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에필로그, 새로운 나날들 (1)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동굴 안.
한줄기의 불빛을 벗 삼아, 상체를 전부 드러낸 한 사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훅.
훅, 훅.
강렬했다.
바람을 가르는 일격은 매우 일정했고, 매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전신의 근육이 폭발할 것처럼 꿈틀거렸다.
나이는 40대 이상. 수북하게 자라난 수염 사이로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만약 카이로 왕국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들었다면,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발론.
그의 이름이었다.
한때 넥스트 니콜라스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그는 카이로 제일검이었던 니콜라스 백작의 뒤로 빠르게 따라붙는 고수였다.
10년 전에도 4성의 검사였던 그는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가 분명히 죽었을 것이라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놀랍게도 발론은 실종했다던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동굴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쿠르르르르르릉.
검에서 오라가 피어올랐다.
점점 강렬해지는 불빛을 바라보며, 발론은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흉을 떠올렸다.
‘크로노스. 나는 절대 너희를 용서할 수 없다.’
10년 전.
서부 전선에서 그는 유일한 혈육이었던 동생을 잃었다.
크로노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동생이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발론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크로노스에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약소국에 불과한 카이로의 힘은 빌릴 수 없기에, 개인의 힘을 길러서 황제를 암살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폐관 수련에 돌입했다.
아공간에 충분한 식량을 비축해 두고, 10년 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했다.
마침내 성과가 있었다.
바깥에 있을 때는 아득하게만 보였던 5성의 경지에 돌입했으며, 그리고 며칠 전에는 그 이상의 경지에 발을 들였다.
그것은 니콜라스 백작의 조언이었다.
크로노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 6성의 오라 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발론은 그 경지를 복수의 목표로 삼았다.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6성의 오라.
환상적이었다.
동굴 안을 전부 밝히는 불빛에, 발론은 사나운 표정으로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는 이날을 위해 지난 10년간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성의 경지로 크로노스 제국의 괴물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10년을 기다려 온 만큼, 지금부터 크로노스의 모든 것을 하나씩 무너트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의 앞에 도달했을 때, 그는 기억하지도 못할 개미의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뼈에 새겨 줄 것이다.’
악에 받쳤다.
때가 왔다.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가, 그동안 꾹꾹 억눌렀던 분노를 폭발시킬 차례였다.
“기다려라, 크로노스.”
콰앙!
쿠르르르르르릉.
동굴을 무너트렸다.
이제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그 공간에, 복수에 미친 인간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 * *
“……예?”
발론이 넋을 잃은 반응을 보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는 했지만, 식당 주인이 내뱉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사람아. 한 10년 동안 세상과 선을 긋고 살기라도 했어? 당신이 말하는 크로노스 제국은 이미 몰락해 버린 지 오래야. 드미트리와의 전쟁에서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황제가 죽었고, 지금은 드미트리를 따르는 새로운 권력 체계로 물갈이가 되었다고. 참 웃긴 사람이네. 특히 3년 전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마계 정벌에 성공한 이후로, 대륙의 모든 국가와 백성들은 그분을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어.”
머리가 팽팽 돌았다.
대륙 정벌.
마계 정벌.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발론이 활동하던 시점에 크로노스와 발할라는 대륙의 양대산맥이라 불렸고, 드미트리는 변방의 영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가 드미트리 태생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무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니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히고 말았다.
일단은 말을 아꼈다.
식당 주인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마계 정벌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정말 대단했지. 그 어떤 영웅도 범접하지 못한 세계로 넘어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마계 정벌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내셨어. 하지만 그분이 정말로 대단한 이유는 그 이후의 행보 때문이야. 황제 폐하는 크로노스와 같은 독재적인 정치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의 백성들이 공존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쳤어. 물론 그 누구라도 드미트리가 정한 법도를 어긴다면, 신분을 막론하고 강력하게 처벌했지. 그리고 저기, 저기에 있는 저 사람 보이지?”
시선을 돌렸다.
뱃살이 인상적인 사내였는데, 그는 술잔을 치켜들며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마계 정벌에 참전했던 병사야. 내가 알기로 재산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녀석이었는데, 엄청난 전쟁 보상금을 받아서 저렇게 놀고먹고 살고 있어. 그게 드미트리가 다스리는 세상이 추구하는 바지. 확실한 보상. 일하고 노력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세상. 당신이 대체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보다 좋은 세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대화를 들을수록 발론은 점점 심각해졌다.
지난 10년.
복수를 위해 아득바득 발악했다.
그런데 막상 세상에 나오니, 복수는 모두 이루어졌고 세상은 그야말로 유토피아(Utopia)가 되었다.
