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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화 (454/615)

454화 마계 정벌 (9)

전생.

백중혁으로서 천의 경지에 올랐을 때, 백중혁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연무장 위에 섰다.

“그러니까, 전력을 다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상대는 혈마였다.

무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모두가 인정하는 마교 최고의 실력자. 그가 살짝 묘한 눈길로 백중혁의 눈치를 살폈다.

백중혁을 뛰어넘겠다는 목표야 늘 마음속에 품어 두었지만, 지금처럼 백중혁이 먼저 대련을 신청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설명은 들었다.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고, 그 힘을 시험할 상대가 필요하다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혈마는 검을 뽑으며, 백중혁을 상대로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스릉.

“저는 적당히 하는 법이 없습니다. 혹여 다치시더라도 반란이라 여기지 마십시오.”

마침 본인도 최근에 성과가 있었다.

한 번쯤 백중혁과 실력을 겨룰 자리가 필요했는데, 이렇게 먼저 제안해 주니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뱉은 말처럼 승리할 자신은 없었다.

무림을 정벌할 때도 괴물이었던 백중혁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면, 자신으로서는 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부딪쳐 보고 싶었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에, 먼저 선공을 감행한 존재는 혈마였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자신의 존재를 일격에 쓸어 버리는, 세상을 하얗게 만드는 파괴적인 힘을.

그러고는,

털썩.

“쿨럭.”

피를 뱉어 냈다.

엉망이 되어 버린 혈마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중혁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의 일격을 경험한 순간, 혈마는 절대 받아들이기 싫었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포기해야겠습니다. 주군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날부터였다.

아무도 백중혁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물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은 늘 존재했지만, 그들은 백중혁이 마련한 관문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모조리 머리가 날아갔다.

오히려 진짜 실력자라고 말할 만한 부류들은 절대 도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백중혁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올랐는지를 알기에, 무림을 정벌하던 당시보다도 압도적인 무력을 경험하고 나서는 그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겼다.

고독한 삶이었다.

강함에 대한 욕망은 여전하나, 실력을 겨룰 상대가 없다는 사실은 백중혁을 고독함에 빠트렸다.

지루했고.

따분했다.

더는 누구를 상대하든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숨이 막힐 듯한 싸움은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다.

매일같이 검을 휘둘러도 목표가 없다는 사실에 허망함이 들었다.

그래서 늘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일격을 막아 내는 상대가 나타나기를.

그래야, 전력을 다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자신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을 테니까.

* * *

분위기가 변했다.

즐겁다는 말.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마왕은 인간 따위에게 무시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기분을 표출하는 어떠한 행동을 하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어느새 치고 들어온 상태였다.

[마왕이여, 전력을 다하라.]

전음이었다.

머릿속으로 음성이 파고듦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이 다리를 노렸다.

“어딜!”

콰릉.

콰르르르르릉.

마력을 일으켰다.

거대한 몸체만큼이나 폭발적으로 들끓는 마나가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를 찍어눌렀다.

그런데 공격이 작렬하기 직전, 로만 드미트리가 예상했다는 듯이 몸을 틀었다.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흘려보내는 동작이었고, 마왕이 그 움직임을 포착하는 순간 이미 팔뚝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번뜩.

피가 튀었다.

마왕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통증보다도, 로만 드미트리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 중요했다.

팟.

콰르르르르르르릉.

사각(死角)을 파고들었다.

팔이 베이면서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동작을 예상하고, 로만 드미트리는 마왕의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 존재를 눈치챘을 때는 로만 드미트리가 다리를 베어 버렸다.

스치듯 지나가는 일격에, 마왕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더니 어둠의 마력을 응축시킨 수백 발의 마력을 일으켰다.

“죽어라!”

콰앙!

콰콰콰콰콰콰콰쾅!

마력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날다람쥐처럼 피하려는 의도라면, 차라리 주변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 순간.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거대한 오라가 공간을 갈랐다.

