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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화 (427/615)

427화 드미트리 쟁탈전 (3)

국제 회의가 끝난 직후.

헥토르 왕국이 전쟁의 여파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그때, 드미트리에서 사절(使節)을 보내왔다.

“지금부터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헥토르 왕국은 이번 전쟁에서 발할라 제국을 상대로 끝까지 버티며, 대륙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큰 공을 세웠다. 만약 헥토르의 끈질긴 투쟁이 없었더라면, 남부 전선이 뚫리면서 대륙 전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나 드미트리 황제는 헥토르의 공을 인정하는바,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보수 비용을 드미트리가 같이 부담토록 하겠다.”

그것은.

가뭄의 단비였다.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승리했든 패배했든 전장의 여파는 참담했고, 간신히 왕국의 체계를 되찾은 헥토르로서는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폐허가 되어 버린 땅.

전쟁은 인류의 발전을 후퇴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모든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실을 로만 드미트리는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뜻을 전할 사절을 보내서 헥토르의 상황을 돌보았다.

“드미트리의 지원은 일회성이 아니다. 헥토르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며, 피해를 보수할 인력 또한 지원토록 하겠다. 이번 전쟁을 통해 드미트리와 헥토르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앞으로의 미래에 두 국가가 서로를 이끌어 주는 협력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드미트리는 헥토르의 헌신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사절은 물러났다.

헥토르의 수뇌부들만이 남은 상황에, 헥토르 국왕은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선택을 했구나. 전쟁의 피해 보상을 드미트리가 짊어질 이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헥토르의 복구를 위해 전력으로 나서 주겠다니. 아들아. 너의 선택이 옳았다. 드미트리는 그들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헌신을 잊는 나라가 아니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지난 몇 년.

헥토르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알렉산드르의 음모에 백성들이 굶주렸고, 크로노스와 발할라 같은 포식자들의 압박에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모든 문제를 끝내 버렸다.

앞으로 살아갈 길을 말하는 메시지를 전달받자, 공적인 자리만 아니었다면 헥토르 국왕은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고 싶었다.

헥토르의 미래.

밝았다.

앞으로는 나라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헥토르의 수뇌부들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에드윈 헥토르만 달랐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행복으로 물든 광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로만 드미트리는 어떤 존재일까.’

정말 이해가 되질 않았다.

드미트리도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그는 헥토르의 짐을 기꺼이 같이 짊어지겠다고 말했다.

사실 발할라 제국과의 싸움은 단순히 드미트리를 위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헥토르도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했을 뿐인데, 로만 드미트리가 그 사실을 치장해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돌연변이였다.

남작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제국을 무너트렸고, 국제회의 자리에서는 마계를 침공하겠다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뜻에 동조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승리를 확신한다기보다는, 로만 드미트리가 그동안 보여 준 모습을 믿고 따랐다.

이 상황을 보라.

드미트리는 헥토르가 무너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꺼이 손을 내밀며, 드미트리가 나아가는 찬란한 미래에 동반자가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이 울컥거렸다.

그동안.

정말, 정말 힘들었다.

무너져 내려가는 왕국의 후계자로 태어나, 에드윈 헥토르는 어린 나이부터 현실의 잔인함을 직시하며 살아가야 했다.

어리광 따위는 피울 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온전하게 헥토르의 짐을 떠안아 주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날.

에드윈 헥토르는 무력하게 하루를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었으나, 그날만큼 마음 편안한 시간을 보낸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재정비한 에드윈 헥토르는, 다시 업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닷없는 소식을 들었다.

“왕자님! 드미트리의 황태후가, 로드웰 드미트리의 혼인 상대를 물색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이미 각국의 마담뚜들이 그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 순간.

에드윈 헥토르는 모든 업무를 중단했다.

로드웰 드미트리.

드미트리 가문과의 사돈 관계는, 그로서도 절대 놓치기 싫은 엄청난 기회였다.

* * *

이번 일.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로드웰 드미트리와의 혼인을 추진하고 싶지만, 문제는 헥토르에는 그에 어울리는 상대가 없다는 점이었다.

수뇌부가 말했다.

“……왕자님. 왕자님의 뜻은 잘 알겠으나, 각국의 마담뚜들이 움직인 상황에서 일반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는 절대 로드웰 드미트리의 마음을 회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은 포기하시지요. 괜히 어중간한 상대를 내밀었다간, 헥토르 왕국의 꼴만 우스워질 것입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의견이 모였다.

다들 부정적인 상황이었으나, 에드윈 헥토르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드미트리 제국은 세상을 주도할 것이다. 너희는 이번에 드미트리의 사절이 전하는 말을 들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미트리는 헥토르의 헌신을 잊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 그것이 바로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그릇이다. 드미트리는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을 절대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 그들이 대단한 권력을 쥐고서도 다른 나라들을 핍박한 이유는, 다른 나라들에 숨구멍을 열어 준다면 그만큼 성장하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서로가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고 한들, 국적이 다르다면 타인인 것이다. 그만큼 권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건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그런 사실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헥토르를 지원하는 방향을 택했다.”

그릇이 달랐다.

다른 나라들이 성장하면서 생겨나는 문제점을,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사실 내 생각도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 다르지 않다. 드미트리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아무리 성장한다고 한들,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버티고 있는 이상 절대 드미트리의 영역을 넘볼 수 없을 것이다. 로드웰 드미트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아르카디아로 떠나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는, 자신과 같은 혈족이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묻겠다. 만약 드미트리와 사돈의 연을 맺는다면, 앞으로 헥토르의 미래에 어떤 영향이 있을 것 같으냐.”

