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승자 독식 (5)
격변(激變)의 시기였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는 그때, 드미트리 지하 감옥의 죄수들은 세상과 동떨어진 시간을 보냈다.
어둠으로 물든 공간.
아레스는 초췌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던 외모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은발의 머리칼은 피로 엉겨 붙어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시선을 내리깔자 양 손목과 양 발목을 결박하고 있는 마법 아티팩트가 보였다.
그것은 신체 내부에 흐르는 마나를 갉아먹어, 오라 검사인 아레스를 일반인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었다.
탈옥은 불가능했다.
아니, 탈옥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처음 감옥에 수용되고 지금까지, 아레스는 단 하나의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내가 어째서 패배한 거지?’
패배.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대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빈민가를 전전하던 소년에 불과했고, 분명히 케빈을 처음 만났을 때 그와 자신 사이에는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
단 한 번도 패배는 생각하지 않았다.
케빈을 맞닥트리며 그를 상대했을 때도, 아레스는 자신이 밀리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패배했다.
머릿속에서 반복되며 떠오르는 상황에, 자신의 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나만의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발악해 왔다. 알렉산드르 님의 가르침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했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 갈 개척자(開拓者)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그간의 노력이 로만 드미트리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가. 그를 만나서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처럼, 내가 그동안 노력해 왔던 시간이 케빈을 쓰러트리지도 못할 만큼 하찮았다는 건가.’
참담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아레스는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런 비약적인 발전조차도, 자신보다 먼저 로만 드미트리를 경험했던 케빈을 상대로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얼마나 허망한 결과란 말인가.
자신이 아득바득 발악했던 시간이 무의미했다는 사실을 강요받는 상황에, 아레스는 머리를 헝클이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숨이 막혔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알렉산드르를 받아들였던 그때부터, 자신은 잘못된 미래를 향해 나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거지 같은 인생이구나.”
천장을 보았다.
햇볕이라고는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캄캄한 미래와 같은 먹빛 천장을 바라보며 아레스는 시간의 개념을 잊어 갔다.
바깥에서는 전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드미트리는 생각보다 강력한 전력으로 크로노스의 계획을 막아 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승리를 확신하진 않았다.
알렉산드르.
그는 괴물이다.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하면서도, 아레스는 자신이 그동안 지켜봐 왔던 알렉산드르의 힘을 믿었다.
아직은.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그때였다.
끼익.
저 멀리, 지하 통로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
화륵.
횃불이 일렁였다.
불빛에 드러난 조나단 기사단장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아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드미트리가 승리했군요.”
“그래.”
최악의 결과였다.
감옥에서 반복되는 시간을 보내며, 그래도 알렉산드르의 9서클 마법이라면 상황을 뒤엎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조나단 기사단장의 평온한 눈빛에서, 치열했던 전쟁의 결과가 드미트리의 승리로 끝났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끝까지 알렉산드르의 승리를 바랐던 이유는, 단순히 알렉산드르를 향한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틀렸구나.’
로만 드미트리.
그를 따르며 아레스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새로운 세상의 지식은 자신을 빠르게 발전시켰고, 시간이 갈수록 알렉산드르를 만나기 이전에 로만 드미트리를 만났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밤. 아레스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갈등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나, 항상 결론은 알렉산드르로 끝이 났다.
9서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마법 한 번에 수도를 날려 버릴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알렉산드르를 배반할 수 없었다.
복잡한 문제였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알렉산드르를 쓰러트릴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했을 때, 아레스는 새로운 미래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었다.
초췌한 얼굴을 드러내며, 조나단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제게 설명해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가 알렉산드르를 어떻게 쓰러트렸는지를.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어야만 했습니다.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알렉산드르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괴물입니다. 인간의 육신으로 신의 영역에 도달한 존재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겁니까.”
자신의 모습.
구차해 보이더라도 상관없었다.
진실을 듣고 싶었다.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를 어떻게 쓰러트렸는지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하더라도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자신은 상식 안에서의 결단을 내렸다.
만약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알렉산드르와 로만 드미트리 중에는 알렉산드르를 선택하는 것이 옳았다.
그 말에.
조나단 기사단장이 싸늘한 표정을 보였다.
“죄인에게 설명해 줄 것은 없다. 주군은 늘 그래 왔듯, 당연하게 승리했을 뿐이다.”
신호를 주었다.
병사들이 다가가 감옥의 문을 열었고, 아레스를 양쪽에서 잡아 밖으로 끌고 나왔다.
무력했다.
대륙을 호령하던 맹수가 일개 병사들의 손길조차 뿌리치지 못했고, 조나단 기사단장을 바라보며 대답을 바라는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번에도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대답을 바라거든 주군에게 직접 물어라. 오늘은 주군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즉위식(卽位式)이 있는 날이다. 그리고.”
싸늘했다.
아레스가 배반한 그날부터.
아레스와 같은 인간들에게, 조나단 기사단장은 더는 사람 좋은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를 비롯한 죄수들의 처형식이 진행될 것이다.”* * *
드미트리.
그곳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즉위식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사람들은, 거대한 처형대를 발견하고는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일반적이지 않았다.
보통 즉위식은 새로운 앞날을 위해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얘기하는 것이 정상이건만, 드미트리는 즉위식을 시작하기도 전에 처형대를 모두에게 선보였다.
그 위에는 죄수들이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의 죄수들은, 참담한 얼굴로 차마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마주 보지 못했다.
이윽고.
웅성웅성.
사람들이 시끄러워졌다.
인파를 뚫고 나타난 한 존재로 인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다.”