마왕을 노리는 일격에 그로서는 황급히 피해야만 했고, 날개가 찢겨 나가면서 마왕이 지상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믿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동안 마력의 분출을 최대한 제한적으로 활용하다, 방금은 알렉산드르의 방식으로 마력을 완전히 폭발시켰다.

응용이었다.

새롭게 받아들인 지식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파파팟.

콰콰콰콰콰쾅!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서로 공방을 주고받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쇄도하면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마왕은 모조리 맞받아쳤고, 중간에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어둠의 마력이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치 마왕의 반응을 모두 계산한 것처럼 빠르게 반응했다.

바벨, 피비르, 벨제르트를 상대할 때는 정면에서 힘을 겨루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변수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싸우는 방식.

그것은 단 한 번도 전력이 아니었다.

특별한 수 싸움이 필요하지 않기에 단순하게 힘을 겨루었고,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왕을 적수로 여겼다.

방심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마왕을 쓰러트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득달같이 밀어붙였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오라가 번뜩였다.

마왕이 어떻게 공격하든 로만 드미트리는 반격해 왔고, 이건 그조차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방식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쿠르르르르르르르릉.

마왕의 존재감이 부풀었다.

그에게서 분출되는 마력이 마치 검은 태양처럼 거대하게 일렁이더니,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쓸어 버렸다.

엄청난 힘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피할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체라면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맞닥트릴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었다.

콰르르르르르릉.

어둠의 마력 속.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방어 초식.

철괴였다.

이번에는 회피가 아닌 정면에서 어둠의 마력을 파고들더니, 로만 드미트리가 다시 한번 천마군림보를 동반한 천마검법을 발현했다.

번뜩.

콰콰콰콰콰쾅!

엄청난 일격이었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태세를 전환하는 일격에, 마왕은 자신이 끌어올린 마력을 찢어발기며 치고 들어오는 힘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격에 퍼부었던 마력을 빠르게 회수했다.

콰앙!

콰콰콰콰콰쾅!

정면으로 충돌했다.

존재를 소멸시킬 것 같은 강렬한 충격에, 마왕은 상대의 존재를 일순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기회를.

파팟.

“……?!”

로만 드미트리는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치고 들어온 그가, 마왕의 가슴팍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푸확.

피가 튀었다.

막을 수 없었다.

두부처럼 갈라지는 외피에, 마왕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로만 드미트리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지금 밀리고 있다고?’

열세(劣勢).

그것은 마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로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실이었다.

* * *

파스.

파스스스스.

가슴팍에서 어둠의 마력이 새어 나왔다.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마왕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이대로라면 패배한다.’

믿을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현실이었다.

마왕은 지루하게 이어지는 삶에 자신을 위협할 강자가 나타나길 바랐지만, 정말 패배할 위기에 놓이자 조금도 즐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차이점이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살아온 그와는 다르게, 마왕은 약자로서 존재한 적이 없었다.

태어났을 그때부터.

마왕은 강력했다.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를 압도했고, 대혼란의 시기가 찾아오자 자연스럽게 마왕의 자리에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감각이 모두 예민하게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신의 경지에 오른 존재였다.

그를 상대로 방심했다간 패배할 것이고, 그를 상대하다 죽어 버린 3명의 군단장처럼 자신도 그런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마계의 절대자다. 그 누구를 상대로도, 나는 항상 절대자여야만 한다.’

실제로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치고 들어오는 모습에, 마왕은 궁지에 몰린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 또한 너를 인정한다. 그리고 너를 무너트림으로써, 나는 진정한 절대자로 거듭날 것이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마력을 일으켰다.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마왕의 권능이었다.

마계의 힘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곳은 그가 다스리는 세상이며, 피와 죽음을 기반으로 하는 어둠의 마력이 이 세상 전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마력이 미친 듯이 차올랐다.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존재감이 그를 거대하게 만들었다.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경쟁을 바라나.

패배를 원하진 않았다.

