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천명(天命) (4)
이사벨.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성녀라고 불리는 존재가 대륙의 혼란 속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녀는, 오델리아의 멸망을 확인한 직후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그날.
한참을 기도하던 그녀는, 마음속으로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었다.
‘악의 무리가 사악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마계와의 통로가 개방될 것이고, 알렉산드르로 인해 제약이 사라진 마계의 악마들이 이 세상을 공격하겠지. 겨우 하수인에 불과한 알렉산드르가 오델리아의 수도를 멸망시킬 정도의 마법을 사용한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신께서 내게 말씀하신, 이 세상의 존망이 걸린 어둠의 시기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진실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알기에, 그동안 그것을 막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간신히 억눌렀던 악의가 사방으로 삐져나왔다.
알렉산드르가, 마계의 마왕이, 이 세상을 집어삼키기 위해 행한 일들이 자신의 숨통을 조여 왔다.
신탁은 말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언제고 신의 뜻을 대신할 자가 나타나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놓친다면, 세상은 영원토록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신의 뜻을 대신할 자.
자신이 감당해야 할 현실이었다.
진실을 모르는 이들에게 가혹한 현실을 떠안길 수 없기에, 이사벨은 눈앞에 다가온 음모를 해결하고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사실 그녀조차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한들 그녀의 힘은 미약했고, 세상을 위협하는 어둠은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대했다.
고개를 들었다.
신을 바라보며, 그녀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저는 이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천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때는 제가 세상에 닥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종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저 하나로 앞으로 다가올 절망을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마계로 떠나고자 합니다. 전쟁과 혼란으로 뒤얽힌 인간들이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도록, 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것에 목숨을 걸겠습니다.”
스스로도 알았다.
이 선택.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마계로 넘어가는 순간 지상계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 또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도 받아들이는 것이 천명이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성녀라고 불렸던 이사벨에게, 이보다 나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신의 뜻임을, 이사벨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올바르게 나아가기에.
신은 침묵했다.
자신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한 것만으로도 신은 많은 제약을 떠안았고, 이사벨은 되도록 스스로가 신의 뜻을 헤아리도록 노력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신의 축복이 내려앉은 장소에서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그중.
왕실기사단장 레오가 있었다.
지나온 세월 속에서 항상 같이 있었던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여왕님. 아르카디아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탁은 매번 여왕님의 희생을 요구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이 휴전을 선언한 지금은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어요.”
고개를 저었다.
천명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는 선택이나, 이사벨은 그들에게 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르가 오델리아의 수도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금단의 영역인 9서클 마법을 사용했어요. 그것은 제약(制約)이 해제되었다는 의미고, 그렇기에 우리가 나설 것을 알면서도 대륙 전쟁을 감행한 것이겠지요. 이제는 시간이 없어요. 그들이 인간의 죽음으로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순간, 그때는 신의 힘을 빌린다고 한들 대륙에 닥칠 어둠을 막을 방법이 없어요.”
그날.
이사벨을 비롯한 병사들은 길을 떠났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숭고한 희생.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은 이사벨의 헌신을 알지 못하나, 그녀는 그렇게 길을 떠나야만 했다.
* * *
세상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르카디아의 붕괴, 제2차 대륙 전쟁, 알렉산드르의 죽음 등등.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동안, 마계로 들어선 이사벨과 그녀의 병사들은 시간의 개념을 잊어 갔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마계로 들어선 순간부터 마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이사벨은 신성력의 힘을 발현해서 그들을 도륙해 버렸다.
마계와 지상계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두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 차원의 붕괴, 지상계의 혼란 등등 대부분의 조건이 맞추어지는 상황에서, 이사벨의 신성력은 통로가 형성되는 것을 막았다.
피로 점철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병사들이 줄어들었고, 이사벨도 피로 흠뻑 물들어 생명이 고갈되는 느낌을 받았다.
‘신이시여.’
신을 찾았다.
버틸 힘을 바랐다.
신은 어둠의 마력을 뚫고 그녀에게 무한한 힘을 주었고, 덕분에 마물들의 공격 속에서도 끝까지 버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 한계에 달했다.
3군단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꼬리가 밟혔고,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매일 혈투(血鬪)를 반복했다.
결국.
병사들을 모두 잃었다.
레오와 둘이서 싸움을 이어 나갔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절망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쿨럭.”
레오가 피를 뱉어 냈다.
그 주변으로는 마물들의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적들이 얼마나 죽었느냐보다 레오의 몸을 찢어발긴 처참한 상처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이사벨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레오마저도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번만큼은 감정의 동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성녀로서.
항상 의연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기에, 그들이 바라는 것과 같은 존재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은 성녀일 수 없었다.
레오는 오랜 인연이었다.
이사벨이라는 사람의 삶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레오는 자신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여왕님. 아니, 이사벨.”
레오의 얼굴이 안정을 되찾았다.
절대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죽기 직전의 레오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웠다.