“……설마 처형식을 직접 진행하시려는 건가.”
로만 드미트리의 복장.
심상치 않았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에, 즉위식에 걸맞은 휘황찬란한 복장을 착용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전장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무장을 갖춘 모습이었고, 허리춤에 매단 검은 사람들에게 섬뜩한 기분마저 들게 만들었다.
철그럭, 철그럭.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처형대 위에 올라선 로만 드미트리는, 수많은 인파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처형식을 진행하겠다.”
순간.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파격을 행했고, 미리 상황을 전달받은 병사들이 죄수 한 명을 앞으로 끌고 나왔다.
“죄인의 이름은 카르만이다. 카르만은 오델리아 왕국이 무너진 이후, 망국(亡國)의 백성들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폭동을 일으켰다. 만약 그들의 뜻이 오델리아의 재건에 있었다면 드미트리는 그 뜻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르만의 실체는 알렉산드르를 따르는 하수인에 불과했고, 그는 대륙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 맞춰 의도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슥.
검을 들었다.
카르만의 목에 검을 겨누자, 카르만은 바들바들 떨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고로, 사형(死刑)을 선고한다.”
번뜩.
푸확.
피가 튀었다.
단번에 머리를 날려 버리자, 발악하던 카르만의 머리가 하늘에 떠오르며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웃음과 행복이 가득한 황제의 즉위식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시작부터 죽음과 피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병사들이 머리를 잃은 시체를 끌고 갔다.
새로운 죄인이 처형대 위에 올랐고, 바닥에 흩뿌려진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음 처형이 진행되었다.
“죄인의 이름은 호프만이다. 골든 뱅크의 은행장으로서, 호프만은 알렉산드르의 진실을 알고도 크로노스 제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고로…….”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사형을 선고한다.”
번뜩.호프만.
한때 대륙을 호령했던, 골든 뱅크의 은행장은 그렇게 허무하게 머리가 날아갔다.
처형대 위.
사람들 앞에서 직접 처형하는 존재들은 대부분 굵직한 인물들이었고, 그들의 죄목을 읊으며 처형을 진행할 때마다 사람들은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드미트리의 법도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았지만, 설마 즉위식을 이렇게 시작할 줄은 몰랐다.
처형은 계속되었다.
피가 흘렀다.
바닥이 흥건히 물들다 못해, 처형대 밑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마지막 죄수를 남겨 둔 상황에, 갑작스럽게 지켜보는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아레스다.”
“아레스라니.”
“정말 아레스도 처형할 생각이신 건가.”
아레스.
모두에게 익숙한 얼굴이, 마침내 처형대 위에 올랐다.
* * *
아레스.
참 복잡한 존재였다.
그는 배신자다.
중요한 순간에 드미트리를 배신했고, 그의 배신으로 인해 드미트리는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했다.
사실 처형대에 오른 그 누구보다도 처형할 이유가 명확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눈빛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레스가 지금까지 드미트리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포로 사건.
아레스는 선봉에 섰다.
크로노스 제국을 향해 오라를 휘두르며, 포로를 되찾는 일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르카디아 대륙의 문제를 해결할 때도 아레스는 선봉에 있었고, 특히 발할라 제국과의 분란에서 아레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홀로 사지에 들어갔다.
모두가 그때의 일을 기억했다.
아레스의 공이 있었기에, 드미트리는 압도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사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 나온 아레스가 처형대 위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참담한 모습이었다.
드미트리를 빛내던 영웅이 초췌한 몰골을 보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힘을 잃은 눈빛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레스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이렇게 나약한 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선 것은 처음이었고, 몇몇 인물들은 복잡한 감정에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죄목을 말하기 전에, 아레스가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주군. 제게 참회(懺悔)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습니다.”
구차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의 지푸라기를 붙잡았다.
“제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드미트리를 배신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드미트리를 위해 헌신했던 날들이 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분쟁, 아르카디아 대륙의 재앙, 그리고 이번 발할라와의 전쟁까지도. 저는 항상 드미트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아레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보며 감정에 호소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드미트리를 배신하는 것은 제게도 어려운 문제였고, 지금도 수도 없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주군.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드미트리가 제국(帝國)으로서 나아가는 길에는 수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그때마다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선례를 허락해 주십시오. 사람들을 벼랑 끝에 몰지 마시고,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선례를 허락하신다면 분명히 제국의 앞날이 밝을 것입니다.”
예민한 문제였다.
선례.
단호하고 확실한 태도는 기강을 확립했지만, 그 경계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아레스는 그 부분을 언급했다.
드미트리가 변화하는 이 시점에, 용서받을 기회는 군중들 앞에서만 가능했다.
“저를 살려 주신다면, 이제까지 그래왔듯 저는 드미트리에 필요한 존재가 되겠습니다.”
사람들이 숨죽였다.
일리가 있었다.
다른 죄수들은 몰라도, 아레스는 드미트리에 필요한 존재였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맴도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아레스. 드미트리가 제국이 된다고 한들, 그동안 추구했던 방식이 달라질 이유는 없다.”
동요하지 않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아레스의 모습을 내려보았다.
“너에게는 분명히 상황을 돌이킬 기회가 있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알렉산드르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어떤 의도를 지녔든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드미트리가 추구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언행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각인하기 위해서는, 단 한 번의 선례도 허락할 수 없다.”
읍참마속(泣斬馬謖).
그간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레스를 중용하면서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으나, 지도자는 모든 선택에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앞으로 드미트리 제국이 따를 법도다.”
극적인 결과는 없었다.
모두에게 보란 듯이.
로만 드미트리가, 아레스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번뜩.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