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6화 (436/615)

436화 통합 랭킹 (3)

조금 전.

에드윈 헥토르와의 경기를 준비하는 레이먼은, 자신의 수행원으로 따라나선 귀족으로부터 신신당부를 들었다.

“레이먼 님. 이번 경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에드윈 헥토르 왕자입니다. 역사적으로 발할라와 무관하지 않은 헥토르의 핏줄이, 이번에도 저희와 대립하는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약 발할라가 패배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사람들은 분명히 발할라의 몰락을 언급하며, 어쩌면 헥토르가 그 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고 떠들어 댈 것입니다.”

발할라와 헥토르.

둘은 역사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었다.

발할라가 아직 제국의 위상을 떨치지 못하던 시절, 강대국이었던 헥토르를 무너트리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서로의 위치가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대대로 두 국가는 악연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대륙 전쟁에서 한 번 더 제대로 부딪혔다.

결과는 헥토르 왕국의 승리였다. 천공의 마탑을 끌어들인 에드윈 헥토르가 끝까지 버텨 내면서, 발할라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졌다.

만약에.

랭킹전 무대에서조차 패배한다면, 사람들이 발할라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레이먼이 힐끗 상대편을 살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이번 무대가 발할라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대회를 준비하면서 많이 거슬렸습니다. 에드윈 헥토르가 대륙 전쟁에서 마법사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인정하나, 그렇다고 검사들의 무대에 도전하는 것은 명백하게 우리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만만히 보았기에, 이 좁은 공간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그는 옛날 사람이었다.

드미트리가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시절, 대륙 랭킹에는 레이먼의 이름이 최상위를 장식했다.

그런 그에게.

마법사에 대한 편견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사람마다 각자의 영역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마법사들은 다수를 상대할 때 빛을 발한다면, 적어도 제한된 공간에서 오라 검사의 파괴력을 이길 존재는 없었다.

그렇기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마법사들의 참전을 소식으로 들었을 때,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주도한 존재가 자신의 1라운드 상대로 배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화가 났다.

레이먼은 이번 1라운드 무대를 통해, 오라 검사와 마법사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증명할 생각이었다.

각자에게.

각자의 영역이 있음을.

“선수들 위치로.”

마침내 호명되는 이름에, 레이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역사적으로 마법사들이 왜 검사들의 영역을 탐하지 않았는지를, 제가 이번 무대를 통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걸음을 옮겼다.

무대 위로 오르는 모습에, 발할라의 귀족은 신뢰 어린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레이먼은 적어도, 그런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 * *

레이먼에게는 분명한 계획이 있었다.

상대가 메모라이즈(memorize) 마법을 적극적으로 발휘할 테니, 초반에는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면서도 수비에 신경 써서 상대의 무기를 모두 소모시킬 작정이었다.

그렇게 1분만 지나도 마법사는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매 순간 상황이 휙휙 바뀌는 근접 전투에서, 그것도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는 블링크와 같은 마법도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꼬리를 밟으면.

승부는 끝이었다.

그렇게 믿었건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익스플로전(Explosion).”

콰앙!

화르르르르르르륵.

화염 마법이 작렬했다.

뜨겁게 치솟는 불길에 레이먼은 빠르게 열기가 덜한 공간을 파고들었으나, 그곳에는 이미 시뻘겋게 일렁이는 화염의 창이 사방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숨을 들이켰다.

열기가 기도로 스며들지 않도록 차단하며, 상대의 꼬리를 붙잡기 위해서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익스플로전.”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이번에도.

눈앞에 화염이 넘실거렸다.

메모라이즈 마법을 기반으로 했다면 분명히 바닥을 드러낼 시기가 되었는데, 에드윈 헥토르는 마치 캐스팅 과정을 생략한 것처럼 고서클 마법을 퍼부었다.

벌써 1분 이상이 지났다. 불길한 상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레이먼은,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오라로 몸을 보호하며 화염이 취약한 부분을 그대로 정면 돌파했다.

‘빠르게 끝낸다.’