“내가 기억하는 이사벨이라는 사람은 참 여렸어. 사람들이 성녀로 치켜세운다는 사실에, 자신을 유일한 희망처럼 여긴다는 사실에, 부모에게 어리광을 피워야 할 나이인데도 항상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었지. 나는 그런 네가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었어. 아르카디아 사람들에게 닥친 문제들을 네가 모두 해결할지라도, 그것이 너 스스로를 위한 일은 아니었잖아.”
웃었다.
자신을 포함한 병사들 모두.
이사벨의 진실을 알았다.
그리 강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마계로 떠나겠다는 그녀의 결심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다시 성녀로서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했다.
그녀를 따르는 길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레오와 병사들은 이사벨의 곁을 끝까지 지켜 주고 싶었다.
그것은 의리였다.
인류를 위해 희생한 그녀에게, 적어도 혼자라는 참담한 기분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우웩.”
피를 뱉어 냈다.
다시 창백해지는 안색에, 레오가 흐릿한 눈동자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여왕님. 저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성녀가 아닌 인간 이사벨로서. 그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해…….”
더는 말하지 못했다.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가던 레오가, 죄송하다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끝났다.
모두가 죽었다.
이사벨은 홀로 남았고, 더는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미안해요. 하지만 여러분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성녀 이사벨로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게요.”
검을 딛고 일어났다.
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았다.
죽을 것이다.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죽일 것이다.
어떤 이는 미련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이 성녀 이사벨로서 택한 자신의 삶이었다.
* * *
그리고 현재.
궁지에 몰렸다.
처음으로 3군단장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가 부리는 휘하 마물들에 의해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키에에에엑.”
“케엑.”
마물들을 단번에 휩쓸었다.
먹구름을 뚫고 내리꽂히는 신성력은 매우 강력했으나, 수백의 마물들을 처리해도 그 이상의 마물들이 빈자리를 메웠다.
숨이 가빠 왔다.
이미 전신은 무사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으며, 피에 흠뻑 물든 머리칼은 찬란했던 본래의 색을 잃어버렸다.
쿵.
쿵, 쿵.
세상이 뒤흔들렸다.
3군단장이 다가오는 모습에, 이사벨은 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엄청난 압박감을 받았다.
“인간 계집. 신의 총애(寵愛)를 받아 그동안은 버틸 수 있었으나, 이곳은 신의 개입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니 현실을 받아들여라. 우리는 너를 비롯한 지상계의 모든 인간을 말살할 것이며, 너희가 힘들게 지켜 왔던 세상은 우리를 즐겁게 할 유희 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차원의 규율.
그딴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차원의 붕괴로 인한 현상은, 오히려 그들이 바라는 미래였다.
끝났다.
검은빛으로 물든 거대한 괴생명체를 바라보며, 이사벨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득.
레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날의 레오는, 힘겨워하는 이사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왕님.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만약 여왕님이 신탁이라는 무거운 짊을 내려놓는다고 한들. 인간들은 그동안 반복되었던 역사가 증명하듯, 어떻게든 새로운 길을 찾을 겁니다.”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웃었다.
레오로서는 이사벨이 성녀로서의 짐을 내려놓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진심은 그와 달랐다.
어느 날.
이사벨은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서 들었다.
그가 살아온 삶, 그가 보여 주는 행보,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강인함.
알렉산드르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사벨은 어쩌면 자신이 신탁의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뜻을 대신할 자. 자신은 신이 바라는 목적을 이룰 힘이 없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라면, 일개 남작 가문에서 태어나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이루어 낸 그라면 가능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모아 대답을 기다렸지만, 신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었음을.
자신은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그런 용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또한 천명이었다.
신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사벨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자신이 비록 사람들이 바라는 신탁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이사벨의 삶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성녀라고 불리며, 인류의 구원자로 추대받았던 그녀에게 이기적으로 개인을 생각하는 그런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주인공이 아님을 알면서도.
마계로 들어섰다.
피가 튀고 고통에 휩싸이는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이 행하는 일들이 옳다고 믿었다.
인류를 위한 일이다.
그리고 자신이 쓰러지고 나면, 그 뒤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다는 사실에 웃음을 보일 수 있었다.
“……네 녀석은 죽이고 가마.”
쿠르르르르르릉.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마계와 지상계.
분리된 차원이다.
이 이상으로 신의 힘을 받아들였다간, 차원의 규율로 인해 자신의 몸도 무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차원의 규율은 단순히 신이 정한 것이 아니다. 태초(太初)에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졌고, 신은 그것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건방진 녀석.”
쿵.
3군단장이 다가왔다.
근육질로 뒤덮인 거대한 몸체에, 괴물의 형태를 한 얼굴이 붉은 안광을 토해 냈다.
그가 마력을 일으켰다.
어둠으로 일렁이는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며, 이사벨의 힘에 정면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그때였다.
번뜩.
쿠르르르르르르르르릉.
수십 발자국 떨어진 거리.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갑작스럽게 차원의 경계가 찢겨나갔다.
* * *
순간.
머릿속으로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다.
마치 차원의 문이 열리듯 찢겨나가는 공간에, 이사벨은 잠시 현실을 잊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될.
단 한 번도 상상치도 못한 상황.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저벅저벅.
차원의 균열 너머로.
로만 드미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