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논공행상(論功行賞) (4)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각국의 대표들은 놀란 얼굴로 두 귀를 의심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마계를 먼저 공격하겠다니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번 일.
로만 드미트리라 할지라도 동조할 수 없었다.
마계는 악마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어둠의 마력을 사용하는 그들이 지상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때마다 엄청난 대재앙이 일어났다.
그것은 감히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알렉산드르와 같은 인간들을 하수인으로 부리며, 망자들을 되살리는 어둠의 마력에 마계는 공포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역사가 증명했다.
마계가 어떤 존재인지를.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대륙의 역사에, 움베르토 국왕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만큼은 황제 폐하의 뜻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마계를 다스리는 존재는 신(神)의 영역에 도달했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그 존재를 평가할 수 없으며, 그의 입김 한 번이면 알렉산드르와 같은 괴물을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륙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마계의 존재들은 지상계에 강림했을 때 본래의 힘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그들의 공격을 받아쳐야만 제한적인 전력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들의 영역에 들어가서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제발, 그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모두 뜻을 모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맹목적인 신뢰의 상징이지만, 마계라는 단어가 각인시킨 공포는 믿음을 넘어섰다.
움베르토 국왕의 말.
모르지 않았다.
마계를 철저하게 조사했고,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뜻을 물리지 않았다.
“너희가 우려하는 바를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마계로 직접 넘어가서 그들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환경을 포기하는 리스크를 의미하지. 나는 지난 전쟁에서 알렉산드르의 기억을 읽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알렉산드르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지상계와 마계의 완벽한 동화였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마계의 악마들은 이곳 지상계에서도 본인들의 힘을 완벽하게 발현할 수 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이런.”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마계와의 동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일부의 힘을 발휘할 때도 대재앙을 일으켰던 악마들이, 본래 그대로의 힘을 발현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각국의 대표들은 입이 바짝바짝 메말랐다.
알렉산드르를 무너트리며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그 너머에는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절망이 남아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알렉산드르의 기억, 그리고 신탁에서 말했듯 마계의 악마는 언제고 이 세상에 들이닥칠 것이다. 우리가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한들 우리는 그 위험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없다. 이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마계의 존재들이기에, 우리는 무늬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겠지. 나는 그러한 현실을 용납할 수 없다. 어차피 감당해야만 하는 재앙이라면, 우리가 먼저 주도권을 확보해 불안의 싹을 박멸해야만 한다. 왜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우리의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적들과 싸우는 것보다, 나는 적들의 영토를 공격해 이 로만 드미트리가 다스리는 땅을 노린 대가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여 주고자 한다.”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에, 각국의 대표들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제국의 황제는.
거인(巨人)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생각보다도 더 큰 존재감에 로만 드미트리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상대는 마계다.
대륙의 역사상 단 한 번도 그들을 먼저 공격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확고한 음성으로 본인의 뜻을 밝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로만 드미트리는 선구자(先驅者)였다.
새로운 오라의 발명, 마법 혁명, 남작 가문의 후계자에서 제국의 황제까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이루어 낸 그에게, 지난 역사의 잣대는 의미가 없었다.
“나의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그들에게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나는 주도적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 것이다. 마계의 악마들을 모조리 도륙해, 그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그 말이.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증명했다.
자신의 울타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뿌리까지 박멸하는 존재가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정적이 맴돌았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움베르토 국왕은, 힘겨운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계를 다스리는 존재는 어떻게 감당하실 생각입니까. 그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이번 결정은 인류의 멸망을 앞당기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였다.
확실하지 않은 대답이 돌아온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뜻은 이해하나 결정에 동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나를 믿어라. 내가 마계의 지도자를 쓰러트릴 것이다. 나는 알렉산드르를 상대할 때도, 지금까지 치러 온 모든 전쟁에서도. 단 한 번도 내 전력을 끌어올린 적이 없다. 대륙 역사는 마계의 지도자를 인류(人類)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감당할 수 있다.”
* * *
회의가 중단되었다.
각국의 대표들은 곧바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닌, 하루 동안 충분히 생각을 시간을 부여받았다.
애초에 이렇게 할 의도로 일정을 이틀로 잡았다.
마계와의 전쟁은 로만 드미트리 독단으로 진행할 수 없는 일이었고, 대륙 전체의 적극적인 지지가 반드시 동반되어야만 했다.
상대는 마계다. 인류가 통일되지 않는다면, 승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건물 밖.
정원으로 걸음을 옮긴 움베르토 국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는 말입니다. 이번 전쟁을 경험하며, 그래도 황제 폐하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를 상대하는 와중에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니. 대체 황제 폐하는 어떤 존재일까요.”
이번 회의.
충격의 연속이었다.
대결을 받아들이는 대담함, 마계와의 선전포고, 그리고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진실까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때 드레이크 가문을 이끌었던 움베르토 국왕은, 범인(凡人)들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모두가 크로노스 제국에 빌붙으려 할 때.
끝까지 적들과 투쟁하며 움베르토의 국경을 지키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지금의 자신과 똑같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마주할 때면, 마치 자신조차도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만 같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어떻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확실해진 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에드윈 헥토르였다.
헥토르의 실질적인 지도자.
머지않은 미래에 국왕의 자리를 물려받기로 한 그가, 움베르토 국왕의 옆에 서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마계의 존재를 두려워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황제 폐하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병법은 항상 전장을 주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계의 위험을 박멸하고자 한다면, 적들이 언제 공격해 올지 불안에 떠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도적으로 전쟁의 타이밍을 확보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다 패배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말이 있으나, 그만큼 리스크가 내포되어 있는 격언입니다.”
