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0화 (450/615)

450화 마계 정벌 (5)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피비르가 은신을 풀고 나와 권능을 발현하는 일련의 상황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뜰 때까지의 그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인간이 반응할 영역이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벨제르트와 같은 강자일지라도, 마왕이 아니고서는 완벽하게 반응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크악, 크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바닥에 주저앉았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너덜너덜해진 가슴팍이 보였다.

피가 콸콸 쏟아졌다.

훤히 드러난 가슴뼈는 일부가 부서져서 내부 장기를 찌르고 있었고, 장기에 눌어붙은 오라의 파편이 뜨거운 고통을 선사했다.

“으으으.”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가 마물을 베어 버리는 타이밍을 공략했건만, 막상 그가 맞닥트린 상황은 자신의 몸을 찢어발기는 광경이었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은신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충분히 반응할 수 있다는 판단에 방관했을 뿐이다.

그때였다.

고개를 들자,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검이 보였다.

‘죽는다.’

“다크 실드(dark shield).”

콰앙!

쨍그랑.

간발의 차이였다.

먼발치에 있던 벨제르트의 마법이 공격을 막아 주었고, 다크 실드가 부서지는 찰나의 순간에 몸을 날려 도망쳤다.

움직일 때마다 가슴팍에서 충격이 일었다.

이대로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비르는 주변에 득실거리는 마물들의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콰악.

“블러드 드레인(blood drain).”

꾸르르르르륵.

피를 빨아들였다.

마물들이 순식간에 미라처럼 비쩍 말라 버리더니, 그들의 피를 빨아들일수록 가슴팍의 상처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다.

땅바닥을 개처럼 기면서도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마왕의 명령을 받아들일 때만 하더라도, 설마 인간을 상대로 블러드 드레인을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분노가 일었다.

분노를 담아 다시 반격하려고 고개를 도는 순간, 피비르는 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푸확.

“크에에엑.”

“키에엑.”

마물들이 찢겨 나갔다.

피비르가 도망치자마자 그 길목을 마물들이 막아섰고, 벨제르트의 흑마법이 멀리서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그런데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오라를 일으켜 벨제르트의 흑마법을 베어 버리더니, 막아서는 족족 마물들을 도륙하며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불과 조금 전.

로만 드미트리가 홀로 접근한다는 말에, 피비르는 실실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우리의 전력을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멍청하거나, 아니면 로만 드미트리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무언가를 노리려는 것이겠지요. 참 같잖지 않습니까. 머리를 굴려 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말입니다.”

벨제르트와는 달랐다.

벨제르트는 사나운 얼굴을 보였지만, 피비르로서는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반응하는 그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상대는 인간일 뿐이다. 수많은 마물들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고 한들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푸확.

피가 흩뿌려졌다.

로만 드미트리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네가 2군단장 피비르인가.”

소름이 돋았다.

확실했다.

이 녀석은 정말 혼자서, 이 많은 마물들을 도륙할 속셈이었다.

* * *

후발대(後發隊).

사실 후발대라는 명칭이 민망할 정도로,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한 모든 병력은 뒤늦게 로만 드미트리가 지나간 길을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복잡한 감정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권력자들은 보통 명령만 내리는 존재들인데, 로만 드미트리는 황제인데도 불구하고 선봉에 섰다.

저 멀리.

시야가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벌어질 전투를 생각하니, 그 누구도 발걸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동하던 와중, 이사벨이 크리스에게 물었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요.”

로만 드미트리의 전략.

무모했다.

홀로 위험을 떠안겠다는 그 말에, 회의가 끝날 때까지 반대 의견을 주장했던 사람이 이사벨이었다.

이제는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를 알았다.

절대 물러나지 않는, 단 한 번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 강인한 인간임은 알겠지만, 문제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크리스가 말했다.

“저도 주군이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분이 내린 결단을 믿을 뿐입니다.”

그도 가슴이 끓었다.

후발대를 맡으라는 명령은, 마계의 악마들을 상대로는 그 이상의 역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화가 났다.

자존심이 상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같이 하고 싶었으나, 그간의 경험이 감정을 억눌렀다.

