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0화 (440/615)

440화 통합 랭킹 (7)

이번 대결.

크리스는 진심으로 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하게 몰아붙였고, 단순하지만 확실한 공격 패턴은 볼칸 같은 강자조차도 순식간에 무너트렸다.

하지만 케빈과의 대결은 달랐다. 반격이 매우 거셌다.

일반적으로는 회피해야 할 상황에도 공격해 들어오고, 단순히 살갗이 베이는 상처 따위는 개의치도 않았다.

숨 막히게 이루어지는 접전에, 크리스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빈민가의 소년.

드미트리의 악귀.

완전히 다른 위치였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케빈은 대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을까.

괴물이었다.

만약 케빈이 조금 더 이른 나이에 검을 잡을 수 있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재능은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몰랐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대결보다도 발전한 케빈의 모습에, 아레스를 쓰러트렸던 저력에. 크리스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오히려 더 강하게 상대를 찍어 눌렀다.

그것은 증명이었다.

케빈이라는 괴물을 상대로도, 자신이 드미트리의 이인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실력으로 증명했다.

격렬했다.

서로를 인정했다.

전장에서는 안심하고 등을 맡길 존재를 상대로, 크리스는 피로 물든 얼굴로 몰아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순간도 힘을 빼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틀어졌다간 단번에 기세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케빈은 이제 진심을 다하지 않고서는 쓰러트릴 수 없는 괴물이었다.

치열한 공방.

서로가 뒤엉켰다.

그때였다.

틈을 발견한 크리스가 몰아붙이려는 그때, 케빈으로부터 마력이 폭발적으로 들끓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이 순간.

황당하게도 크리스는 감탄했다.

지금 보여 주는 마력의 흐름은 케빈이 기존에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고, 그렇다면 케빈이 스스로 무언가를 창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가 드디어 선구자(先驅者)의 영역에 들어섰다.

단순히 보고 들은 것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창조해 냈다.

검사란.

검을 사용하는 존재를 뜻했다.

거대한 틀 안에 모두가 포함되지만, 각기 다르게 검을 사용하기에 사람마다 검사로서의 결이 달랐다.

케빈은 발전했다.

실제로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의 존재감이 부풀며, 크리스를 단번에 집어삼키고자 했다.

‘너를 진심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뿐.

패배는 의심하지 않았다.

케빈이 마침내 발을 들인 선구자의 영역은 이미 크리스가 지나온 길이었다.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통해 섬전을 터득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일섬(一閃)을 탄생시켰다.

누구도 그에게 정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수많은 고민을 거듭하며 일섬을 완성해 나갔고, 매일 스스로를 벼랑 끝에 몰아넣는 고통 속에서 크리스는 점차 발전해 나갔다.

그 차이였다.

완성도.

케빈이 역류의 힘을 사용하는 순간, 크리스는 상대가 승리를 확신할 이 상황을 처음부터 기다려 왔다.

그래야만.

‘일섬.’

번뜩.

팟.

자신의 압도적인 승리는,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 * *

수천 번의 고민.

수만 번의 훈련.

일섬은 그렇게 탄생했다.

케빈이 아레스를 쓰러트리며 새로운 영역에 들어선 그때, 로만 드미트리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던 크리스가 마침내 결실을 이루었다.

극한의 쾌검. 가슴팍을 완전히 찢어발기는 강력한 일격에, 케빈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후두둑.

피가 떨어졌다.

방울방울 맺히는 정도가 아니라, 뭉텅이로 떨어지는 핏물에 케빈의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위험했다.

사실 케빈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귀혼마공의 재생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만능은 아니었고, 에드윈 헥토르를 상대한 여파로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렇기에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의 악귀가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모습은 생소한 광경이기에, 심판으로서도 경기의 중단을 고민해야만 했다.

이번 대결.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대결을 치르는 당사자들은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드미트리 제국 입장에서는 크리스와 케빈 둘 중 누구라도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무조건 중단해야 했다.

위태로운 케빈의 상태에 심판이 깃발을 치켜드는 순간, 케빈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멈추지 마!”

피를 울컥 뱉어 냈다.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갈고닦았던 비장의 무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번에는 크리스를 넘었다고 생각했건만, 크리스의 마지막 공격에 제대로 반응조차 못 했다는 사실이.

화가 치밀었다.

패색이 짙어지는 이 상황보다, 케빈을 더 분노하게 하는 진실이 있었다.

“왜 손속에 사정을 두셨습니까? 조금 더 확실하게 마무리하면 간단할 것을, 제가 죽는 것이 두려우셨습니까?”

마지막 일격.

조금 더 깊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 텐데, 크리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단순히 서로의 전력을 겨룬 상황에서 자신이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크리스에게는 아직 손속에 사정을 둘 만큼의 여유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분노를 일으켰다.

분명.

크리스는 눈앞에 있었다.

아레스를 쓰러트리며 드디어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크리스가 멀어지고 말았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인정했다.

크리스와 케빈.

둘의 시작점은 달랐다.

단순히 검을 잡은 시기를 떠나서,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해야만 했던 크리스는 케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재능을 타고났다.

케빈은 귀혼마공과 집념으로 만들어 낸 결실이라면. 크리스는 순수한 의미의 재능이었다.

그런 그가 결실을 맺었다면, 그 결과물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도, 그리고 지금도.

크리스는 넘어서지 못할 벽이었다.

“전 말입니다. 크리스 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황제 폐하가 저를 바라보며, 크리스 님과 같은 신뢰를 보여 주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로 현실을 받아들였다간, 영영 크리스 님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비틀거렸다.

크리스의 일섬.

