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9화 (459/615)

459화 에필로그, 새로운 나날들 (3)

때는 2년 전.

헨리 앨버트의 집무실을 찾아온 로렌 드미트리가, 갑작스럽게 고민이랍시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어제 에이미를 집에 데려다주는데, 살면서 처음으로 여자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수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히 저는 에이미를 좋아하고 고백하고 싶은데, 괜히 용기를 냈다가 친구 사이마저 망쳐 버릴까 봐 걱정이에요.”

시무룩한 강아지와 같은 얼굴이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인정받는 검사인데도, 헨리 앨버트의 눈에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피식.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좋은 아이였다.

로렌 드미트리라는 사람을 알아갈수록, 이 아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을 표현하는 상황에도 신중했다. 단순히 본인의 감정을 앞세워서, 에이미에게 선택을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그림이 만들어지기는 했는데…….’

에이미.

자신의 사촌 여동생이다.

사실 그동안은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랐고, 실제로 우연을 가장해서 여러 사람과 인연을 만들었다.

그중 에이미는 헨리 앨버트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고, 헨리 앨버트가 진심으로 축하할 만큼 에이미도 정말 좋은 아이였다.

하지만.

섣부르게 용기를 불어넣지 않았다.

둘이 맺어진다면 자신에게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헨리 앨버트는 멍청한 선택임을 알면서도 로렌 드미트리를 위한 조언을 말해 주었다.

“로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로렌 드미트리라는 사람은 이성을 만날 때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해. 너는 단순히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한 명의 학생이 아니라, 현재 대륙을 다스리는 드미트리 가문의 삼남이야. 황제 폐하의 핏줄이라는 의미지. 네 선택 하나에 세상이 들썩일 것이고, 네가 내뱉는 말에 사람들이 수군거릴 거야. 네가 에이미에게 마음을 표현한다는 의미에는, 그런 모든 것들을 감수하겠다는 각오 또한 포함되어야만 해. 네가 중심을 잃어버린다면, 에이미가 설령 너를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현실적인 부분들이 관계를 망칠 거야.”

“……그럼 제 마음을 표현하지 말라는 의미인가요?”

복잡한 문제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조언이었지만, 왠지 말리는 것 같아 시무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헨리 앨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로렌 드미트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듯 따뜻한 눈빛을 보였다.

“아니. 현실적인 문제들을 충분히 고민한 뒤에 네가 결정을 내린다면, 단언하는데 내가 아는 에이미라면 분명히 네 마음을 받아 줄 거야. 로렌. 너는 너 스스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드미트리라는 배경을 떼어 놓고 봐도 로렌 드미트리라는 사람은 정말 멋진 남자거든.”

활짝 웃었다.

그 말에.

로렌 드미트리는 큰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한 끝에 에이미를 찾아간 그는, 친구를 잃은 대신에 여자친구를 얻을 수 있었다.

* * *

로렌과 에이미가 사귄다는 소식이 들려올 무렵.

겹경사가 있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의 역사학과가 새롭게 개편되면서, 학과장으로 헨리 앨버트가 추대되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총장의 발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드미트리 제국의 건국을 기점으로 대륙의 역사가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현재를 기록할 의무가 있으며, 역사학과의 개편을 통해 새로운 인물들을 수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누가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할 것 같습니까? 저는 헨리 앨버트 교수야말로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역사적인 업적을 이룬 순간을 함께 한 인물이며, 그 누구보다도 드미트리의 역사에 해박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인물이 필요하다면, 단언컨대 그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습니다.”

사실상 끝난 게임이었다.

총장의 발언은 그만큼 강력했는데, 상황에 종지부를 찍는 두 번째 이유도 있었다.

바로 동료 교수들.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총장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헨리 앨버트 교수님은 드미트리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특히 드미트리의 삼남인 로렌 드미트리가 그를 따르는 만큼, 그분이 학과장의 자리에 오른다면 효과는 확실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만한 인물이 어디 흔합니까?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헨리 앨버트 교수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주변 교수들을 세심하게 신경 쓰는 분이기에, 학과 전체를 다스리는 일에 그만한 적임자는 없습니다.”

재밌는 현상이었다.

처음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때.

헨리 앨버트는 교육자로서 근본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다른 교수들의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실제로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의심하며 증명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평판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헨리 앨버트는 본인이 가진 것을 활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알았고, 차례로 주변 사람들을 공략하다 보니 모두가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극적인 변화였다. 사실 아카데미의 총장만 하더라도, 헨리 앨버트를 향한 사적인 감정이 배제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만장일치.

학과장으로 추대되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학과장의 자리에 오르던 날, 헨리 앨버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가문의 문제아였던 내가 학과장 자리에 오르다니. 이건 전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의 경험 덕분이야. 그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나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어.’

진심으로 웃었다.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손을 번쩍 들며,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겼다.

그렇게 취임식이 마무리되었다.

무대에서 내려와 이만 걸음을 옮기려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헨리 앨버트 교수님.”

꽃다발을 건네는 사내.

그는 바로.

파비우스 후작이었다.

* * *

다시 현재.