“저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습니다. 늘 불리하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드미트리는 그렇게 제국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웃긴 사실이 뭔지 아십니까? 그 누구보다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저조차도, 단 한 번도 그분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불가능하다던 적들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상대로는 한계를 드러낼 필요조차 없는 적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따르는 것입니다.”

꽈악.

검을 움켜쥐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한스에게 말했던 그 말은,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우리는 주군을 믿습니다. 그분의 명령이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 앞에 얼마나 많은 적이 기다리고 있던 주군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녀님도 그 정도만 하십시오. 설령 이 선택으로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질지라도,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주군의 명령을 이행할 것입니다.”

대단한 의지였다.

이사벨이 말을 삼켰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어째서 맹목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지를.

그는 자신과 달랐다.

짐을 떠안길 망설이지 않는 강인한 존재를 바라보며, 정말 짧은 시간을 경험한 자신조차도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신뢰가 생겨났다.

믿었다. 그가 앞으로의 시련을 감당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지금부터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가 내린 명령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척척척.

크리스가 신호를 보냈다.

마물들의 잔재가 보였다.

사방에 널브러진 마물들의 사체를 바라보며, 대륙 연합군의 병사들이 의지로 들끓는 눈빛을 보였다.

이 끝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을 것이다.

시야에도 마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따르라! 전군 공격하라!”

“공격하라!”

“드미트리를 위하여!”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진군.

크리스를 필두로 대륙 연합의 병사들이, 멀리서 보이는 마물들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 * *

대혼란의 시대.

피비르를 비롯한 군단장들은, 마왕에게 무릎을 꿇을 때까지 각자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 주었다.

흑마법의 벨제르트.

피의 지배자 피비르.

괴력의 바벨까지.

벨제르트는 흑마법 하나로 수십만 마리의 마물을 학살했으며, 피비르는 피의 권능으로 죽이지 못하는 존재가 없었다.

바벨은 마물의 한계를 초월한 괴물.

그렇게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던 그들은, 마왕이라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나면서 군단장의 칭호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부심이 있었다.

마왕에게 패배했다고는 하나, 그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자신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자부심이 산산이 부서졌다.

득달같이 따라붙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피비르는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블러드 레인(blood rain).”

팟.

파파파파팟.

사방으로 피를 흩뿌렸다.

마물들의 사체에서 딸려 나온 피가 수백 발의 가시로 변하더니, 그대로 비처럼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피비르는 이 기술 한 번에 거물급 악마를 쓰러트린 경험이 있었다.

온몸을 꿰뚫어 버리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공격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카카카캉.

모조리 막혔다.

로만 드미트리는 피비르의 공격을 일일이 받아치더니, 그 와중에 달려드는 마물의 목을 베었다.

푸확.

피가 튀었다.

얼마나 많은 마물을 죽였는지, 로만 드미트리의 검은 머릿결이 핏빛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순간 벨제르트의 마법이 작렬했다. 어둠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 위로 검은 번개를 떨어트렸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일대 다수.

압도적으로 불리한 환경이었다.

이제는 쓰러져야 납득이 가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마력의 폭풍을 뚫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콰르릉.

파파파파팟.

마물들의 육체가 찢겨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는 피비르와의 거리를 좁히며, 그 길목을 막아서는 존재들을 순식간에 도륙해 버렸다.

마물들에게도 등급이 있다.

최상급, 상급, 중급, 하급으로 나누어진 단계에서, 최상급의 마물들은 특별한 권능은 없을지라도 단순히 육체적인 능력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최상급 마물 수십 마리의 목이 단번에 날아갔다.

로만 드미트리를 덮치겠다고 달려들었던 그들은, 특별한 수확 없이 비틀거리며 무너지고 말았다.

쿠웅.

쿠르르르르릉.

피비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떠한 공격도.

어떠한 방법도 먹히지 않았다

막상 마주한 로만 드미트리라는 괴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마왕에 버금가는 존재다. 우리만으로는 절대 쓰러트릴 수 없어.’

아득한 차이를 느꼈다.

