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8화 (418/615)

418화 승자 독식 (4)

사람마다 각자 두려운 존재가 있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사람,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 피를 무서워하는 사람 등등 각자가 생각하는 두려움은 다른 법인데, 몇 년 전의 호프만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막대한 재력을 7성 오라처럼 휘두르는 그에게,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릴 때면, 호프만은 식은땀으로 흥건한 얼굴로 한 인물을 떠올렸다.

‘파비우스 백작.’

그는.

악몽, 그 자체였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복수하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때, 그때마다 마주친 파비우스 백작은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앞세워 호프만을 무릎 꿇렸던 그때의 일로 인해, 호프만은 파비우스 백작을 마주하자마자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럴 때 그를 만난다는 것.

절망적이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파비우스 백작이 자리에 앉으며 실실 웃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마치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분주하게 짐을 싸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 모습에.

숨이 막혔다.

저 웃음.

저 능글맞은 태도.

파비우스 백작을 바라볼수록 악몽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것 같았지만, 호프만은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닉한 재산을 현금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는 조금이라도 여지를 주는 순간 자신을 뼈째로 집어삼킬 인물이었다.

호프만이 말했다.

“……어떤 의도로 그리 말씀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골든 뱅크는 크로노스 제국을 지원했고,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요. 하지만 저희에게도 살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실 전쟁이라는 것은 항상 편을 가를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단순히 반대편 세력을 지원했다고 해서 그 존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면, 이 대륙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에이, 선수끼리 왜 이러실까. 골든 뱅크는 단순히 지원한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압니다. 저희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죄는 명백했다.

자금의 출처를 숨기려고 한들, 파비우스 백작과 같은 능구렁이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파비우스가 자신을 찾아온 이상, 성과를 거두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대륙 전쟁이 끝났습니다. 대륙을 지탱하던 양대 산맥이 무너진 상황에, 드미트리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는 저와 같은 전문가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전폭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배상금도 물론 지급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공식 석상에서 사죄도 하겠습니다.”

머리를 숙였다.

자존심 따위는 버렸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만약 파비우스 백작이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준다면.

그사이에 귀신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 공수표라 할지라도, 상대의 마음을 현혹할 말이라면 무엇이든 내뱉어야만 했다.

슬쩍 눈치를 살폈다.

파비우스 백작이 묘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호프만이 이를 악물며 비장의 방법을 택했다.

쿵.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바닥에 처박으며,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불쌍하게 여기시어,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십시오!”

* * *

호프만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상대가 길을 열어 주지 않는 한,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래도 골든 뱅크의 은행장으로서 대륙을 호령하던 존재가, 지금은 무릎을 꿇고 감정에 호소했다.

“파비우스 백작님. 저도 그동안 제가 저질렀던 실수들을 정말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알렉산드르 그 악독한 인물의 계획에 가담하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작님에게 묻겠습니다. 백작님 또한, 처음부터 로만 드미트리 님의 사람은 아니지 않으셨습니까.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이 호프만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주신다면, 골든 뱅크는 앞으로 드미트리의 든든한 조력자가 될 것입니다.”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하인이 황급히 무언가를 가져오자, 호프만은 커다란 상자를 내밀며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비우스 백작님으로서는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은 잘 압니다.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호프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잘 전달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건 금괴 상자입니다. 평생 놀고먹어도 문제가 없을 양이며,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을 깨끗한 물건입니다. 이건 단순히 제 성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이번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매해 이와 똑같은 양의 금괴를 바치겠습니다.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목소리를 높였다.

구구절절 감정에 호소하는 그 모습에서, 호프만이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이 보였다.

그런데.