식당 주인의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식당으로 향하며 목격했던 번화한 도시가,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이 세상을 얼마나 잘 다스리는지 알려 주었다.
감정이 복잡했다. 적어도 발론이 기억하는 세상은 불평등이 당연한 것이었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보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특히 크로노스는 본인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남들을 짓밟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세상이 변했다.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
웃고 떠드는 목소리.
복수의 대상을 잃었다.
크나큰 혼란에 발론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때, 식당 주인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저기 저 사람은 이번에 드미트리 친위대(親衛隊)에 합격한 사람이야. 원래 카이로가 고향인 녀석인데, 그토록 바라던 친위대에 들어가게 됐어. 참 대단하지. 크로노스가 몰락한 줄도 몰랐던 자네로서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드미트리 친위대는 현재 대륙의 모든 검사가 간절하게 바라는 꿈이야. 그곳에 들어갔다는 것은 부귀영화와 더불어 굳이 랭킹으로 증명해도 되지 않을 만큼의 실력을 보유했다는 의미기도 하지. 그리고…… 어어, 자네 어딜 가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주인이 뭐라고 하든 말든, 발론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혼란을 확실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들은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드미트리 친위대에 합격한 사람은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복수를 위해 단련했던 자신이 패배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상대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발론은 아껴 두었던 금화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툭.
“나랑 한번 붙읍시다. 승리한다면, 이 금화를 모두 드리겠습니다.”
* * *
밖으로 나왔다.
친위대에 합격한 사내가 흔쾌히 대결을 수락했고, 사람들이 몰려든 가운데 발론과 사내는 마주 보는 형태가 되었다.
룰은 없었다.
서로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붙기로 합의하자, 발론이 곧바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빠르게 끝낸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속전속결(速戰速決).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6성의 오라면 대륙 랭커의 수준이기에, 일반 친위대에 합격한 정도의 검사가 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격이면 충분했다.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힌 발론이 기습적으로 공격하려는 순간, 그로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번뜩.
콰앙!
반발력이 일었다.
전력은 아닐지라도 6성의 오라를 발현했건만, 자신이 힘에서 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상황을 파악할 시간은 없었다.
친위대 사내는 히죽 웃어 보이더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발론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카앙!
카카카카카캉!
속절없이 밀렸다.
오라에서, 그리고 실력에서 밀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내가 펼치는 검술은 명확한 체계가 있었고, 그것에 반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좋지 않은 방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은 겨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일반 검사에게 패배하고자 수련해 왔던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치고 들어오는 사내의 공격을 모두 맞받아치더니, 순간적인 틈을 노려 마력을 폭발시켰다.
‘승부다.’
쿠르르르르르르르릉.
일격.
끝을 낼 생각이었다.
오라를 일으키며 상대를 찍어 누르려는 그때, 발론은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비틀.
훅.
몸이 떴다.
다리를 강타한 공격에,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땅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콰당!
“……크윽.”
참담했다.
전신에서 밀려오는 고통보다도, 발론으로서는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당한 것은 상대가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신은 상대를 쓰러트릴 힘을 갖추었는데, 이상하게도 뭘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바닥을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머리 위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새도 그런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드미트리의 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다면, 제가 이렇게 쉽게 승리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때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의 방식.
세상이 변했다.
그것도 완벽하게.
* * *
날이 저물어갔다.
국립묘지에 도착한 발론은, 잘 관리되어 있는 묘지를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을 보였다.
[니콜라스 백작]
“……백작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제는 머릿속이 조금 정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 나타나, 드미트리 제국을 건국하며 이 세상을 평정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행했어야 하는 복수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그는 기뻐할 수도, 그렇다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확실한 건.
복수는 끝났다.
목표는 사라졌고, 한때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었던 니콜라스 백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도 잘 믿기지는 않습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대륙의 양대산맥이 단 몇 년 만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한낱 인간이 마계를 평정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만약 제가 만난 백 명의 사람이 모두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저는 카이로가 사이비 종교에 물들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동생이 죽은 날. 니콜라스 백작님이 제게 말씀하셨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크로노스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넋두리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백작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크로노스는 업보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졌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도, 세상의 순리가 크로노스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가족도, 복수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단 하나를 보고 10년의 세월을 살아왔건만, 그간의 노력은 그 어떤 것에도 사용될 수 없었다.
단순히 크로노스가 파멸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는 헛헛한 감정을 달랠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발론은, 묘지를 향해 다가오는 무리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론?”
기억의 괴리였다.
10년 전에는 한낱 소년에 불과했던.
연약한 아이였던 다니엘 카이로가, 국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존재로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