“……엄청난 이득이 되겠지요.”

“하지만 헥토르에는 내세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결론은 같았다.

에드윈 헥토르의 뜻에는 동조하나, 결혼 상대로 내세울 만한 여성이 헥토르 왕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정략결혼은 명분의 싸움이다. 적절한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상대가 원하는 이상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면 그만이다.”

* * *

다시 현재.

방계라는 단어에 집중되는 시선에, 에드윈 헥토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캐서린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본인이 헥토르의 방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캐서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고 살아온 모습에 그녀를 가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거짓이었다.

헥토르의 방계 중에서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헥토르의 정보부는 정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단 하루 만에 캐서린 헥토르를 찾을 수 있었다.

외가 쪽을 건너건너 핏줄이라고 부르기에도 모호한 사이였지만, 그녀를 확인하자마자 에드윈 헥토르는 확신했다.

캐서린이라면.

로드웰 드미트리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다고.

“캐서린의 외모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예쁜지와는 별개로, 그녀는 척박한 환경에서 홀로 아버지를 모시며 사는 아이였습니다. 필요하다면 하루에 두 개, 세 개의 일을 서슴지 않았고, 힘을 쓰는 일도 거뜬하게 해낼 정도로 강인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로드웰 드미트리 님이 곧 아르카디아로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기회의 땅이라고 부르지만, 오랜 세월 눈으로 뒤덮였던 땅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쉽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캐서린은 로드웰 드미트리 님이 그곳에서도 문제가 없도록, 곁을 잘 지켜 줄 아이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캐서린을 우연히 만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방계를 가문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아니라 캐서린 헥토르가 어떤 존재인가였다.

‘캐서린은 어여쁜 아이다. 의도적으로 그녀의 존재를 찾았지만, 이번 혼인이 어그러진다고 할지라도 헥토르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만큼 밝고 찬란히 빛나는 아이지. 그렇기에 더더욱, 리한나 드미트리는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겠지.’

이번 혼인.

리한나 드미트리의 목적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사람들을 불러모으면서까지 혼인을 서두르는 이유는,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생각해 보라.

앞으로 척박한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데,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여인들이 그 곁을 지키는 것으로 리한나 드미트리가 안심할 수 있겠는가.

로드웰 드미트리는 전쟁으로 인해 눈을 잃었고, 이번 전쟁이 끝나고서는 한동안 사경을 헤맸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그

런 아들이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아들의 곁을 지켜 줄 현명하고 강인한 여인을 바랄 것이다.

캐서린 헥토르는.

그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어여쁜 외모는 그녀를 빛나게 만드는 조건 중 하나일 뿐, 다른 요소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아이였다.

“사실 저도 중간 다리를 놓아 줄 뿐, 캐서린에게 이번 혼인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경험한 캐서린은, 그리고 로드웰 드미트리 님은. 서로에게 분명히 이끌릴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두 사람이 만나서 좋은 미래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마담뚜들은 확신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반짝반짝 빛나는 리한나 드미트리의 눈빛으로 알 수 있듯, 그녀의 진심을 공략한 사람은 에드윈 헥토르가 유일했다.

* * *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에드윈 헥토르 이후에도 마담뚜들은 매력적인 여인들을 차례로 소개해 주었지만, 리한나 드미트리는 이미 캐서린 헥토르에게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생활력이 강한 아이였다.

아르카디아의 척박한 환경에서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한들,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평민에 불과했던 로메로 드미트리와 같이, 온갖 역경을 이겨 냈던 자신의 과거처럼 말이다.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리한나 드미트리는, 곧바로 로드웰 드미트리를 찾아갔다.

탁.

“내가 추려 온 여성들이란다. 너무 다 예쁘고, 각자의 매력을 지닌 아이들이지. 한번 찬찬히 살펴보고, 혹시라도 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다면 내게 말해다오.”

“……어머니.”

“로드웰. 나도 네게 혼인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단다. 하지만 네게 벌어지는 여러 상황 속에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아들은 눈을 잃었고, 이번에는 생명마저 위험할 뻔했다. 네가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내가 신께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한 줄 아니? 앞으로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면, 적어도 이 어미의 진심 어린 마음을 받아들여다오.”

그녀 또한.

이 상황이 불편했다.

정략결혼을 추진했다가 어그러진 로만 드미트리라는 선례가 있기에, 되도록 자식들의 혼인 문제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다 똑같았다.

로드웰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타들어 가는 속에, 현명한 여인이라도 곁에 두지 않는다면 도저히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들은 곧 떠날 것이다.

아르카디아에서의 삶에, 적어도 자신처럼 로드웰 드미트리를 생각해 줄 사람이 곁에 있기를 바랐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복잡한 눈빛으로 명단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마음은 이해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기에 이토록 노력하는 것일 테고, 사실 다른 생각이 없었다면 어머니의 뜻을 따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되도록 밝히고 싶지 않았으나, 강경한 태도의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더는 진실을 숨길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말을 삼켰다.

한참을 망설이던 로드웰 드미트리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어머니. 사실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니?”

화들짝 놀랐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정말 목석같은 아이이고, 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어머니인 자신이 직접 움직였던 것인데, 설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로드웰 드미트리의 모습에, 리한나 드미트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그게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겠니?”

모자(母子)는 진실을 알았다.

이 상황에서.

아들이 언급할 수 없는 이름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로드웰 드미트리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는지, 어머니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플로라 로렌스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형도 제 진심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 문제였다.

시작점은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

로드웰 드미트리가 목숨을 걸었던, 그때의 순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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