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4화 (444/615)

443화 천명(天命) (2)

알렉산드르.

그는 변수였다.

의도하지 않은 힘의 흐름에 휩쓸려, 무지렁이에 불과했던 사내는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을 얻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로부터 비롯된 균열은 아르카디아 대륙을 극심한 추위로 몰아넣었고, 마계를 비롯한 여러 차원에 문제가 생겨났다.

차원의 붕괴.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차원의 벽을 무너트리고 신의 힘을 약화시켰다.

신은 고민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세상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에,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대리인이 필요했다.

그렇게.

백중혁은 로만 드미트리가 되었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을 거절한 그의 영혼을 샐러맨더 대륙에 불러들였고, 알렉산드르로 인한 균열 덕분에 백중혁의 영혼은 문제없이 자리를 잡았다.

신의 반열에 올랐던 백중혁은 알렉산드르와는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로서 존재할지라도 세상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신은 백중혁의 삶을 되돌아보았기에 그라면 반드시 알렉산드르와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였다.

백중혁은, 로만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를 무너트렸다.

신의 골칫거리였던 알렉산드르를 처리하면서, 이 세상을 무너트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끝났다.

시선을 거두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면 마계의 공격을 막아 낼 것이고,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은 그에게 허락하는 보상이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마계로 넘어가는 것은, 제아무리 신의 반열에 오른 영혼일지라도 엄청난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차원이 존재한다. 너는 이미 차원의 벽을 넘어선 존재기에, 다시 한번 차원의 규율을 어긴다면 알렉산드르와 똑같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차원을 무너트리는 재앙. 그곳에 있어선 안 될 존재기에, 너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파멸적인 저주. 로만 드미트리. 정녕 그러한 결말을 바라는가. 네가 머문 현실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너는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로서 변수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마계.

그들의 영역을 공격하는 것은 크나큰 문제였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의 패배로 지상계가 멸망할 수도 있고, 승리할지라도 차원의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기에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그것이 신이 직접 강림한 이유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알았기에, 어중간한 메시지로는 그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신의 존재.

강력한 메시지를 부여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더는 무모하게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가 현재의 삶에 만족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네가 나의 뜻을 거부하고 만약 마계행을 강행한다면. 나는 차원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때는 유예 기간을 거쳐 너를 본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네 영혼은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희망적인 결과가 아니다. 각 차원은 시간의 흐름이 뒤틀려 있고, 네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들 그 세계는 네가 알던 그 세계가 아닐 것이다. 고로, 선택하라.”

쿠르르르르르릉.

백색의 공간이 진동했다.

신의 존재감이 크게 부풀며, 로만 드미트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천명(天命)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우화등선을 거절했던 그때처럼 또다시 천명을 거스를 것인지.”

* * *

그때도 같았다.

우화등선.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그것은 천명이었고, 백중혁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다.

신이라는 존재는 그 삶조차도 천명이라고 말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아가는 자신에게 그런 사실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기준은 명확하다. 내가 원하는 것인가, 원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이면 충분하다.’

의도를 배제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삶.

기쁘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으나, 새로운 삶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으며 로만 드미트리는 매 순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했다.

그 배후에는 알렉산드르와 부딪히길 바라는 신의 의도가 있었다고 한들.

그동안 살아온 삶은 모두 스스로의 판단으로부터 비롯되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도 같았다.

신이 떠들어 대는 말들보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알렉산드르와 같은 존재가 된다면. 내가 건국한 드미트리 제국을 위해서라도, 신의 강제적인 압력에 의해서라도 나는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아갈 수 없다. 유예 기간은 그리 길지 않겠지. 나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번 마계행을 강행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만약.

지상계에 남아 마계의 공격을 맞받아친다면 승산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현생의 삶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마계가 다시 침공할 확률도 낮았다.

후대에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나, 로만 드미트리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녕 자신이 바라는 것일까.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진정한 군림은, 그 어떠한 불안 요소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체계였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영웅들은 각자만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또한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알면서도, 감히 마계를 무너트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마계의 존재가 거슬린다. 내가 다스리는 이 세상을 침공하겠다는 같잖은 생각이, 설령 전쟁에서 패배할지라도 마계로 도망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내가 바라는 완벽한 평화는 적어도 눈에 보이는 불안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 것. 마계는 명백히 인류에 해가 되는 악(惡)이다.’

신은 말했다.

천명이라고.

