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논공행상(論功行賞) (2)
지난 며칠.
케빈도 크리스와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이미 막대한 포상금을 받았기에 돈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고, 그렇다고 작위를 받아 귀족으로서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빈민가를 전전하던 시절에는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그때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부귀영화를 택했겠지만, 드미트리의 실세로 평가받는 현재의 그는 달랐다.
원하는 삶.
마음먹은 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케빈은, 며칠이 흐르고 나서야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갔다.
“주군. 제게는 더 이상의 금화도, 권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주군의 곁에 남고 싶습니다.”
“보상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저만을 위한 검을 받고 싶습니다. 전에 하사받은 검도 과분할 만큼 훌륭하나, 검사로서의 제 개인적인 욕심에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장 실리적인 보상은 명확했다.
케빈은 천마검법을 익혔다.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로 나누어진 그 강력한 검술의 전반부만을 알고 있기에, 이후 초식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것이 검사로서는 최상의 선택지였다.
하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번 전쟁을 경험하며 케빈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크리스는 자신과는 달리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고 들었기에, 자신 또한 스스로 발전해서 크리스를 쓰러트리는 업적을 이루고 싶었다.
고로.
이번 보상은 질투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케빈은 크리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해 퍼스트 노-네임을 내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현재 세컨드 노-네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훌륭한 검인지를 알면서도 크리스를 향한 질투심이 있었다.
자신보다도 더 상위의 검을 하사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질투심.
매번 그것이 마음에 걸림돌처럼 남았기에, 이번 기회에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검을 선물 받고 싶었다.
정말 순수한 욕망이었다.
보상의 선택권을 받은 사람들이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상황에서, 케빈은 스스로가 원한다면 앞으로 평생을 부귀영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미래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되겠다고 스스로의 팔을 잘랐던 그 순간부터.
케빈에게 있어 로만 드미트리와의 삶은 무엇보다 우선되었고, 그렇기에 그의 곁에 남고자 했다.
언젠가는.
사람은 죽는다.
자신도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드미트리의 역사에 크리스보다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를 대표하는 가장 첫 번째 인물로 기록되기를 바랐다.
어떤 사람들은 케빈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로만 드미트리의 보상은 일생일대의 기회인데, 겨우 검 한 자루에 날려 버리느냐고.
공감은 필요하지 않았다.
빈민가를 전전하던 시절.
로만 드미트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정은, 신도들이 신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그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신이었다.
머리를 숙이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얼굴로 그를 위한 상을 내렸다.
“네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다만, 검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앞으로 한 달 뒤.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검사 케빈만을 위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검을 하사토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활짝 웃는 케빈의 얼굴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 * *
케빈의 소식.
크리스에게도 전해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검을 요구했다는 소식에, 크리스는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이게 그렇게까지 탐이 났던 건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케빈이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갔다는 소식에, 솔직히 검사로서 발전하기 위한 무언가를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기 이전.
자신은 그때도 촉망받던 검사였던 것과는 다르게, 케빈은 빈민가를 전전하며 매일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소년에 불과했다.
시작점이 달랐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는 케빈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 주었고, 크리스는 방관하며 스스로 발전하라고 말했다.
둘의 차이는 단순히 실력만을 논할 문제가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발전해 왔던 크리스기에, 케빈이 열등감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절대 패배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케빈은 스스로 발전하는 방향을 택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아레스를 쓰러트리는 결과까지 증명했다.
‘케빈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더는 빈민가의 소년이 아닌 검사 케빈으로서 존재하기에, 지금의 나로서는 케빈을 상대로 무조건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케빈은 아레스를 쓰러트렸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 또한 다르다고 확신할 수 없겠지.’
아레스는 강하다.
모병 심사를 진행하던 당시,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상대로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던 크리스다.
그런 존재가.
케빈에게 붙잡혀 처형대에 올랐다.
아레스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크리스의 머릿속에 상당한 혼란이 일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레스와 싸웠다면 자신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케빈의 성장은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진심으로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자리를 내줄 생각은 없었다.
이번 보상으로 확실해진 사실이 있었다.
케빈은.
자신을 넘어설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퍼스트 노-네임을 시기하는 마음에 새로운 검을 요구한 것처럼, 그의 집착과 열망은 외면한다고 해서 현실이 아닌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자신에게 검을 겨눌 것이 분명했다.
퍼스트 노-네임을 차지하기 위해서 도전했던 것처럼, 케빈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자 매 순간 사나운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내 자리는 절대 내줄 수 없다.’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활활 타오르는 호승심에, 크리스는 그제야 자신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귀영화(富貴榮華).
그 찬란한 삶이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아니다.
불가능했다.
파비우스 후작처럼 값비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하고, 하렘에서 수많은 여자를 거느린다고 할지라도, 검사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은 절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 사실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케빈.
그의 존재가, 기어코 크리스를 움직였다.
* * *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크리스는 진심을 숨기지 않았다.