“쯧쯧, 이래서 셈이 빠른 녀석들은 싫다니까. 호프만. 일단 이 순간을 넘겨서 도망이라도 칠 속셈인 건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속을 훤히 꿰뚫는 발언에, 호프만은 황급히 고개를 들며 손사래를 쳤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긴 개뿔. 내가 널 찾아오면서, 골든 뱅크가 어떤 상황인지 조사하지 않았을 것 같아? 주군께서 널 처벌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골든 뱅크는 무턱대고 빌린 돈들을 갚지 못해서 무너지고 말겠지. 일단 노력은 가상하네. 그래도 골든 뱅크의 은행장이나 되는 인물이 무릎을 꿇고 뇌물을 바칠 정도라면, 예전의 나는 분명히 금괴 상자를 집어삼킬 고민을 했을 거야.”

웃었다.

실실 웃는 그 웃음이, 호프만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모시는 분은 정말 무서운 분이시거든. 발할라 최고 권력자였던 비에토 공작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날려 버렸고, 크로노스 최고 권력자였던 멤피스 후작은 경비 하나 없이 전시했는데도 말라 죽게 만들어 버렸어. 그게 바로 주군의 힘이야. 나는 그리고 주군이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그분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내게 부여된 역할만 잘 이행한다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지.”

툭툭.

머리를 밀었다.

마치 멍청한 녀석이라고 비하하듯, 파비우스 백작은 호프만을 내려보았다.

“그러게 진즉에 잘하지. 병신. 여봐라, 당장 골든 뱅크의 은행장 호프만을 포박하라!”

사형 선고였다.

호프만이 다급하게 일어나며 반항했지만, 그의 발악은 그가 끌려가는 최후를 막아 내지 못했다.

* * *

난리가 난 것은 호프만만이 아니었다.

발할라의 수도.

마린에서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스노딘 백작을 따르는 사람들이, 앞으로의 미래를 논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스노딘 백작님은 별일 없으시겠죠.”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수도까지 왜 찾아왔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드미트리의 위상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을 텐데, 일단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으니 더는 트집을 잡지 못할 겁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앞으로의 미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발할라가 이 역경을 이겨 내고, 어떻게 드미트리라는 거대한 산을 무너트릴지를!”

스노딘 백작의 오른팔.

라이노 자작이었다.

이미 취기가 조금 오른 모양인지, 그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사실 막말로 이번 전쟁에서 발할라가 패배한 이유? 전적으로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 때문이었습니다. 에드윈 헥토르가 아무리 천공의 마탑을 거느린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만 없었다면 우리는 진즉에 헥토르를 밀어 버리고 드미트리의 영토에 깃발을 꽂았을 겁니다. 여러분.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재능이 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앞으로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다시는 나오지 않을 재능입니다. 인간이라면 결국은 늙을 수밖에 없고, 로만 드미트리가 약해지거나 그가 죽어 버린다면. 그때는 우리가 바라던 기회의 순간이 찾아올 겁니다.”

탁.

술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의 사람들도, 경쾌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옳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는 미래입니다. 우리는 먼 미래를 보고 자존심을 굽히기로 했고, 스노딘 백작님은 우리를 대표해 희생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똘똘 뭉쳐야만 합니다. 알렉산드르가 오랜 세월 대륙을 야금야금 갉아먹은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이 들끓는 야망을 표출하며 발할라의 위상을 되찾는 날이 찾아올 겁니다. 만약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제가 그때 살아 있지 못할지언정, 제 뒤를 이은 후인들이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겠지요.”

눈빛이 적의로 불타올랐다.

강렬한 열망에,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아이른 남작. 그 빌어먹을 녀석의 핏줄을 모조리 말살할 것입니다. 지금은 로만 드미트리를 등에 업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끝까지 인내하고 준비한 우리일 것입니다.”

“발할라를 위하여!”

“발할라를 위하여!”

술잔을 부딪쳤다.

그날.

그들은 크로노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술잔을 부딪치며 대낮부터 완전히 취해 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비밀 모임의 이름도 지었다.