강자를 바랐으나.

대등하길 원하진 않았다.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을 쓰러트리기 위해, 마왕 또한 자신의 목숨을 걸 것이다.

* * *

양팔을 펼쳤다.

달려드는 로만 드미트리를 끌어안을 듯, 마왕이 거대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며 마력을 폭발시켰다.

“어둠이여, 나의 명을 따르라.”

번뜩.

콰라라라라락.

바람이 휘몰아쳤다.

새카만 바람이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더니, 세상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어둠의 마력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달려드는 길목에 따라 어둠이 작렬했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그 근방이 완전히 소멸했고, 끝까지 피하며 달려드는 모습에 마왕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확.

콰르르르르릉.

거대한 주먹이 내리꽂혔다.

이제는 로만 드미트리를 소인으로 보이게 할 만큼 거대해진 마왕이,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을 따라붙으며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 와중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피하지 않았다.

마왕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닥트리며, 기어코 그의 육체를 수차례 베어 버리고는 사각을 파고들었다.

팟.

콰르르르르릉.

격렬한 전투였다.

둘 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주변 일대에 생명체가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힘의 파동이 몰아쳤다.

마왕과 로만 드미트리.

천외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생명체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신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증명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죽음으로 직결될 상황이었다.

마왕의 마력이 작렬하면 로만 드미트리가 공간을 파고들며 달려들었고, 로만 드미트리가 반격을 시도하면 마왕 또한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거대한 육체를 활용했다.

부닥칠 때마다 세상이 들썩였다.

숨이 막힐 듯 결렬하게 뒤얽히는 상황에, 마왕과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이런 순간을 바라 왔다.’

눈앞의 상대.

단순히 강한 힘만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렇기에 천마검법을 적극적으로 발휘하지 않았고, 상황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삶의 밑바닥에 있을 때.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로만 드미트리에게,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순간은 익숙한 환경이었다.

콰앙!

콰콰콰콰쾅.

어떤 공격을 퍼붓든 맞받아쳤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폭발적으로 작렬하는 마력을 막아낸 뒤에 상대의 팔을, 반격하는 마왕의 공격을 피해서 이번에는 몸통을 베었다.

이미 회복되어 버린 가슴팍을 다시 한번 베어 버리는 순간, 마왕은 처음부터 자신의 육체를 내어 줄 생각이었는지 보랏빛으로 물든 눈에서 파멸적인 기운을 발사했다.

콰콰콰콰콰쾅!

격정적이었다.

서로의 존재가 뒤얽혔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는 순간, 마왕과 로만 드미트리는 본능적으로 기회를 포착했다.

확.

찰나의 순간이었다.

마왕이 마력을 일으켰다.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군림보를 거듭해서 밟으며, 정면으로 맞닥트리고자 후반부 초식의 힘을 끌어올렸다.

“로만 드미트리!”

쿠릉.

쿠르르르르르르르릉.

마왕이 눈을 부릅떴다.

이번만큼은 완전히 로만 드미트리를 찍어누르려는 그때, 그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마왕의 마력이 해일처럼 밀고 들어갔다. 당연히 그에 맞서리라고 생각했던 로만 드미트리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천마검법은 사용되지 않았다.

그간의 패턴으로 마치 그렇게 행동할 것처럼 유인한 뒤에, 로만 드미트리는 마력의 여파가 닿지 않는 유일한 공간을 파고들었다.

다급히 마력의 방향을 틀었다.

일반적인 존재들은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할 짧은 시간에, 마왕은 빠르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순간.

번뜩.

푹.

피가 튀었다.

로만 드미트리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는데, 그의 검이 하늘을 날아 마왕의 심장을 관통해 버렸다.

두 눈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처음 보는 기술이었다.

이기어검(以氣馭劍).

그것은 천마검법만큼 강력하진 않으나.

마왕의 허점을 완벽하게 공략하는, 지금의 마왕에게 가장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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