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에필로그, 새로운 나날들 (4)
드미트리의 악귀.
전쟁이 끝나고도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드미트리의 악귀가 왜 악귀(惡鬼)라고 불리는지 알아? 그는 사람을 그냥 죽이는 법이 없어. 상대가 몇 명이든, 얼마나 강하든. 그런 차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서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모습이 마치 귀신 같다고 해서 악귀라고 부르는 거야.”
“예전에 유명한 사건이 있었잖아. 발할라를 초토화시켰던 아레스가, 드미트리를 배신한 대가로 드미트리의 악귀에게 개처럼 끌려가서 처형당했던 사건. 그는 그런 인물이야. 적으로 인식한 존재에게는 한때 동료였다 할지라도 피도 눈물도 없다고.”
케빈.
그 이름은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샐러맨더 대륙 변방에 가더라도, 케빈의 이름을 말하면 드미트리의 악귀라면서 사람들이 기겁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마리의 오빠라니. 자리에 앉은 그 순간부터 루크먼은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도 없이 반복한 시뮬레이션대로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하건만, 드미트리의 악귀를 표현하는 소문들을 떠올리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래서 내게 알리지 않았던 거구나.’
이제는 이해했다.
그녀가 왜 가족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는지.
그건 복잡한 문제였다.
드미트리의 악귀라고 불리는 케빈의 평판을 떠나서, 일반 사무직으로 일하는 마리로서는 자신의 배경이 밝혀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를 다닐 당시에도 그랬다.
드미트리의 실세를 오빠로 두다 보니, 가식적인 미소로 다가오는 사람들로 인해서 마리는 어려움을 겪었다.
권력이라는 것.
대단한 배경이라는 것.
처음에는 마냥 좋을 줄 알았지만, 마리는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서 배경을 배제한 자신을 바라봐 주길 바랐다.
처음에는 마리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케빈의 얼굴을 확인하자 어째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루크먼. 정신 차리자. 마리의 오빠가 어떤 사람이든, 나는 마리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인정받는 남자친구가 되어야만 해. 그리고 마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만큼, 분명히 소문처럼 악랄하지 않을 거야.’
마리를 믿었다.
루크먼은 용기를 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시작된 대화.
분위기는 생각보다 화기애애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상대의 템포에 맞춰 조곤조곤 말하는 케빈의 모습에 편견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동안 마리가 루크먼 씨에 대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는지. 마리가 그렇게 말하는 분이라면 분명히 좋은 분이시겠죠. 이번 자리는 어떤 평가의 의미가 아닌 단순히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자리니까,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쩌면 소문이 과장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드미트리의 악귀가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적으로 규정한 상대들을 확실하게 짓밟았을 뿐이지, 그렇다고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드미트리의 법도를 내세우는 로만 드미트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문제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확신이 생겼다.
마리와 함께라면.
케빈을 포함한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일이라면.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와인이 줄어들수록, 루크먼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케빈과의 대화를 진심으로 즐겼다.
그때였다.
와장창!
“꺄악!”
귀를 찢을 듯한 여자의 비명.
레스토랑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 * *
뻔한 상황이었다.
술기운이 오른 취객이 행패를 부렸고, 자신을 제지하려는 종업원의 모습에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불과 2년 전.
사내는 엄청난 부를 보유한 상인이었다.
그런데 경쟁 상단에 패배하면서 많은 것을 잃었고, 지금은 가성비를 생각하는 레스토랑을 찾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간의 울분이 폭발했던 걸까. 사내는 종업원마저 무시한다는 생각에, 테이블을 엎어 버리더니 의자 옆에 챙겨 두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와장창!
“꺄악!”
엉망이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상황에, 사내는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주변을 훑었다.
“뭘 봐, 이 새끼들아. 다들 뒈지고 싶어? 날 무시하는 새끼들은, 내가 친히 눈을 도려내 줄게.”
쿠르르르르릉.
검에서 오라가 피어올랐다.
취미로 익혔던 검술이 경지에 오를 정도로, 사내는 나름대로 검술에 재능이 있는 부류였다.
만약 이 자리에 그를 제지할 만한 실력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사내는 제대로 사고를 쳤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고기를 썰던 케빈과 눈을 마주쳤다.
그게 실수였다.
케빈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더니, 반대편에 있는 마리와 루크먼에게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요.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는 케빈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너 거기 가만히…… 컥?!”
확.
빠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분명히 상대가 먼발치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한번 깜빡일 사이에 사내의 얼굴이 테이블에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비명과 함께 눈동자가 풀렸다. 오라를 제대로 활용하기도 전에, 그는 단번에 제압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콰직, 콰드드득.
“크아아아아악!”
검을 잡은 손을 짓밟았다.
비명을 지르며 발악을 하든 말든, 케빈은 덤덤한 얼굴로 종업원에게 말했다.
“경비대 좀 불러 주시겠어요?”
“……아, 알겠습니다.”
“긴급이라고 말하면 금방 도착할 거예요. 그럼 뒤처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퍽.