알고도 막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패배가 확실하다 할지라도, 케빈의 존재 가치는 결과로만 결정되지 않았다.

“크리스 님이 이 대회의 우승자임을 완벽하게 증명해 내기 위해서는, 제 의지마저 꺾으십시오.”

열망으로 일렁였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힘겹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핏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케빈은 오히려 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설령 죽을지라도, 제가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 *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었다.

막을 수 없는 열망.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키지 못했고,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에 케빈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팟.

콰르르르르르릉.

분명히 빨랐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상당히 저돌적인 쇄도였지만, 울컥울컥 쏟아지는 핏물에 크리스는 이전보다 느려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말 죽겠다고 달려드는 케빈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케빈의 진심을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 완벽하게 짓밟아 주마.”

상대의 진심에.

진심으로 임했다.

강하게 몰아치는 오라의 폭풍을 마주하며, 크리스가 다시 한번 오라를 폭발시켰다.

콰앙!

카카카카캉!

명백한 우위였다.

저돌적인 돌진은 단번에 막혀 버렸고, 크리스가 케빈의 존재를 그대로 압도해 버렸다.

정신없는 공방에서 케빈은 속절없이 밀렸다.

몸 상태가 건재했을 때도 감당할 수 없었던 존재였기에, 케빈으로서는 상대의 공격을 맞받아치는 것만으로도 가슴팍에서 엄청난 통증이 일었다.

승부는 끝났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케빈은 독기를 표출했다.

“크아아아악!”

훅.

콰르르르르릉.

상대를 뿌리쳤다.

악에 받쳐 공격을 맞받아치더니, 순간적인 틈을 놓치지 않고 강력하게 몰아붙였다.

그사이에 케빈의 상처는 점점 회복되어 갔다.

귀혼마공의 괴물 같은 재생 능력에 갈기갈기 찢겨 나간 가슴팍의 살점이 엉겨 붙었고, 케빈은 다른 부위에 상처가 나는 것은 개의치 않고 검을 휘둘렀다.

팟.

팔이 베였고.

콰르르르르르릉.

곧바로 상대의 머리를 노렸다.

공격이 빗나가자 다리가 베였고, 이번에도 앞으로 달려들며 상대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었다.

살의(殺意)가 넘실거렸다.

상대가 죽든 말든.

자신이 죽든 말든.

악에 받쳐, 어떻게든 상대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야말로 야수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인간의 허울을 벗어던진 케빈의 무지막지한 모습에, 상황을 지켜보는 관중들은 말을 잃고 말았다.

결승전.

사람들이 예상한 그림이 있었다.

분명히 초반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격렬한 접전이었다면, 지금은 차마 제대로 바라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모습을 보였다.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케빈의 존재란 언제나 그래왔다.

남들은 치부로 여길 열등감을 솔직하게 드러냈던 그이기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패배할지언정.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언제고 다시 크리스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케빈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크리스는 받아들였다.

케빈은 위험한 도전자였다.

실력을 떠나, 앞으로 삶에 그와의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나, 그건 크리스도 용납할 수 없었다.

고로.

‘끝을 내주마.’

파팟.

서로가 뒤엉켰다.

케빈의 공격을 맞받아치더니, 크리스가 과감하게 공간을 파고들며 그대로 케빈의 몸을 베어 버렸다.

그 와중에도 케빈은 물러나질 않았다.

끝까지 공격을 흘려보내며 기어코 크리스의 팔뚝을 베어 버리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강렬한 고통에도 크리스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푸확.

가슴팍을 베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가슴팍이 한 번 더 찢겨나가자, 이번에는 케빈조차도 동공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케빈의 육체가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지자,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끝났다.

피로 물든 얼굴의 크리스가 케빈을 내려다보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일을 기억해라. 네 위에는 황제 폐하 이전에, 나 크리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합 랭킹의 대장정.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케빈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병상의 천장이었다.

“……졌구나.”

기억이 났다.

자신이 얼마나 처참하게 패배했는지를.

승부를 인정하지 못하고 끝까지 발악하다가, 케빈은 가슴팍이 완전히 찢겨 나간 채로 정신을 잃었다.

시선을 내리자 붕대로 둘둘 감은 상체가 보였다.

그동안 세심하게 관리했는지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상처였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았다.

참담한 현실이었다. 케빈은 분명히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나, 크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 번으로 불가능하면 두 번을, 두 번으로도 불가능하다면 세 번을. 끝까지 도전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포기하지 않았다.

크리스의 쾌검을 반응하지 못한 순간 끝난 승부였지만, 다음을 위한 불씨를 살려 두어야만 했다.

케빈의 상태는 금방 보고되었다.

치료사가 찾아오더니, 케빈의 상태를 살폈다.

“몸 상태는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거예요?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상처였어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치료사들 입장에서, 케빈 님과 같은 사람들이 실려 올 때면 참 복잡한 감정이 들거든요.”

케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똑같은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때도 케빈은 서슴없이 목숨을 걸 것이다.

시선을 돌렸다.

대답을 회피하려는 의도였는데, 우연히 바로 옆 병상을 확인한 케빈은 순간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왜.

저기에 저 사람이 있단 말인가.

케빈이 놀란 얼굴로 묻자, 치료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휴. 케빈 님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케빈 님이 이곳에 입원한 지도 벌써 삼 일이 지났어요. 그동안 크리스 님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어제 그 대결이 진행되었죠. 그리고…….”

병상 위의 존재.

크리스였다.

케빈만큼은 아닐지라도, 크리스 또한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그 결과가 저 모습이에요. 단 일 격에, 크리스 님이 저렇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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