레볼루션(revolution)! 본인들의 노력을 역사책에 기록하자며 껄껄 웃어 댔고, 어느 순간 스르르 잠에 빠져 하루를 그렇게 보내 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정신을 차린 귀족들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 *

“아, 아이른 남작. 이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제발, 제발 우리를 풀어 주게.”

그 전날.

의기양양했던 라이노 자작은 없었다.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는 그는, 정신없이 술을 마시는 바람에 엉망이 된 얼굴로 간절하게 빌었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동안.

스노딘 백작을 필두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지만, 하인들은 그 사실을 귀족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들도 알았다. 레볼루션이라 명명한 집단의 미래가 끝났음을.

아이른 남작은 귀족들의 위치를 파악한 뒤, 그들이 잠들었다는 사실에 일단 주변에 있는 병력부터 차례로 정리했다.

끝났다.

이미 모든 것이 정리된 상태였기에, 라이노 자작과 그 무리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아이른 남작. 지금은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따르는 게 옳다고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발할라를 위해 절대 옳은 선택이 아니야.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한다면 대륙의 판도가 어떻게 변할 것 같나. 그때부터 발할라는 제국으로서 존재할 수 없을 거고, 제국의 역사는 우리를 발할라의 수치로 기억하겠지. 그러니까 제발 진정하게. 우리를 살려야만, 훗날을 대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대체 왜 모르는 건가!”

목소리를 높였다.

계속해서 떠들어 대자, 아이른 남작이 병사들을 멈추어 세우고는 라이노 자작을 바라보았다.

“자작님. 전 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혐오가 있었습니다. 발할라든, 크로노스든. 본인들만의 잇속을 챙기겠다고 남들을 짓밟는 세상이, 정말 부당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비에토 공작을 따랐다.

슈테른 발할라에 대항하는 그라면, 발할라를 조금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그조차도 거짓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른 남작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제가 혐오하는 부류들과는 다릅니다. 그는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집어삼키지 않고, 각 나라를 지도할 새로운 인물들을 선출했습니다. 그것도 본인의 독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각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를 빌려서 말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왜 로만 드미트리 님이라면 아득바득 목숨을 걸고 싸우는지를. 저는 발할라가 앞으로 우리가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을 되찾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 님이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고 말한 존재들을 단 한 명도 살려 둘 수 없습니다.”

아이른 남작.

일개 남작에게 황제의 권력이 부여되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그 상황에, 아이른 남작은 큰 뜻을 품었다.

“앞으로 발할라는 황제 개인의 의사에 결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위원회(委員會)를 결성할 것입니다. 모두가 부당하다고 말한다면, 황제가 원할지라도 발할라는 그 뜻을 따르지 않을 생각입니다.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당신과 같은 쓰레기들은 계속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발할라에서 일차적으로 거르고, 로만 드미트리 님의 법도가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다스린다면. 발할라는 순수하게 전사로서의 삶을 추구하던 그때로 돌아가리라고 믿습니다.”

강한 어조였다.

아이른 남작의 말을 들으며, 라이노 자작은 본인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끝난 게임이었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미래를 말하던 레볼루션은, 본인들 앞에 어떤 미래가 들이닥쳤는지도 모르는 한심한 집단에 불과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병사들은 그를 들어 올리며 억지로 계속 가던 길을 이동했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라이노 자작이 삶을 포기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마린의 감옥은 이 방향이 아닐 텐데.”

처형대도.

감옥도 아니었다.

점점 익숙한 광경이 펼쳐지자, 라이노 자작은 뒤늦게 워프 게이트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른 남작이 말했다.

“드미트리로 갈 겁니다. 그곳에는 라이노 자작님과 같은 죄수들이 많습니다. 드미트리를 배신한 아레스, 무법 지대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카르만, 그리고 이번 전쟁에 깊이 관여한 존재들. 그들 모두를 처형하고…….”

로만 드미트리는.

평범하지 않았다.

축복받아야 할 제국의 탄생을, 피와 시체 위에서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드미트리가 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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