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드미트리 쟁탈전 (6)
집무실로 돌아온 헨리 앨버트가, 복잡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X됐네.”
절망적이었다.
일단 눈앞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허세를 부렸지만, 실제로 크리스를 만나면 아는 척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았다.
그때와 지금의 크리스는 달랐다.
그때의 크리스는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유망주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드미트리 제국을 대표하는 검사이지 않은가.
만약에.
괜히 아는 척을 했다가 크리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지금껏 힘들게 쌓아 왔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당일에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해 버릴까.’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눈앞의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브래들리 교수의 의심이 하늘을 찌를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인물이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입김도 상당한 인물이기에, 그의 의심이 계속되었다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방법이 없구나, 방법이.”
머리가 아팠다.
사실 자신은 거짓말로 이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남부 전선에서 있었던 일, 그 모든 것은 진실에 기반했으며 자신의 시점으로 자극적으로 풀어냈을 뿐이다.
고로 밑천이 드러난다고 한들 교수직에서 물러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그동안 따랐던 교수가 사실은 병사1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존경심을 표했던 학생들로서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게 싫었다.
헨리 앨버트는 스스로를 환상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환상을 글로, 강의로 표현하면서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고, 덕분에 이 자리에 올랐다.
그렇기에 환상을 절대 깨트릴 수 없었다.
자신이 일군 부귀영화는 모두 환상으로부터 비롯되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헨리, 침착하자.”
숨을 골랐다.
뚜렷한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헨리 앨버트는, 로만 드미트리의 삶을 경험하며 포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직원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에게 명령했다.
“3일 후. 크리스 님이 카이로스를 방문한다면, 강단에 오르기 전에 일단 내게 데려와라. 만약 크리스 님이 무슨 이유냐고 묻거든, 교수로서 로렌 드미트리의 일을 논의하고자 한다고 말한다면 분명히 순순히 따라 줄 것이다.”
이번에도 방법은 간단했다.
직권남용.
헨리 앨버트는, 자신의 무기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 * *
3일 후.
계획대로였다.
집무실을 찾은 크리스의 모습에, 헨리 앨버트는 애써 긴장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이렇게 드미트리의 섬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리스 님에게 만나자고 요청을 드린 이유는 로렌 드미트리의 진로 때문입니다. 로렌은 현재 검술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고 있어, 머지않은 미래에 승급 심사를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예전에는 로드웰 드미트리 님의 선례처럼 아카데미 이상의 실력을 선보이는 학생들은 실전에 투입되었지만, 현재는 마땅한 자리가 없지 않습니까? 혹여 이후의 일을 따로 계획하고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사실.
대화 주제는 많았다.
로렌 드미트리가 사적으로 물었던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있었지만, 헨리 앨버트는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관계는 한 끗 차이다.
자신을 믿고 말했던 고민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로렌 드미트리는 분명 깊은 실망감에 빠질 것이다.
과거와는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강렬한 첫 만남에서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했지만, 현재의 헨리 앨버트는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만나자는 목적에 부합하는 로렌 드미트리의 일을 말하면서도.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한 그런 주제를 내세우며, 크리스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크리스가 말했다.
“글쎄요.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서 로렌 도련님의 미래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미트리로 돌아가는 대로, 로렌 도련님의 일을 논의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웃음을 보였다.
로렌 드미트리의 이야기는 미끼에 불과했다.
크리스를 자리에 앉히고 적당한 호감을 형성했으니, 헨리 앨버트는 은근슬쩍 다른 주제를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를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남부 전선에서의 전투에서 저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저는 그때의 일을 기반으로 해서 강의를 진행하는데, 만약 이와 관련한 일을 묻는다면 동조를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학생들도 강의 내용에 더 빠져들어 남부 전선에서의 일을 확실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계적인 부탁이었다.
강의의 동조.
자연스럽게 관계를 형성한다면, 브래들리 교수 앞에서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헨리 앨버트가 몰래 마른침을 삼키는 상황에, 크리스가 웃음을 보였다.
“헨리 앨버트 님.”
“……예?”
“어렵게 빙빙 돌려서 말할 필요 없습니다. 헨리 앨버트 님이 제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긴장한 얼굴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크리스가 말을 덧붙였다.
“드미트리 정보부는 드미트리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관리합니다. 단순히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닌, 드미트리에 관해 떠들어 대는 사람들까지 모두. 헨리 앨버트 님은 그 명단에 있었습니다. 남부 전선에서 저희와 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것은 사실이나, 서로 특별한 관계가 아닌데도 그것을 이용해 많은 이득을 보셨더군요.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헨리 앨버트 님의 행보가 문제가 된다고 판단되었다면, 드미트리는 진즉에 조치를 취했을 겁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드미트리 정보부의 판단으로 헨리 앨버트 님이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굳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서 저를 회유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드미트리의 명성을 적당히 활용하는 선에서 드미트리의 위상을 드높인다면, 드미트리로서도 딱히 헨리 앨버트 님을 제지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과정이 어찌 되었든, 남부 전선에서 헨리 앨버트 님과 드미트리가 같이 생사를 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을 테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크리스가 물러났다.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모습에, 헨리 앨버트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이게 무슨.”
충격적이었다.
드미트리는 사실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도, 빨대를 꽂는 행위를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드미트리 정보부의 정보력에, 드미트리의 숨은 의도에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황당하게도 이 순간 헨리 앨버트는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느꼈다.
‘크리스 님의 말대로라면, 내 행동이 합법적(?)이라는 거잖아.’
생각해 보라.
