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승자 독식 (6)
정적이 내려앉았다.
처형대 아래에 모여든 군중들은, 충격적인 광경에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뱉질 못했다.
뚝, 뚝.
피가 흘렀다.
바닥에 널브러진 아레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눌어붙은 핏자국을 따라 처형대 밑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동의했다.
아레스가 그동안 어떤 공을 세웠다고 한들, 드미트리를 배반한 행위는 처형해야 옳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두려움은 별개였다.
피로 물든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사람들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내가 두려운 것이겠지.’
사람들의 감정.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아레스가 처형당했다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도 면죄부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일부는 단 한 번의 선례를 바랐다.
혹시라도 본인이 아레스의 입장이 되었을 때, 벼랑 끝에서도 살길이 있다는 사실을 한 번쯤은 확인받기를 원했다.
그것은 인간의 순수한 생존 욕구였고,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하는 것과는 별개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이에 대해.
크리스는 말했었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의 의견에는 동의하나,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는 사람들을 벼랑 끝에 몰아넣는다고.
만약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 때.
조금이라도 용서의 여지가 있다면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겠지만, 무조건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택할 확률이 높았다.
복잡한 문제였다.
어떤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모호한 태도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세상에 완벽한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다스리던 무림을 태평성대(太平聖代)라고 표현했지만, 그 와중에도 고통받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다고 내가 행했던 방식이 틀렸다고도, 옳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전생.
정점의 자리에 올랐다.
백중혁 밑에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고, 그들 모두가 만족하는 통치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명확한 기준이 필요했다.
크리스가 조언했던 것처럼 선례를 허락하지 않는 공포 정치는 몇몇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트리겠지만, 적어도 사람마다 달라지는 판결로 인한 불합리함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기에, 최소한 모두에게 공평한 기준을 내세웠다.
백중혁의 무림은.
상식적이었다.
상식 안의 세상이었기에, 사람들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경외심(敬畏心)을 느꼈다.
‘나는 백성들에게 편안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람들과 친밀하고 깊은 유대 관계를 맺는 지도자는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미래와 부합하지 않았다.
서로가 불편해야만 한다. 언제라도 사이가 틀어질 수 있음을 알기에, 태평성대에도 안일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정점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편안하게 잠드는 삶은 한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슥.
검을 거두었다.
사람들을 내려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소리쳤다.
“오늘을 기억하라. 드미트리가 정한 법도를 어긴 사람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빈민이라고 해서, 부유하다고 해서. 처벌의 기준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범자(戰犯者)인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이 자리에서 목이 날아간 것처럼, 앞으로 너희가 살아갈 세상에서 예외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려웠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로만 드미트리가 말한 세상을 진심으로 반겼다.
경외는.
두려워하되 공경한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경외했다.
그때였다.
“드미트리 국왕 폐하가 행차하십니다.”
즉위식을 위해, 드미트리 국왕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조나단 기사단장의 엄호를 받으며 걸어오는 드미트리 국왕은, 한때 평민 출신의 귀족이라고 무시 받았던 시절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머리에 쓴 왕관(王冠)과 적당히 화려하면서도 왕의 위엄을 강조한 복장.
일반 사람들보다 머리가 한두 개는 더 큰 거대한 몸집은, 바로 옆에서 왕의 행차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드미트리 국왕은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들아.’
처형대 위.
로만 드미트리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잘 갖추어진 복장은 처형을 진행하며 피로 더럽혀졌고, 싸늘하고 단호한 표정은 어리광을 피우던 시절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몇 년 전.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며 아픈 손가락이었던 아들이다.
그가 잘 자라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적당하게.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게.
남들에게 인정받는 딱 그 정도의 수준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었다.
현실은 달랐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는 변해 버렸고, 변방의 영지에서 만족하기에는 과할 정도의 재능을 선보였다.
마치 해일이 들이닥치듯.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눈부시게 빛나는 활약을 보이며 빠르게 발전해 버렸다.
남부 전선의 영웅에서 동북쪽 일대의 지배자로, 카이로의 반란을 제압하며 실세로 떠오르더니, 왕국으로도 모자라 제국의 황제를 목전에 두었다.
복잡했다.
기뻐할 일임에는 분명하나, 드미트리 국왕은 아들의 행복을 위해 정녕 옳은 일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반복되는 투쟁.
피로 물든 얼굴.
그리고 사람들의 두려움까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가기에는, 로만 드미트리는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며칠 전.
드미트리 국왕은 아들을 불러들였다.
만약 지금이라도 등에 짊어진 짐을 내려놓길 바란다면, 제국의 선포를 철회하고 드미트리 왕국의 후계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말했다.
드미트리 국왕의 진심이었다.
아들의 성공을 바라 왔으나, 모순적이게도 샐러맨더 대륙 전체를 짊어지는 고독한 삶을 사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지금 제가 선택하려는 길이 가시밭길임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최우선의 가치는, 앞으로 살아갈 삶에 그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가 감당해야만 합니다. 누군가는 저를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저를 모함할지라도, 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제가 원하는 삶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이 로만 드미트리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 세상을 통치하기를 바랍니다.”
