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2화 (452/615)

452화 마계 정벌 (7)

마왕성.

생명체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그곳에, 한 사내가 창밖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빛의 머리에 창백한 피부. 안색만큼이나 퀭한 눈을 한 인간 형태의 그를 보고는 그 누구도 마왕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성에 그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마계의 생명체들은 감히 마왕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거리.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왕성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한 존재로 인해, 마왕은 한순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진짜였구나.’

마계의 3군단장.

그들이 모조리 패배했다.

그들이 죽는 광경을 마왕은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압도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에 전율이 일었다.

마계의 3군단장은 절대 약하지 않다.

대혼란의 시대에서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그만한 자격을 증명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들을 통해 로만 드미트리를 시험하고자 했다.

그 결과.

완벽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3군단장을 상대로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벨제르트를 죽이며 경고를 내뱉는 모습은,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나는 항상 너와 같은 존재를 기다려 왔다.’

오랜 옛날.

마왕이 생명체로서 의식이 생겨난 그 순간부터, 마왕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타고났다.

태생부터가 포식자였다.

대혼란의 시대에 그는 압도적인 무력을 보였고, 반복되는 투쟁의 삶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본능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마계의 존재들은 그를 마왕이라고 불렀다.

지루하고 따분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감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이들은, 마왕의 존재 의미라고 할 수 있는 투쟁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지루한 나날이었다.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일을 벌였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대(古代)의 기록을 발견했다.

대혼란 이전의 시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 고대의 기록은 마계가 외부의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새로운 차원의 존재들.

그들은 강력했다.

단순히 파멸을 목적으로 공격을 시도했고, 그때의 전쟁이 마계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다.

마계의 황폐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결국에는 마계의 악마들이 살아남아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막아 냈지만, 대혼란의 근간이 되는 체계가 무너진 세상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흥미가 돌았다.

마왕은 그걸 패배의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지루함을 달래 줄 새로운 해결책으로 여겼다.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면, 자신 또한 마계를 공격했던 존재들처럼 차원을 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과정에.

분명히 자신을 즐겁게 해 줄 강자가 존재할 것이다.

그런 확신으로부터 지상계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르가 나타나면서 계획은 구체화되었다.

생각처럼 지상계의 침공은 순탄하지 않았다.

개인의 욕망, 마계의 회생, 여러 이유로 시작되었던 전쟁은 3군단장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마계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러 이유 중 하나.

강자를 만나길 바라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한 것만으로도, 마왕은 마계 전체를 희생시킬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생명체들의 현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증명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제 역할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마왕이 걸음을 돌렸다.

‘로만 드미트리. 부디 나를 즐겁게 해다오.’

지금부터는.

충분히 뜸을 들인, 자신의 유희를 즐길 차례였다.

* * *

거듭되는 전투에도 끝은 있었다.

끊임없이 적들을 도륙하던 로만 드미트리는, 갑작스럽게 마물들이 도망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길이 열렸다.

뿔뿔이 흩어지는 마물들 너머로, 드디어 마왕성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나를 직접 상대하겠다는 의미겠지.’

의도는 명백했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또한 바라던 일이었기에, 시야에 보이는 마왕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만큼은 전략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

만약 마왕이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려 한다면 그를 단칼에 베어 버릴 것이나, 정면으로 맞닥트릴 만큼의 강자라면 기꺼이 그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

강렬한 열망이었다.

마침내 마왕성을 눈앞에 두었을 때,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만 드미트리. 드디어 만나는구나.”

마왕이었다.

그는 마치 허공을 계단처럼 밟아 내려오며, 그 또한 이 순간이 즐겁다는 사실을 표정으로 나타냈다.

그의 시선이 로만 드미트리를 구석구석 살폈다.

신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형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자 마왕은 감탄하는 기색을 보였다.

“인간의 몸으로 그렇게 강해질 수가 있다니. 무한한 삶을 살아가며 너와 같은 존재는 처음이다. 그렇기에 나는 너와의 대결이, 이 순간이 서로가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극적이기를 바란다.”

쿠르르르르릉.

마력이 들끓었다.

보랏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이 살의를 드러냈다.

“지금부터 나의 병사들이 네가 데려온 인간들을 공격할 것이다. 단언하지. 너와는 달리 나약해 빠진 인간들은, 절대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전력을 다하라. 너의 사람들을 살리고자 한다면, 전력을 다해 나를 무너트리고 그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 순간.

후발대는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했다.

* * *

공격은 갑작스러웠다.

마왕성을 발견한 이후, 잠깐 휴식을 취하던 후발대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마물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적들의 숫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도 적지 않은 숫자를 상대했으나, 지금은 사방이 새카맣게 물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악!”

“크아아악!”

혈투가 벌어졌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마물들과 맞닥트리는 순간, 격렬하게 뒤엉키며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이미 대륙 연합군은 피로도가 상당히 쌓인 상태였다.

최악의 상황에도 병사들은 악착같이 마물들을 도륙했으나, 홀로 서너 마리를 처리한다고 한들 줄어들지 않는 숫자는 병사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콰지직.

사지가 찢겨 나갔다.

용감하게 전투를 벌이던 병사는, 네 번째 마물을 처리하는 순간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마물들의 손길에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전장 전체에 번지는 현상이었다.