마왕을 상대했을 때 단 30초 만에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도 그와 같은 존재라는 확신이 들었다.

뒤늦게 벨제르트의 경고가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벨제르트는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벨제르트 님. 지금이라도 마왕님에게 보고하고 저희는 물러나야 합니다. 저희가 감당할 존재가 아닙니다.

다급하게 신호를 보냈다.

정신으로 연결되는 목소리에, 벨제르트의 대답이 돌아왔다.

[불허(不許)한다. 마왕께서 우리를 보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분은 지금 로만 드미트리를 시험하고자 한다. 그가 얼마나 강력한지, 직접 나설 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러니 우리는 그분의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물러나서는 안 된다. 항명은 반드시 죽음으로 직결될 것이다.]

“빌어먹을!”

뒤늦게 알았다.

벨제르트.

그는 진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자신을 전면에 내세워서, 일단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확인하고자 했다.

콰득.

바로 앞에서 피가 튀었다.

찢겨 나가는 마물의 육체에, 피비르는 도망만 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든 한 방을 먹여야만 했다. 자신은 2군단장 피비르다.

마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괴물들을 모조리 무릎 꿇렸던 자신이, 마계의 영역에서 인간 따위에게 죽임을 당할 수는 없었다.

확.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을 개방했다.

폭발하는 마력이 그를 감싸며, 피비르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블러…… 컥.”

번뜩.

눈을 부릅떴다.

늦었다.

그가 권능을 발현하기도 전,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이번에는 그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 * *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바벨에 이어.

피비르마저 무력하게 당해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피비르의 머리에서 시선을 거두며, 먼발치에 있는 벨제르트를 보았다.

“너희가 모두 죽을 때까지 마왕은 나서지 않을 속셈인가.”

그 어디에서도.

마왕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피로 물든 머리를 넘기더니, 담담한 얼굴로 벨제르트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면 모조리 죽이는 수밖에.”

팟.

콰르르르릉.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목표를 바꾼 상황에, 일련의 상황을 지켜본 벨제르트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위험하다.’

피비르의 생각처럼.

그는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확인하기 위함도 있었고, 피비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자리를 대체할 방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생각보다 로만 드미트리가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시작부터 전력을 끌어올렸다.

“로만 드미트리! 네가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나, 너는 절대 마왕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리바이벌(revival).”

쿠르르르릉.

“크악!”

“크르르르륵.”

마력이 퍼져 나갔다.

사지가 찢겨 나갔던 사체들이 다시 일어났고, 그중에는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피비르도 존재했다.

순식간에 로만 드미트리가 나아가는 길목에 수많은 마물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육탄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저지했다. 수백 마리가 도륙당할지라도, 그 자리를 수천 마리가 메우며 길을 막았다.

동시에.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서클을 열었다.

벨제르트 스스로를 마계와 완전히 동화시켰다.

‘설마 이걸 사용하게 될 줄이야.’

대혼란.

그날, 벨제르트는 가장 끝까지 마왕에게 저항하던 존재였다.

결국은 무릎을 꿇었지만, 현실을 수긍한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게 그는 언제라도 마왕의 변덕에 본인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흑마법의 권능. 그것을 극한으로 갈고닦았다.

마왕과 적대하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에게 한 방을 먹일 자신만의 무기를 준비했다.

피비르가 죽고도.

마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마왕은 뜻을 전했기에, 벨제르트는 살고자 자신의 전력을 드러냈다.

“데쓰(death).”

죽음의 주문.

마력이 폭발했다.

로만 드미트리도 그 광경을 마주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엄청난 마력에,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너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느냐.’

셰피르.

그를 죽였던 일격.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그때는 지의 경지에서 사용했다면, 지금은 하늘에 닿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직 벨제르트와의 거리는 멀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탁.

여덟 번째 걸음.

마력이 폭발적으로 들끓었다.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마력에, 로만 드미트리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천마검법 후반부 이초식.’

번뜩.

진심으로 빌었다.

벨제르트가.

이 공격을 막아 내기를.

자신을 조금 더 즐겁게 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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