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마계 정벌 (6)
쿠르르르르르릉.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정면에서 맞닥트리는 이 순간, 벨제르트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재생되었다.
셰피르가 죽던 날.
벨제르트는 생각에 빠졌다.
‘이게 정녕 한낱 인간이 발휘한 힘이라니. 무언가 잘못되었다. 내가 아는 인간이라는 족속들은 절대 태생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셰피르를 일격에 쓸어 버린 이 공격은, 그동안 우리가 지켜봐 왔던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하는 파괴적인 힘이다.’
상식을 벗어났다.
벨제르트로서도 경계할 수밖에 없는 파괴력이었고, 그때부터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혜성처럼 나타나 마계의 원대한 계획을 무너트리는 존재.
그라는 변수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셰피르가 죽은 자리를 찾아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대지의 기억을 읽는다면, 일련의 상황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겨우 인간 따위를 경계하는 모습을 다른 존재들에게 보일 수 없었다.
마계.
포식자의 세계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마물조차도 스스로를 포식자로 생각하는데, 그들이 만약 인간을 경계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같은 군단장으로 묶여 있기는 하나, 피비르와 바벨도 군단장의 위상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일이라면서 비난했을 것이 분명했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위험성을 대비하는 것은 당연하나, 벨제르트는 한낱 인간 때문에 비난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외면했다.
어차피 인간이기에.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뿐이라는 사실로 문제를 그냥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지금.
벨제르트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대륙을 정벌할 줄 알았다면, 그가 마계로 넘어올 만큼 호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바벨과 피비르와 같은 군단장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조건 그의 존재를 대비했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문제라면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 후회되었다.
오라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는 파괴적인 힘에, 벨제르트는 이대로라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격에 전력을 다한다.’
서클의 마나를 확장시켰다.
마나를 더욱 끌어 올렸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판단에, 리바이벌에 사용된 마나를 다시 회수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죽음의 강을 건너왔던 마물들이 픽픽 쓰러졌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판단인지를 알았지만, 단 한 번의 일격에 로만 드미트리를 무너트리지 못한다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낱 인간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만약 전력을 다한 일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어떻게 발악하든 절대 무너트릴 수 없는, 그리고 마왕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괴물일 것이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이 폭발했다.
데쓰는 파멸적인 힘.
상대의 오라와 맞닥트리는 순간, 오라를 찢어발기고 생명력을 그대로 집어삼키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보았다.
콰앙!
콰콰콰콰콰콰쾅!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충돌.
그 와중에 자신의 마력을 관통하는 한 줄기의 빛을.
‘그날, 나는 그 일격을 대비했어야 했다.’
그렇게.
퍼퍼퍼퍼퍼퍼퍼펑.
벨제르트의 의식이, 그대로 마력의 폭풍에 휩쓸리고 말았다.
* * *
털썩.
무릎을 꿇었다.
벨제르트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끄윽, 끄윽.”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가슴뼈가 전부 부서져서 안의 내용물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심장을 두르고 있던 서클은 형태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갈기갈기 찢겨 나간 그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벨제르트는 역겨운 기운을 삼켜 내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강제로 들 수밖에 없었다.
콱.
“벨제르트.”
우악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로만 드미트리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시선에,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패배하다니.’
방금의 일격.
압도적이었다.
벨제르트는 마왕을 대비하겠다는 생각으로 비장의 일격을 준비했건만, 그것이 한 인간을 상대로 무참히 부서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패배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마왕에 버금가는 존재였다면, 그가 마계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은 인간의 오만함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인정했다.
마왕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 존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 먹잇감에 불과했던 인간들이, 대체 왜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벨제르트는 강했다.
일격에 죽어 버린 셰피르와는 다르게, 천의 경지에서 사용한 후반부 초식을 정면으로 맞닥트리고도 벨제르트는 죽지 않았다.
단언컨대 인간 중에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 그러한 말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상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강함이란 상대적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벨제르트를 무너트렸고, 지금부터는 이 너머에 있을 마왕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너희는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했다. 내가 다스리는 땅을, 그리고 나의 사람들을 건드렸다. 이 세상이 지나온 역사에 대한 복수를 행하기 위함이 아닌, 나의 영역을 침범한 존재들에게 확실한 대가를 치르고자 한다.”
꽈악.
손에 힘을 주었다.
강력한 압력에, 벨제르트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부릅뜬 눈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경악스러웠다.
인간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만으로, 설마 이렇게 반격을 당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이곳은 마계다.
신조차 공략하지 못한 세상.
로만 드미트리가 벨제르트의 머리를 젖히더니, 그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기다려라. 마계의 모든 존재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콰득.
콰드드드득.
목을 베어 버렸다.
벨제르트가 발악했으나, 강철보다도 단단한 그의 외피와 뼈가 갈라지며 고통이 밀려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처형은 짧았다.
폐허가 되어 버린 땅에 마물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고, 그렇게 모두가 보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제1 군단장의 목숨을 끊었다.
툭.
영혼을 잃은 육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자, 아직도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 수많은 숫자의 마물이 눈에 보였다.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이 너머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존재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피와 죽음이 필요했다.
“끝까지 나타나지 않겠다면, 내가 그곳으로 가지.”
걸음을 옮겼다.
마물들로 득실거리는 공간을 향해.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 * *
마물.
그들은 짐승과도 같다.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존재들이지만, 피비르와 벨제르트의 죽음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적대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만약 그들에게 도망칠 수 있다는 선택권이 있었다면, 수백만 마리의 동족들이 곁에 있는 상황일지라도 주저 없이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의 뜻을 따라, 그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키에에엑!”