얼굴을 걷어찼다.
그대로 기절해 버리는 모습에, 그만 시선을 거두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색한 적막이 맴돌았다.
방금까지와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케빈은 평온한 기색을 되찾았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까지 말했죠?”
그 순간.
루크먼은 확신했다.
좋은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마리의 오빠는 드미트리의 악귀가 분명하다고.
만약에 여자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날이 찾아온다면, 자신은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닐 것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저 사내처럼.
* * *
마리와 헤어지고.
케빈은 오랜만에 한스를 찾아갔다.
여전히 드미트리 가문의 일로 분주한 한스의 뒤를 쫓으며, 케빈은 방금 겪은 일들을 말했다.
“성실하고 착해 보이는 친구였어요. 본인이 하는 일에 자부심도 있고, 무엇보다도 마리를 정말 사랑한다는 게 눈에 보였어요. 다행이죠. 사실 빈민가에서 살아왔던 저희에게 일상적인 행복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마리와 남자친구의 모습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어요.”
“좋은 일이네요.”
한스가 일을 하면서도 대답해 주었다.
사람들은 케빈을 무서워했다.
드미트리의 악귀라는 소문은 사람들과의 거리를 떨어트렸고, 사회적인 위치와는 별개로 케빈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한스는 정말 소중한 존재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음 따랐을 때부터 자신을 보살펴 준, 악귀라는 소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한스를 만날 때면 말이 많아졌다.
“만약에 마리가 정말 결혼하는 날이 찾아온다면, 저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호화스러운 결혼식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리고 두 부부가 살아갈 공간을 드미트리 한복판에 만들어 줄 거에요.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허름한 건물이 아니라, 오로지 마리와 그 남편이 모든 이야기를 채울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아기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면, 둘이 현실적인 문제에 허덕이며 점차 서로를 막 대하지 않도록 제가 모았던 돈 일부를 마리에게 줄 생각이에요.”
“제가 아는 마리 아가씨는 현실적인 문제로 달라질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듬직한 오빠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명히 현명하게 자신의 가정을 이어 나갈 겁니다.”
“그렇겠죠. 그래도 오빠로서 이것저것 해 주고 싶은 마음일 뿐이에요.”
지난 세월.
케빈은 막대한 부를 모았다.
전쟁 보상금 명목으로 로만 드미트리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하사했지만, 그동안은 따로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발렌티노 상단에 맡겨 둔 상태였다.
돈을 맡겨 둔 것만으로 매년 이자가 붙은 덕분에, 며칠 전에 찾아온 발렌티노의 사람이 이자가 상당하다고 말했었다.
자신의 동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돈을 사용하고 싶었다.
케빈이라는 존재는 스스로를 위해서보다, 가족과 같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다.
“그런데 요새 주군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궁금했다.
로만 드미트리.
세상이 평화를 되찾은 이후, 그는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궁 안에서 황제로서 역할에 충실할 뿐, 케빈조차도 로만 드미트리를 만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로렌 드미트리의 결혼식에서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건재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케빈은 문득 그와 전장을 누비던 순간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스가 말했다.
“잘 지내고 계십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사람들이 황제 폐하의 존재를 잊어 가는 상황에, 괜히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이해합니다.”
케빈의 말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 갔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 한들.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한스가 일을 멈추더니 케빈을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어느 날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평화로운 시대에는 지도자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평화라고. 그분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이 세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고, 반대로 그분이 필요하지도 않을 만큼 현재 살아가는 삶이 만족스럽다면 이 나라가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겠죠. 황제 폐하는 그런 분입니다. 전쟁으로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모두가 그분의 행보에 집중했지만, 평화로운 삶에 영웅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케빈은 묘한 울림을 느꼈다.
더는 로만 드미트리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그도 자신과 같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모습에.
한스가 웃음을 보였다.
“궁금하시다면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케빈 님은 그럴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 * *
케빈은 황실로 향했다.
한스의 말에 용기를 냈고, 로만 드미트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친위대의 수장.
페르난도가 케빈을 반겼다.
“황제 폐하는 훈련장에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길을 열어 주었다.
훈련장이라니.
역시 로만 드미트리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랜만에 따로 만날 생각에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훈련장에 도달했다.
그런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케빈은 망부석처럼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로만 드미트리.
그가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보통 검사들은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두르며 육체를 단련하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휘두르는 검은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미세하게 움직였다.
1분에 1cm씩. 천천히 검이 내려갔다.
땀으로 흠뻑 물든 얼굴과 집중한 표정은,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바가 보였다.
그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케빈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대체 어떻게 살아오신 겁니까.’
3년 전.
로만 드미트리는 마왕을 물리쳤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했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검술을 다시 보았을 때, 케빈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범접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르고도, 그는 한순간도 자신을 갈고닦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소름이 돋았다.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저물고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거두며 훈련장 한편을 바라보았다.
“따로 보는 건 오랜만이구나, 케빈.”
담담한 음성.
똑같았다.
예전이나, 그리고 지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