콰르르르르르르르릉.

화염 너머.

에드윈 헥토르가 보였다.

강하게 응축된 오라가 폭발하며, 단번에 그를 죽일 듯이 공간을 베어 버렸다.

그 순간.

번뜩.

“블링크(blink).”

서로가 뒤엉켰다.

레이먼의 검이 에드윈 헥토르의 공간을 갈라 버렸고, 차원의 공간 너머로 사라진 에드윈 헥토르가 바로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블링크는 보통 거리를 떨어트리는 것이 정석인데, 에드윈 헥토르는 마치 검사라도 되는 것처럼 한 끗 차이로 사용했다.

그러고는.

“플레어(Flare).”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륵.

콰앙!

고온의 화염이 작렬했다.

거리가 가깝다는 것은 그만큼 피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의미했고, 레이먼으로서도 이번에는 무사할 수 없음을 알았다.

오라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7서클의 플레어를 버티기 위해서 오라를 폭발적으로 뿜어내며, 그와 동시에 어떻게든 화염을 뚫고 나가 상대를 끝장내려고 했다.

확.

화염을 뚫었다.

거칠게 달려 나간 레이먼은, 화염 너머에 다시 한번 플레어를 준비한 에드윈 헥토르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게 무슨.’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아무리 메모라이즈 마법을 활용한다고 한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문득.

소문이 떠올랐다.

마법 학계에 마법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

그것은 오라 혁명처럼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드미트리와 헥토르가 주도했다는 말이 있었다.

레이먼은 그 사실을 개의치 않았다. 마법 혁명이 일어난다고 한들 마법의 근본이 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패착(敗着)이었다.

마법 혁명으로 인해 마법사들은 상단전을 열었고, 상단전의 발달은 마법사들에게 아주 강력한 무기를 선사해 주었다.

쾌속 캐스팅.

마법사들의 단점을 무효화시켰다.

숨 가쁘게 뒤얽히는 근접 전투에서, 마법사들은 검사들에 대항할 무기를 얻었다.

더는.

캐스팅이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윈 헥토르의 날카로운 시선에, 레이먼은 1초 뒤의 미래를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들끓는 화염.

버틸 자신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걸음을 멈추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았다.

우뚝.

“……항복하겠습니다!”

두 손을 들었다.

악에 받친 얼굴로 이를 악물면서도, 더는 싸울 수 없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화르르르르르륵.

화염이 일렁였다.

마법을 멈춘 에드윈 헥토르의 모습에, 상황을 주시하던 심판이 소리쳤다.

“23번째 경기, 에드윈 헥토르 승리!”

1라운드.

그 충격적인 결과에, 사람들이 발칵 뒤집혔다.

* * *

마법사와 검사의 대결.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그렇기에 이번 대결은 사람들의 의문을 해소해 줄 확실한 무대였는데,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과에 다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소수였다.

레이먼의 승리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그냥 승리한 것도 아니고 압도적인 차이로 찍어 눌러 버렸다.

물론.

방심한 것도 있었다.

레이먼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상황은 분명히 달랐겠지만, 원래 마법사와 검사의 대결은 선공(先攻)을 내어 준다고 한들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아니었다.

한번 잡은 기세를 승리로 이끌어 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법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모두에게 증명했다.

“이제 에드윈 헥토르 왕자는 우승 후보가 되었어. 레이먼도 이렇게 쓰러트렸는데, 드미트리의 섬광과 악귀를 상대로도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몰라. 그는 아직 피닉스의 비기를 사용하지도 않았잖아.”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런 가운데.

다른 경기들이 차례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에드윈 헥토르 이후로 더는 충격적인 이변이 발생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검사들.

그들이 압도적으로 상대를 쓰러트렸다.

크리스와 케빈은 각각 프랑크와 크로노스 제일의 검사를 제압했으며, 그 외에 다른 드미트리의 검사들도 드미트리의 대표로 선정된 이유를 증명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 혀를 내둘렀다.

드미트리가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16명의 대표.

그들 중 떨어진 사람도 존재했다.