“캬악!”
장관이었다.
한 명의 인간.
수백만 마리의 마물.
서로 뒤얽혔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혈투였고, 로만 드미트리는 군단장들을 상대하고도 전혀 체력적인 소모가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벌써 몇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보랏빛으로 물든 세상은 시간의 개념을 잊게 만들었고, 산더미처럼 쌓인 사체는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갔다.
마왕의 의도가 눈에 보였다.
그는 지금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기꺼이 마계의 존재들을 모조리 사지로 몰아넣었다.
‘너 또한 내가 강하길 갈망하는구나.’
일련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는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모순된 감정이었다.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길 바라보면서도, 강한 존재를 상대한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는 모습이.
전생에 로만 드미트리는 갈증에 시달렸다.
천의 경지에 오르기도 전에 무림을 정벌했고, 나날이 강해지는데도 자신의 힘을 확인할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엄청난 갈증이 일었다. 항상 피를 뜨겁게 만들 적수를 바랐으나, 감히 천마와 검을 섞어 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준은 한심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싸우지 않는 것보다 못한 실망감에, 백중혁은 자신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관문을 통과하도록 절차를 만들었다.
그 결과.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백중혁을 상대하기는커녕, 관문으로 내세운 존재들조차 쓰러트리지 못해 모조리 목이 날아갔다.
지루한 삶이었다.
갈망은 들끓다 못해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마왕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마왕은 마계와 지상계의 전쟁 자체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마치 강하길 바라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혼자서 마계 전부를 상대해도 승리할 수 있는 존재였다.
벨제르트, 피비르, 바벨. 마계를 대표하는 3군단장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이 마왕을 향한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궁금했다.
그가 얼마나 강할지.
어쩌면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일지도 몰랐다.
벨제르트가 후반부 이 초식을 버텨 내면서, 로만 드미트리는 마왕을 향한 기대심을 숨기지 못했다.
기꺼이 그의 시험에 응할 것이다.
다만.
자신이 느낀 바가 진실이기를 바랐다.
마왕이 강하기를.
자신이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그런 상대이기를.
로만 드미트리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인 채,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들을 피하지 않고 맞닥트렸다.
* * *
그 무렵, 후발대.
상당한 강행군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마물들이 남아 있었고, 그 잔재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대륙 연합군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끝이 없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그래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지만, 시간의 개념을 잊어 가기 시작하자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닥쳤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처럼 전투를 벌였고, 피로 흠뻑 물든 사람들이 한고비를 넘기자 크리스가 마물의 육체에서 검을 빼내며 소리쳤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것이다. 각자 자리를 잡고, 경계 순서에 따라 주변을 경계하도록.”
“알겠습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대략 잡아도 일주일은 충분히 넘어가는 상황에, 대륙 연합군의 병사들로서는 반드시 휴식을 동반해야만 했다.
물론 충분하게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잠깐 눈을 붙이면서 근육의 피로를 푸는 정도였고, 미리 준비한 육포와 같은 간단한 식량들로 배를 채우면서 체력을 보존했다.
이번 마계행.
군량(軍糧)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 간단한 식량들로 준비했고, 마법사들의 아공간 마법을 통해 한 달은 충분히 버틸 만한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한 기간이었다. 만약 한 달 안으로 승부를 보지 못한다면, 마계행은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았다.
휴식은 짧았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휴식이 끝나 버렸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푸확.
“크에에엑.”
피가 튀었다.
이사벨은 마물 여럿을 단번에 도륙해 버리더니, 신성력의 힘을 발현해서 주변에 축복을 불어넣었다.
“블레스.”
후광이 일었다.
성녀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활약을 보이며 후발대를 따라온 이사벨은, 전투가 계속될수록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경외심이 커지는 걸 느꼈다.
후발대는 정말 엄청난 강행군을 감행했다.
아주 잠깐씩 휴식을 취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들 눈에 불을 켜며 로만 드미트리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아직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여야 정상이건만, 항상 후발대가 도착하는 장소에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은 이미 인정했으나, 홀로 저 수많은 마물을 감당하는데도 이런 압도적인 속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이 정도로 강군(強軍)이었었나.’
기억의 괴리였다.
그래도 이사벨이 기억했던 드미트리는 어느 정도의 모습이 있는데, 그 짧은 시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크리스와 케빈 같은 강자들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일반 병사들조차도 피 튀기는 난전에서 조금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드미트리의 결단을 따랐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존재들과 함께라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번뜩.
콰득.
“캬아아악!”
마물들을 도륙했다.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더는 모든 짐을 떠안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은 이제 대륙 연합군을 구성하는 구성원일 뿐이기에, 더는 그 이상을 해내려고 아득바득 발악할 필요가 없었다.
눈앞의 상황에만 전념했다. 모든 것을 잊고 적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리칼이 완전히 피로 물들고, 이제는 숨을 내쉴 때마다 피 내음이 가득할 정도로 살육에 찌들어 버린 모습을 보였다.
대륙 연합군의 모두가 동일했다.
옆에서 죽어 나간 동료들의 시체를 묻어 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마계에서의 시간은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만약 바깥이었다면.
밤낮이 수도 없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전투를 감행하는 그때, 이사벨의 귀로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야! 저기를 보라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고개를 들어 소리가 말한 방향을 바라보자, 이사벨은 온몸에서 전율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저 멀리.
마왕성이 보였다.
어렴풋한 형체에 불과하나, 그것은 분명히 마왕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