강제적으로 평화로운 방법을 택하길 바라며, 그는 천명이라는 단어로 마치 옳은 일처럼 치장했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차원의 규율을 어그러트린 존재는 마계의 마왕이다.

그를 통제한다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을 문제건만, 신의 영향력이 마계에는 닿지 않기에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명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타고난 운명이 아닌, 스스로가 나아갈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우화등선을 거절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로만 드미트리는 스스로를 믿었다.

‘단 며칠을 살아도,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스스로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무너트렸듯, 이번에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그와 관련한 모든 문제는 감수했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희생 없는 과정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는 천명을 거절한다. 감히 내가 다스리는 세상을 호시탐탐 노리는 마계의 존재들을 박멸하고 온전한 평화를 되찾는 것. 나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든, 내가 바라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 순간.

신은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신(神)의 반열에 오른 자여. 너희 뜻이 천명이리라.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으로서, 너의 의지를 지켜보겠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강렬한 폭발!

세상이 하얗게 물들며, 로만 드미트리의 정신이 폭발에 휩싸였다.

* * *

실제로는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다.

세차게 일어나던 빛이 가라앉자, 노이만이 비틀거리며 그대로 탁자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이, 이게 무슨.”

“신이 직접 강림하다니.”

다들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신의 강림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간혹 신탁(神託)이 내려오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사제의 몸에 강림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충격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멍하니 노이만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뒤늦게 신이 이번 일을 경고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움베르토 국왕이 말했다.

“……방금 사제의 몸에 강림한 신은 분명히 이번 계획을 강행하게 될 경우, 인류는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흘려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 대가라는 것이 인류를 무너트릴 재앙이라면, 우리는 금단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무려 신이 직접 경고한 것이지 않습니까.”

프랑크 국왕도 말을 보탰다.

의견이 갑자기 기울었다.

마계 정벌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신의 메시지를 직접 듣고 나니 차마 계획을 강행할 수 없었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와 신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것은 정신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진실이라고는 차원의 규율을 어길 경우 인류가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 대가라는 진실. 그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동요하지 마라.”

담담했다.

신의 뜻을 마주하고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우리는 마계와 공존할 수 없다는 판단에 마계 정벌을 결정했다. 신이 우리에게 어떠한 재앙을 내린다고 한들, 당장 눈앞에 직면한 문제는 마계의 마왕이 이 세상을 호시탐탐 노린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거지? 언젠가는 이 세상이 어둠의 마력에 물들지도 모른다면, 신이 예고한 재앙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보다 최악의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마라. 바람 앞에 흔들릴 의지라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든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신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모두 스스로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신의 뜻을 따른다고 한들, 그것이 너에게 평화를 보장해 줄 것 같나.”

다들 동요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그들은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이해했다.

선택의 대가를 모르기에.

신이라는 존재가 부여하는 무게감이, 강인한 사람들조차 짓누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믿어라. 나를 믿고 따른다면, 너희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겠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실을 배제한 신뢰를 바랐다.

* * *

이 세상.

신의 뜻이 우선되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왔고, 그렇기에 신의 뜻을 대변하는 자들의 말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문제는 신이 직접 강림했다.

사람들로서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이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말에 그 누구도 거절하는 뜻을 말하지 못했다.

왜일까.

신을 믿지 않아서?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신을 믿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그들의 가슴에 박혔다.

‘주군의 말처럼 신은 인간들의 평화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눈앞에 계신 주군은 항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바르코도, 베네딕트 후작도, 크로노스 제국도, 발할라 제국도. 모두가 거대한 문제처럼 보였으나, 모두 주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크리스였다.

피가 들끓었다.

맹목적으로 믿어 달라는 그 말에, 크리스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주군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없다.

크리스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신이었다.

그가 해냈던 일들이, 그가 보여 주었던 모습들이. 존재한다고만 생각했던 신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눈으로 보고 들었던 것들을 더 믿고 싶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이단(異端) 행위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간 받았던 믿음을 믿음으로 보답하는 것만으로도, 크리스는 자신의 삶을 바칠 가치가 있었다.

“신(臣) 크리스. 황제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그가 시작이었다.

고개를 숙이며 충성 맹세를 부르짖자, 그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듯이 곧바로 몇몇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 케빈. 황제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신 펠릭스. 황제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신 에드윈 헥토르. 황제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그들 또한.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신과 같은 존재였다.

천명.

백중혁이 로만 드미트리로서 눈을 뜬 그때부터, 이미 운명은 뒤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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