황당하게도 그들은 타국을 상대로 탈락한 것이 아니라, 드미트리 내전에서 패배한 경우였다.

승률 백 프로.

사람들이 말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어. 최상위 16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단 한 번이라도 승리한 국가는 그만한 명예를 얻게 될 거야. 드미트리는 이제 그런 존재가 되었어.”

멘데스와 비슷한 말이었다.

그렇게 첫날.

1라운드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경기장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2라운드 대진표를 확인하고서는 격렬하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 * *

2라운드 첫 번째 경기.

크리스가 무대에 올랐다.

이번 대진표가 공개되자마자, 사람들은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의 섬광과 악귀만큼의 위상은 아니나, 2라운드 상대는 드미트리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와아아아아아아!”

“볼칸이다!”

“가라, 볼칸!”

크리스의 상대.

볼칸이었다.

거구의 사내가 무대 위로 올라섰고, 그의 차가운 표정에서 동료애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로만 드미트리가 처음으로 모병을 진행했을 때.

대담하게 가장 먼저 테스트를 봤던 존재이며, 용병 출신이었던 그는 온갖 산전수전을 경험하며 뛰어난 검사로 성장했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볼칸이 크리스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크리스 님. 저는 항상 이런 자리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드미트리에는 케빈도, 크리스 님도 아닌. 이 볼칸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자리. 사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드미트리 내부에서도 확실한 서열 정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크리스가 웃었다.

볼칸의 말처럼.

상황이 변했다.

예전에는 크리스를 따랐던 사람들이, 각각 엄청난 성장을 이루면서 증명의 자리가 필요해졌다.

새로운 판도에는.

새로운 서열이 필요했다.

만약 크리스가 조금이라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간의 관계를 떠나서 볼칸은 크리스를 대체할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그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일 뿐.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따를 이유는 없었다.

크리스가 말했다.

“네 의견에 동의한다. 만약 내가 패배한다면, 직접 황제 폐하에게 새로운 서열을 보고토록 하겠다.”

“좋습니다.”

스릉.

검을 뽑았다.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상황을 주시하던 심판이 들고 있던 깃발을 세차게 휘둘렀다.

펄럭.

“시작!”

* * *

또 다른 경기장.

경기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케빈은 무대에 오르며, 머릿속으로는 앞으로의 상황을 정리했다.

‘크리스 님과 붙기 위해서 앞으로 5번. 5번의 경기를 모두 승리해야만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다.’

크리스와 케빈.

둘은 조가 달랐다.

많은 인원 때문에 A조와 B조로 나누었는데, 뽑기 방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둘은 각각 다른 조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쉬움을 보였다.

크리스와 케빈이 결승전에서 만나리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모두가 기대하던 경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승전.

생각만으로도 피가 끓었다.

케빈은 항상 크리스의 자리를 탐냈다.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크리스를 쓰러트려, 로만 드미트리가 제일 신뢰하는 검이 되기를 바랐다.

‘이번 랭킹전은 내가 아닌 크리스 님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내 생각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의도겠지.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날을 위해, 매일 악착같이 살아왔다.’

지난 한 달.

케빈은 폐관 수련에 돌입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수여할 때만 잠시 모습을 드러냈을 뿐,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모든 삶을 훈련에만 몰두했다.

그에게 로만 드미트리의 옆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 하나뿐인 여동생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케빈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바꾸어 준 로만 드미트리에게 자신 또한 중요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크리스는.

좋은 상관이자 뛰어난 동료였지만, 케빈에게는 명백한 경쟁자였다.

패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승리하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표출하며, 케빈은 차가운 얼굴로 무대에 섰다.

“우오오오오오!”

“2라운드부터 이런 라인업이라니!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2라운드.

케빈은 그 너머를 바라보았으나, 당장 눈앞에 있는 상대 또한 현재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상대였다.

‘에드윈 헥토르.’

적발의 미남자.

그가 2라운드 상대였다.

우승 후보 간의 격돌.

상대를 바라보는 케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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