성황리에 진행되는 결혼식에, 파비우스 후작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헨리 앨버트를 힐끗 살폈다.

‘참 재밌는 인물이야.’

2년 전.

그는 헨리 앨버트를 주시했다.

왜냐고?

그의 행보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헨리 앨버트. 과거의 영광만 남은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 망나니처럼 살았던 인물. 그렇게 어중이떠중이로 인생을 마감할 줄 알았던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 전장에 같이 있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 학과장 자리에까지 올랐어.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재능을 개화한 것이겠지. 특히 최근에 로렌 드미트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보면, 그는 미리 알아서 나쁘지 않은 인물이야.’

전쟁이 끝나고.

파비우스 후작은 게으르게 살지만은 않았다.

하렘을 건설해 본인의 삶을 즐기면서도, 항상 주변에 돌아가는 상황들을 예의주시했다.

영원한 권력!

그 꿈을 위해서는 안주할 수만은 없었고, 그렇게 사람들과 술잔을 치켜들며 파티를 즐기는 와중에 헨리 앨버트의 소식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였다.

사람들은 이런 인물도 있다면서 단순히 웃고 끝냈다면, 파비우스 후작은 파티가 끝나자마자 헨리 앨버트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았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지난 2년간 헨리 앨버트와 인연을 맺었고, 이렇게 결혼식을 같이 찾아올 만큼의 사이가 되었다.

“축하드립니다, 학과장님.”

“제가 축하 인사를 받을 이유가 있나요. 제 사촌 동생이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좋을 뿐입니다, 하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파비우스 후작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어여쁜 신부가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미.

헨리 앨버트의 사촌 여동생.

앨버트가 드미트리와 피를 섞은 가문이 되었다는 사실은, 쥐뿔만으로도 승승장구했던 헨리 앨버트가 앞으로도 권력의 중심에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어떤 이들은 단순한 인맥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관계가 켜켜이 쌓여 지금의 파비우스 후작을 만들었다.

들떴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는 상황에, 파비우스 후작도 술잔을 치켜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드미트리의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확신했다

드미트리 제국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파비우스 후작은 죽는 그 순간까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로렌 드미트리의 결혼식 여파가 아직 가라앉지도 않았을 무렵, 그와 똑같은 주제로 분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흐으, 떨리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우리 오빠가 자기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잖아.”

여자친구인 마리의 말에, 루크먼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긴장한 기색을 애써 감추었다.

마리를 알게 된 것은 1년 전이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마리는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고, 당시 같은 근무처에 있던 루크먼은 마리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다.

처음에는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나이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살갑고 싱그러운 그녀의 외모에 그 말고도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부서의 사람이 고백을 준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루크먼은 늦기 전에 먼저 그녀를 찾아갔다.

그 결과 연인이 되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1년 동안 정말 서로 사랑하고 아껴 주는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 여자라면 결혼을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루크먼은 마리를 만나면서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 출신인 것 외에, 그녀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내게 말하기 힘든 가정사가 있는 걸까.’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디 출신인지.

항상 가족에 관한 질문을 말하면, 마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나중에 관계가 더욱 깊어지면 말해 주겠다면서 상황을 회피했다.

루크먼으로서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민 출신이었으나 그래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 마리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빈민가 출신일지라도, 루크먼은 그녀를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진실을 확인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는 말에, 마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어. 그럼 같이 우리 오빠를 만나자.”

만남이 성사되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마리의 가족을 만난다는 생각에, 루크먼은 어제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어떤 분이실까. 마리처럼 좋은 분이시겠지.’

정말 만약.

혼인을 망설이게 할 만큼 나쁜 사람일지라도, 마리와의 관계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람을 배려해 주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 주는 여자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루크먼에게, 이것은 관계를 확인받는 단계 이상으로 반드시 넘어야 하는 관문이었다.

“마리, 내게 힘을 줘.”

“으휴.”

쪽.

뽀뽀를 받았다.

의지를 다진 루크먼은,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무난한 외관의 레스토랑이었다.

사실 자신이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고급스러운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곳으로 예약했다.

주변에서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가격대가 그리 높지 않다 보니, 루크먼은 자신이 예상한 것처럼 마리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없었다.

조건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할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마침내 레스토랑에 도달하자, 마리는 마지막으로 루크먼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긴장하지 마. 우리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내가 아는 자기라면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알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에 여러 손님이 자리한 것이 보였다.

그중 한 자리.

홀로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에, 루크먼은 본능적으로 그가 마리의 오빠임을 알아보았다.

‘집중하자. 무조건 잘 보여야 해.’

심장이 뛰었다.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다가가자, 사내는 마리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마리.”

자신을 어필할 타이밍이었다.

루크먼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말 의젓하고 멋진 얼굴로, 먼저 마리의 오빠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마리의 남자친…… 헉?!”

순간.

눈을 부릅떴다.

루크먼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마리의 오빠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분을 실제로 뵙네요. 저는 마리의 오빠인 케빈이라고 합니다.”

오빠의 정체는 충격적이었다.

눈앞의 사내는.

드미트리의 악귀라고 불리는 케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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