“현재 대륙의 랭킹 시스템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알렉산드르의 계획이었음이 밝혀졌고, 연달아 치러진 전쟁으로 랭커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사실상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랭킹 시스템을 앞으로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든 랭킹 시스템은 사회의 일부분이 되었고, 검사들이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하는 경쟁의 무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 새롭게 검사들의 랭킹을 재정립하는 대회를 개최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대회에서 우승자가 탄생한다면, 주군을 제외한 대륙의 이인자로서 주군이 인정하는 최고의 검임을 대륙에 공표해 주십시오.”
의외의 부탁이었다.
크리스는.
경쟁의 무대를 바랐다.
케빈과 같은 도전자들을 무너트리고, 본인이 아직 진정한 이인자임을 세상에 증명받기를 바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것은 보상으로 적합하지 않다. 랭킹 시스템을 부활시키는 것에는 동의하나, 그것은 제국 회의에서 논의해야 할 문제. 그것 외에 다른 요구 사항은 없나.”
“있습니다.”
“말하라.”
마른침을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
예상했다.
랭킹 시스템의 부활은 보상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랭킹 시스템을 언급한 이유는,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그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는 랭킹을 재정립하는 대회가 주기적으로 개최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매년 그 대회에서 우승하는 검사는, 감히 황제 폐하에게 도전하는 기회를 부여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주군은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대륙 제일의 검사기에, 저와 같은 검사들에게 있어 궁극적인 목표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진심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크리스.
그의 꿈은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대륙 제일의 검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 자리가 로만 드미트리의 것임을 모두가 인정했다.
케빈?
그 외의 다른 검사들?
개의치 않았다.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며,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대회에서 자신이 드미트리 제국을 대표하는 이인자임을 증명받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망하고 불가능한 꿈임을 알지만, 크리스는 그렇다 할지라도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기회였다.
도전자들과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자리를 만듦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에게 도전할 유일한 기회.
로만 드미트리는 제국의 황제였다.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 않는다면, 훗날 그에게 검을 들이미는 순간 반역죄(反逆罪)로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금 말해야만 했다.
어쩌면 자신의 부탁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에, 막상 말을 내뱉고도 크리스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입이 바짝 말랐다.
머리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내뱉은 말을 고수하고자 이를 악물며 로만 드미트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재밌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크리스가 고개를 들자,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크리스. 네 요구를 받아들이겠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국제 회의가 진행되었다.
크리스가 건의했던 랭킹 시스템뿐만 아니라, 중대한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말에 각국의 대표들이 모두 드미트리로 모였다.
크로노스, 발할라, 카이로, 헥토르, 움베르토, 레드포드, 프랑크의 국왕들이 드미트리를 방문한 상황에,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의 수행원이었다.
드미트리의 임시 황궁(皇宮).
새롭게 건축하고 있는 황궁을 대신하는 그 건물에서, 한 인물이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요구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프랑크 국왕께서는 매우 예민하신 분이라, 이곳에 하루라도 머무르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고요. 사전에 말씀드렸던 재질로 만든 침구류와 침대, 즐겨 마시는 생수도 오델리아산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사전에 얘기를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만.”
“예?”
사내.
윌리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번 국제 회의는 이틀 동안 진행되기로 예정되었고, 그래서 각국의 국왕들이 이곳 황궁에 하루 머무르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그로서는 준비할 것이 많았다.
프랑크 국왕은 사람은 고급스럽지 않은데 생각보다 까탈스러운 스타일이라, 윌리엄은 며칠 내내 드미트리행을 준비했다.
그런데 얘기가 전달되지 않았다니.
“빌어먹을 녀석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국왕 폐하의 일을 잊어버리다니.”
최근.
프랑크 내부는 정신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정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여러 행사에 참석하다 보니 프랑크를 비우는 일도 잦았다.
그 과정에서 내부에 혼선이 있었던 모양이다.
윌리엄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드미트리 황궁의 관리인에게 말했다.
“일단 짐 좀 같이 옮겨 주십시오. 그리고 거기.”
저 멀리.
지나가는 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행색이 영락없는 하인이었기에, 윌리엄으로서는 그들을 존대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 와서 짐 좀 같이 날라. 어서!”
국왕의 수행원(隨行員).
그는 비록 심부름이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지만, 신분 자체는 준귀족에 해당할 정도로 위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프랑크 국왕에게 직접적으로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
상대가 드미트리 황궁의 관리인이기에 조심스러웠을 뿐이지, 프랑크 내부에서는 일반 귀족들조차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고로.
하인을 하대하는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사실 그것은 귀족사회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윌리엄으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는 태도였다.
그런데.
드미트리 관리인의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윌리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관리인.
그가 이곳의 일을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황궁의 실질적인 실세는 그가 아니었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정황을 보았을 때, 윌리엄의 예민한 본능은 방금 본인이 하대했던 하인의 존재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점점 얼굴의 형태가 선명해지자 윌리엄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헉?! 설마.’
드미트리.
그곳에서 조심히 대해야 할 인물들의 명단.
그중 한 명의 얼굴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하인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스 남작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살갑게 웃는 한스.
그랬다.
그는 바로 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