드미트리의 검사들이 아무리 대단한 활약을 펼친다고 한들, 이번에는 상대하는 적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존재했고, 끝까지 저항했으나 이대로라면 모두가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헬 파이어(Hell Fire).”

“파이어 스톰(Fire Storm).”

화륵.

화르르르르륵.

콰르르르르르르릉.

강렬한 불길이 마물들을 휩쓸어 버렸다.

에드윈 헥토르와 펠릭스였다.

이번 마계 정벌에 따라나선 그들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버닝까지 사용하며 전력을 발휘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는 불길이 마물들을 쓸어 버렸다. 처음부터 정해진 전략이었다.

되도록 마법사들은 템포를 조절하면서 싸우다가, 만약 위급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 것으로 얘기를 끝마쳤다.

그 말인즉.

그들은 최후의 보루였다.

에드윈 헥토르가 불길에 휩싸인 채로, 팽팽 돌아가는 서클을 완전히 개방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볼케이노(Volcano).”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땅이 무너졌다.

거대한 돌이 치솟으며 마물들의 사지를 찢어발겼고, 사방에서 뿜어지는 용암은 단번에 육체를 녹여 버렸다.

바람에 펄럭이는 머리칼은 시뻘겋게 변한 상태였다.

에드윈 헥토르를 필두로 마법사들이 무차별적으로 마법을 사용하자, 잠깐이나마 대륙 연합군이 우세를 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찰나의 희망이었다.

사방에 넘실거리는 불길을 뚫고, 머리에 뿔이 달린 거구의 괴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악!”

콰앙!

콰드드득.

그들이 휘두른 무기에 병사들이 휩쓸렸다.

최상급 마물들이었다.

태생적인 한계로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나, 육체적인 능력은 마물의 한계를 뛰어넘는 괴물들이 화염이 넘실거리는 상황에서도 존재감을 표출했다.

그런 최상급 마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야 곳곳에 보였고, 마법으로 휩쓸어 버린 공간도 어느새 다시 마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남기고 간 잔재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대륙 연합군은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끝이다.’

에드윈 헥토르가 이를 악물었다.

심장을 움켜쥐었다.

선천(先天)의 기운을 사용한다면.

위기를 넘길 수도 있다.

그 대가로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겠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 무엇이라도.’

그때였다.

선천의 기운을 폭발하려는 그때.

푹.

“크에에에에엑!”

최상급 마물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대로 무너지는 그의 목덜미 위에는, 피로 흠뻑 물든 케빈이 목덜미에 검을 쑤셔 박고 있었다.

콰앙!

쿠르르르르르릉.

* * *

전장 한복판.

그곳에는 케빈이 있었다.

적들 사이를 활보하며 도륙하던 케빈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씨발.”

밀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사실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가지 못한 현실에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자신이 강했더라면 로만 드미트리에게 보탬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 잔재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마물을 상대로도 전멸당할 위기를 맞이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들끓던 분노가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

‘주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지언정, 짐은 될 수 없다.’

까드득.

이를 악물었다.

눈빛이 변했다.

통제의 영역.

케빈은 광기를 통제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는 의도적으로 귀혼마공의 악귀들이 정신을 잠식(蠶食)하는 것을 허락했다.

[캬악!]

[캬캬캬캬캭!]

[모조리 죽여라!]

팟.

콰르르르르르릉.

케빈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하늘 높이 떠오르더니, 최상급 마물의 어깨에 올라탔다. 최상급 마물은 분노하며 케빈을 공격했다.

하지만 케빈은 어깨를 그대로 베어 버리더니, 빠르게 육체를 타고 올라가 목덜미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푹!

푹푹푹!

피가 튀었다.

얼굴이 피로 물들었지만, 케빈은 오라를 일으켜 주저 없이 목덜미를 난도질해 버렸다.

최상급 마물이 비틀거렸다.

어떻게든 케빈을 떼어 놓으려던 최상급 마물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콰앙!

쿠르르르르르릉.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케빈은 최상급 마물을 한 마리 처리하자마자, 또 다른 목표를 찾아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적의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 또한 짐승의 모습과 흡사했고, 케빈은 광기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을 공격하는 적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했다.

통제와 잠식.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다.

둘을 융합하며 사용하는, 귀혼마공의 창시자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던 영역에 케빈이 도달했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역류를 발현했다.

최상급 마물 중에서 크기가 작은 존재들은, 케빈과 몇 합 주고받은 대가로 머리가 날아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케빈의 존재감이 압도적으로 부풀었다. 피에 흠뻑 물들어, 마치 그가 마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푸확.

피를 뒤엎어 썼다.

케빈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사나운 이빨을 보였다.

“모두 명심하라. 우리는 마계를 정벌하기 위해 차원의 벽을 넘었다. 우리의 패배는 인류의 멸망으로 직결될 것이며, 우리가 승리하지 않고서는 살아 나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콱.

마물의 목덜미를 뜯어 버렸다.

손에서 일어난 강력한 오라에, 마물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 자리에서 모두 죽어라. 주군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죽어서 주군의 짐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콰득.

머리를 짓밟았다.

그러고는, 마물의 사체를 지나 적들로 득실거리는 공간을 향해 서슴없이 걸음을 옮겼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