 당연했다.
천마신교의 절대자.
무림을 정벌한 존재가 살아가는 삶이라기에는, 따분하고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차를 얼마나 마셨을까.
정자 위에서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던 백중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괴마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내가 언제 무림을 정벌하겠다고 마음먹은 줄 아느냐.”
“……그야 타고난 본능 아니겠습니까. 천마의 삶이란 원래 그 누구의 밑에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네 말도 맞다. 천마로서 태어났기에, 어쩌면 내 천명(天命)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무림을 정벌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삶을 강요받았을 때부터였다. 그때의 나는 빼앗기는 삶에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는 순간 천마의 아들로서 나는 목숨을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일 투쟁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눈앞에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면 나라는 존재를 내세워 상대를 반드시 짓밟아 버렸다.”
평범할 수 없는 삶.
원했던 것이 아니다.
평범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임을 알았기에, 백중혁은 어릴 때부터 본인을 내세우는 법을 터득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다.
점점 성장하며 강력한 후계자로 도약했고, 그때는 어린 시절처럼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지만 가슴속에는 항상 과거의 기억이 멍울처럼 남았다.
가만히 서서 성장을 멈춘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평화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안정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영역이 침범받지 않는 그런 삶.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림을 정벌해야만 했다.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업적을 이루어야만, 천마로서 태어난 내 운명을 거스르고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순이었다.
안정을 바라기에, 백중혁은 무림 역사상 가장 참혹한 피바람을 일으켰다.
백중혁이 말하는 안정.
그것은 의미가 조금 달랐다.
무조건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바란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잃게 된다면, 적어도 그 책임이 본인에게 있는 삶.
경쟁하지 않는 것을, 싸우지 않는 것을 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강제적이었다.
백중혁이 무림 정벌을 통해 바라는 미래는,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었다.
웃었다.
“나는 그저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그 웃음에.
괴마는 시선을 돌렸다.
매번 실익을 따지는 그였지만, 백중혁의 이런 면모를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주군은, 당신은 참 특이한 사람입니다.”
그날.
괴마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백중혁이 말하는 안정은, 각자가 바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을.
역시 백중혁처럼 고리타분하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괴마는 겨우 하루 만에 다시 기루에 들러 술잔을 치켜들었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
생각이 필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말이 끝나자마자, 레드포드 국왕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일개 귀족이었던 시절. 이 세상이 참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는 타국의 상인들에게 세금을 비정상적으로 거두어들였고,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현실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쪽 바닥에는 ‘제국세’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는 세금과 더불어, 그들에게 바치는 뇌물 없이는 장사할 수 없다는 의미죠.”
그는 국왕이기 이전.
레드포드 제일의 상인이었다.
약소국의 귀족으로 태어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그는 술잔을 기울일 때면 만약을 생각하곤 했다.
“그런 일을 경험할 때마다 제가 바라던 것은 적어도 상식 안에서의 일 처리였습니다. 부귀영화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희가 납득할 만한 세상을 만드신다면, 설령 제가 처형대에 오르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기꺼이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니, 제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레드포드 국왕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감정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누가 명령하지도, 사전에 계획되지도 않았지만, 각 대표의 수뇌부들은 차례로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이번에는 움베르토 국왕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아마 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겁니다. 움베르토는 크로노스와 국경이 붙어 있었고, 한순간도 편안하게 잠을 이룬 적이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심적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늘 아래 떳떳하게 살았다면, 적어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길 바랍니다. 드미트리가 말하는 미래가 정말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 주는 삶이라면, 저는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에 이어.
프랑크 국왕.
에드윈 헥토르.
다니엘 카이로까지.
이미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도, 새로운 세상에서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말했다.
뜻이 모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의지를 받아들였다.
조금 전까지는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면, 지금부터는 새로운 관계에 걸맞은 태도를 보였다.
“너희가 말하는 충성 맹세를 나는 부정하지 않겠다. 머지않은 미래에 나는 드미트리가 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할 것이다. 너희는 그 자리에서 나의 즉위식(卽位式) 자리를 빛나게 할 것이며, 그날부로 샐러맨더 대륙은 나 로만 드미트리의 통치 아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표정을 바꾸었다.
일에는 선후가 있다.
새로운 세상을 선포하기 이전, 로만 드미트리는 과거의 잔재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총력을 다해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할 것이다. 명심하라. 숙청 과정에 개인적인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하라. 죄가 있다면 확실하게 처벌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의 초석을 쌓을 것이다.”
* * *
그 시각.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이 있었다.
골든 뱅크의 은행장 호프만은, 다급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빨리 짐을 옮겨라. 한시가 급하다!”
대륙 전쟁.
두 제국과 왕국 연합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일 그때, 호프만은 당연하게도 크로노스 제국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골든 뱅크의 비밀을 확인한 이후.
골든 뱅크의 존재 이유를 깨달은 그로서는, 알렉산드르가 승리하리라는 강한 확신에 본인의 의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패배하고 말았다.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르가 죽고 크로노스 최고 권력자인 멤피스 후작마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을 당해 버렸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호프만은 곧바로 도망칠 준비를 서둘렀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으로 불어올 피바람을 피하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내가 아는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자비를 베풀 사람이 아니야. 두 제국에 빌붙었던 존재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처단해 버리겠지. 이대로 있다간 나 또한 무조건 죽는다. 그리고 지금 골든 뱅크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빌렸던 돈들을 갚을 여력조차 없다.’
전쟁이 끝난 직후.
사방에서 연락이 밀려들었다.
골든 뱅크의 이름값을 믿고 돈을 빌려주었던 사람들이, 전쟁에서 패배하자마자 독촉 연락을 보냈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 대가였다.
막말로 크로노스가 패배할 줄 몰랐다.
정확히는 알렉산드르의 종으로서, 그가 승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에 사활(死活)을 걸었다.
골든 뱅크의 자본을 모두 끌어모아서 전쟁 물자를 전달했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인맥들을 총동원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로 인해 골든 뱅크는 빚더미에 앉았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갚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고로.
다른 방법은 없었다.
호프만은 크로노스의 수도가 함락되자마자, 곧바로 은닉했던 재산을 챙기고 도망칠 방법을 찾았다.
아마 앞으로는 절대 골든 뱅크의 은행장으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마법으로 얼굴도 바꾸고, 이름도 바꾸고, 화려했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때였다.
내부 정리는 얼추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그 소리에.
호프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 *
찰나의 순간.
호프만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당황할 필요 없어. 채권자들은 아직 상환 기간이 되지 않아서 내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고, 드미트리는 발할라와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았다. 스노딘 백작이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하는 상황에서, 골든 뱅크의 본거지가 있는 발할라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겠지.’
그때만 해도.
스노딘 백작의 세력은 건재했다.
국제회의에 참석하려고 길을 떠난 그가, 설마 회의 도중에 끌려갔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호프만은 욕심이 많았다.
은닉한 재산을 현금화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아직은 본인에게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며칠 안으로는 결판이 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누가 들이닥쳤든, 최대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만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걸음을 옮겼다.
골든 뱅크의 은행장으로서 당당한 태도를 드러내며, 그는 불청객을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 흐익?!”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력을 대동하고 들이닥친 사람들.
그들의 선두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 능글맞은 웃음을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호프만 씨.”
그는 바로.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호프만에게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