“예, 그 말에는 동의합니다.”
결국.
정답은 없었다.
각자의 장단점이 존재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에드윈 헥토르는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제가 믿는 것은 황제 폐하가 지나온 역사입니다. 남부 전선에서도, 카이로의 내란에서도,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도. 황제 폐하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전쟁을 압도적으로 승리해 왔습니다. 마계가 강력하다고는 하나, 크로노스 제국 또한 몇 년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존재입니다.”
회의 도중.
에드윈 헥토르는 유일하게 말을 아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움베르토 국왕을 바라보며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어 낸 지금, 우리가 황제 폐하를 믿고 따르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 * *
다음 날.
회의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이었던 각국의 대표들이, 충분한 고민 끝에 동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비상식적인 일일지라도.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 존재 자체를 믿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시선이 집중되었다.
뜻이 모였으니, 지금부터는 함께 나아갈 길을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루카스에게 신호를 주자,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미리 준비한 계획을 말했다.
“오델리아 폭동 사건 당시, 폭도들은 이상한 징후를 보였습니다. 마치 어둠의 마력에 물든 것 같은 모습에 카르만을 확보한 이후 정신 고문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마계의 통로가 어쩌면 오델리아의 영토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사벨과의 연관성도 있습니다. 루나의 여왕인 이사벨은 알렉산드르의 계획을 저지하겠다고 말한 이후 행방불명되었는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장소가 바로 움베르토 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 경로를 추정한 결과, 그녀는 움베르토를 거쳐 오델리아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오델리아라니.”
“그렇다면 정녕 오델리아에 마계의 통로가 존재한다는 말이냐.”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가 오델리아의 수도를 멸망시켰던 일이, 드미트리 정보 길드 내부에서는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런 이유로 현재 루나의 사제들과 연합해, 오델리아를 중심으로 최대한 어둠의 마력을 찾는 수색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최근.
아르카디아가 본래의 기후를 되찾으면서, 루나의 사제들 또한 신성력이 강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과의 연계라면 시간이 들더라도 마계의 통로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마계의 통로를 찾는 일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은 전쟁의 여파로 인한 피해를 보수하고, 마계와의 전쟁을 대비하는 일에 집중하라. 절대 조급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적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대륙에 들이닥칠 위험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회의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 드미트리 제국에서 랭킹을 재정립하기 위한 대회를 진행할 것이다. 각국에서는, 그때 참석할 인물들을 사전에 추리길 바란다.”
“명을 받듭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각국의 대표들은 모두 웃는 얼굴로 헤어졌지만,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자마자 모두 같은 명령을 내렸다.
대회에 참석할 검사를 선별하라는 명령!
이번 대회는 드미트리 제국 탄생 이후에 처음으로 진행되는 행사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앞으로의 판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자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 * *
세상이 떠들썩했다.
마계와의 전쟁, 드미트리 검술 대회 등등.
각종 이슈에 사람들이 난리가 난 그때,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가장 집중하는 이슈는 따로 있었다.
바로 로드웰 드미트리.
그가 아르카디아행을 택한 것이다.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서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로드웰 드미트리는 스스로 고민한 끝에 아르카디아로 떠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드미트리는 앞으로도 많은 고난을 넘어야만 한다. 샐러맨더 대륙을 다스리며 마계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전 전쟁처럼 형의 개인적인 무력에만 기댈 수는 없다. 그 이전에 더욱 단단한 세력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의 드미트리에게 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르카디아라는 미지의 땅을 완벽하게 제국의 영토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르카디아.
미지(未知)의 땅.
그곳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넘쳐났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이종족과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들, 그리고 주변에 축복을 부여하는 세계수의 존재는 드미트리 제국의 근간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에 남기로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아르카디아를 안정시키는 일에 앞장서야만 했고, 드미트리 가문의 혈족인 자신이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일들.
로드웰 드미트리는 스스로의 역할을 찾아갔다.
가문의 대표로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가문과 무관한 삶을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믿는다고 했다.
자신은 그러한 기대감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아르카디아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머니인 리한나 드미트리가 그를 찾아왔다.
“로드웰. 정말 떠나야겠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가문을 위해서, 저 스스로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너나 로만이나, 이 어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똑같구나. 이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반려를 맞이하라는 말에, 로만은 마계와의 전쟁을 끝내고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단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 만약 마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인류는 존재하지 못할 테니까.”
황제의 반려.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황제는 반드시 황후(皇后)를 들이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특수한 상황이다 보니 그 선택을 미루었다.
순간.
로드웰 드미트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의 발언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둘째인 너조차도 홀로 미지의 땅에 보낼 수는 없단다. 로드웰. 이 어미의 뜻을 꺾고 반드시 아르카디아로 떠나고자 한다면, 나를 대신해 너를 돌볼 수 있는 반려를 맞이하거라. 이건 부탁이 아니야. 어미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린다면, 이번만큼은 내 뜻을 외면하지 말아라.”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리한나 드미트리가 웃음을 보였다.
“결혼 상대는 걱정할 필요 없다. 네가 결혼 의사를 밝힌다면, 모든 귀족 가문의 여식들이 너를 바랄 테니까.”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다음 날.
로드웰 드미트리의 혼사 문제가 표면 위로 떠오르자, 대륙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