1. 드미트리는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2. 알고도 묵인했다.
3. 적당한 선에서 이용하는 것은 서로 윈윈이다.
4. 남부 전선의 동료임을 인정했다.
고로.
지금껏 드미트리의 명성을 등에 업은 자신의 행동이 합법적이라는, 헨리 앨버트의 머릿속에서 기적의 행복 회로가 돌아갔다.
크리스의 말처럼 헨리 앨버트는 드미트리를 치켜세우면서 피를 빨아먹는 종류의 모기였다.
그런 존재는 드미트리에게 해가 갈 것이 없었다.
히죽, 웃었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행복 회로에,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했던 헨리 앨버트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 * *
그날 오후.
강의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크리스는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문화 교류를 위해서 학생들에게 많은 조언을 말해 주었고, 학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강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긴 사람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을 내미는 헨리 앨버트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가 같이 피땀을 흘렸던 남부 전선에서의 일을 크리스 님을 통해 다시 한번 들으니, 정말 감회가 새로운 것 같습니다. 그때 저희는 정말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핫.”
그의 뒤로.
브래들리 교수를 포함한 사람들이 있었다.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크리스는 웃음을 삼키며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저도 과거를 되새기는 특별한 자리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아차차, 이분들은 왕실 아카데미의 교수님들입니다. 드미트리의 섬광 크리스 님의 팬이라고 얼마나 소개를 해 달라고 하던지, 오른쪽부터 차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브래들리 교수님…….”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고, 얘기가 길어지자 헨리 앨버트가 얼른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달성했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던 브래들리 교수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크리스와 헤어지자마자 헨리 엘버트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오늘의 만남으로 그간의 의심을 단번에 불식시켰다.
진실이 어찌 되었든, 헨리 앨버트는 자신이 어떻게 비추어지는지를 잘 알았다.
교수끼리 남은 자리.
헨리 앨버트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크리스 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지난날들이 어찌나 떠오르던지. 여러분들은 잘 모를 겁니다. 남부 전선. 헥토르가 갑작스럽게 전쟁을 선포했던 그 날, 그 현장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치열했던 순간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 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순간은, 가문 대대로 남겨야 할 소중한 기억입니다. 크리스 님이랑은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냐고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리는 전우입니다, 전우! 피와 땀을 같이 흘렸던 사이인데, 연락이 뭐 대숩니까.”
호들갑을 떨었다.
드미트리에게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다는 생각에, 얼굴 가득 웃음을 보이며 자신의 존재를 치켜세웠다.
티끌만으로도 교수의 자리에 올랐던 헨리 앨버트다.
그에게 있어.
크리스와의 대화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크리스는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자신과는 거리를 떨어트리는 그 모습에, 크리스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정말 다른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네.”
확실했다.
훗날 역사는 헨리 앨버트를.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존재를, 분명히 대단한 무언가로 기록할 것이다.
물론.
정확히 어떻게 기록될지는, 크리스로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 * *
며칠이 흘렀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아르카디아로 떠나면서 드미트리 쟁탈전의 열기가 가라앉았지만, 드미트리는 여전히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계와의 전쟁을 예고했다.
아직 완벽한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기에, 드미트리의 공방들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끊임없이 무기를 만들어 냈다.
카앙!
카앙, 카앙!
사방에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간의 마스터 헨드릭은, 휘하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를 확인하더니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이게 아니야!”
전쟁이 끝난 직후.
대장간에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바로 신성력(神聖力)을 부여한 무기.
마계의 마물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작 도중에 사용되는 성수는 밸런스를 무너트렸다.
결과물 자체야 신성력을 머금은 상태로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그 위력도 떨어질뿐더러 철제 무기로서의 완성도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헨드릭.
마스터 블랙스미스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휘하 대장장이들을 다그쳤고, 그렇게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상황은 그리 호전되지 않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대장장이들이 열을 올리는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황제 폐하시다!”
“모두 밖으로 나와 예를 갖춰라!”
로만 드미트리.
그가 나타났다.
한때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며 대놓고 무시했던 존재였지만,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반응하는 사람들은 드미트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도, 그리고 검을 만드는 장인으로서도. 드미트리의 대장장이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한참 작업하던 사람들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고, 로만 드미트리는 손을 들어 작업을 속행할 것을 명령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헨드릭이었다.
그가 한달음에 달려 나오자, 로만 드미트리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신성 무기 제작 상황은 어떻지?”
“……아직 뚜렷한 결과물은 없는 상태입니다. 사실 신성 무기는 마물에게 확실한 피해를 입히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하는 것인데, 철제 무기 자체로서의 성능이 떨어진다면 마물의 외피도 뚫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인력을 투입해 완성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보고로도 들었던 내용이었다.
지난 며칠.
로만 드미트리는 이와 관련한 문제에 집중했다.
새로운 적.
새로운 전장.
로만 드미트리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항상 현재의 자신에게 적합한 새로운 검을 제작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마계와의 전쟁을 앞둔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새로운 검을 만들고자 했다.
그 와중에 케빈의 검을 만드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내가 작업할 공방을 마련하라.”
“……그게 무슨 의미이신지.”
의문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개인 공방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었기에, 그 누구도 로만 드미트리가 작업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기를 제작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면, 너희는 앞으로 신성 무기를 만들어 가는 방식에 대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순간.
헨드릭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누구인가.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이기 전에, 대륙 제일의 검사이기 전에, 대륙 제일의 대장장이이지 않은가.
그런 존재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검을 만들겠다니.
헨드릭은 자신도 모르게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금방 공방을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