그날.
드미트리 국왕은 아들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아들이 평안한 삶을 살길 바라나, 선택했다면 그것을 지지해 주는 것 또한 아비의 몫이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의 의지가 확실하기에. 한발 물러나, 앞으로를 지켜봐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형대 위에 올라섰다.
시체를 모두 치워 버린 그곳에서, 드미트리 국왕은 손수건을 꺼내 아들의 피 묻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들아.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이 세상 전부가 변할지라도, 내가 너의 아비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황제의 자리를 내려놓고 나를 찾아오거라.”
웃었다.
드미트리 국왕은 몸을 돌리더니, 드미트리 부자를 우러러보는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드미트리 제국의 탄생을 선포하고, 동시에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겠다!”
* * *
성대한 의식이었다.
루나 왕국의 사제가 제국의 탄생을 축복하는 기도문을 읽으며 포문을 열었고, 의식이 차례대로 진행되며 각국의 사절들이 축하 인사를 전해 왔다.
즐거운 자리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상석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과거의 한순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나는 결국 바라던 바를 이루었다.’
전생도 같았다.
삶의 밑바닥에서 정점에 오르기를 바랐던 소년은, 가시밭길을 걸어 천마라고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때는 자신의 삶이 마침내 안정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익숙했던 얼굴들의 빈자리와 이후 고독한 삶을 경험하며 생각이 바뀌었다.
꿈을 이루었다는 것은.
기쁘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이후 밀려드는 상실감과 무력감에, 백중혁은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똑같은 꿈을 이루었다. 누가 내게 로만 드미트리로서의 삶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투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기에. 끝이 허망할지라도, 적당하게 타협하는 삶은 스스로가 허락할 수 없다.’
똑같은 삶.
똑같은 목적.
하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히 전생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조나단 기사단장.
한스.
크리스.
케빈.
그 외 많은 사람들.
전생의 자신은 꿈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을 잃었고, 천마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다.
로만 드미트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제국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자신의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지 않도록 방관하지는 않았다.
울타리를 세웠고.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도록 지식을 베풀었다.
선을 그어 자신의 사람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처단하며, 드미트리를 철옹성(鐵甕城)으로 만들었다.
목적은 같으나.
많은 것이 달랐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투쟁하는 삶을 살았고, 전생에 후회했던 실수들은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자리를 진심으로 즐겼다.
정점의 자리에 오르고 허망함을 느꼈던 전생과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로서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드미트리 제국.
드미트리 황제.
새로운 이름이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끓는 가운데, 드미트리 국왕이 마침내 의식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드미트리의 후계자여. 앞으로 나와 왕관을 쓰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걸어 나가, 드미트리 국왕을 마주 보는 자리에 섰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드미트리 국왕은 위엄있는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었다.
그 순간.
“이로써 나의 아들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와아아아아아!”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드미트리 광장.
그곳이 열렬한 환호성으로 물들었다.
* * *
순서가 모두 끝났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로만 드미트리는, 왕관을 쓴 채로 사람들 앞에 나와서 말했다.
“그동안 대륙은 갖은 위험에 시달려 왔다. 크로노스 제국의 황제였던 알렉산드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고, 그는 대륙을 정벌하기 위해 위험한 계획을 세웠다. 나는 이 자리에서 너희에게 그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앞으로 너희가 살아갈 새로운 세상에서, 대륙 전체가 직면해야 할 문제를 숨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알렉산드르.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렸던 존재였다.
그러나 아직 그들로서는, 알렉산드르의 존재가 정확히 어떤 위험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는 세상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정보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드르는 마계와의 통로를 열었다. 그 계획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고, 언젠가는 이 세상에 실체화된 위험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에게 마계와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은 아니다. 너희는 긴장하고 위험을 인식하고 있되, 나 로만 드미트리를 믿어라. 나는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로서 마계와의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알렉산드르의 계획이 이 세상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위험 요소를 차단할 것이다.”
엄청난 존재감이었다.
마계는 단어만으로도 충격적이건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
황제가 말했다.
위험을 인식하되, 본인을 믿으라고.
겨우 변방의 후계자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로만 드미트리라면, 역사책에서나 나올 법한 마계의 존재조차도 어떻게든 해결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경외심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두려워하기에, 그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 또한 있었다.
맹목적으로 믿었다.
자신들의 황제를, 이 세상을 통치할 존재를.
사람들은 밝게 빛나는 눈동자로,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겠다는 강한 믿음을 표출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의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지금부터 근심과 걱정은 뒤로 미루어라. 나는 죄인에 한해서는 단 한 번의 예외도 허락하지 않으나, 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이들에게는 그간의 희생을 과하다고 생각할 만큼 충분히 보상할 것이다. 지금부터 호명되는 이들은 앞으로 나오거라.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시작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