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에필로그, 새로운 나날들 (5)
자리를 옮겼다.
정원을 걸으며, 케빈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주군. 제가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3년 전. 주군은 마왕을 쓰러트리며,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감히 그 누구도 주군의 권위를 넘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루었던 일들이 주군의 존재를 증명하며, 매년 치러지는 대회가 그것이 비약된 과거가 아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노력하시는 겁니까. 주군의 발밑에 있는 자들도 평화로운 시대에 녹아드는데, 주군은 어찌하여 3년 전 그날처럼 치열하게 살아가시는 겁니까.”
로만 드미트리를 보자마자 알았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빛, 땀으로 흠뻑 물든 얼굴, 감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훈련의 형태.
발전했다.
3년 전에도 하늘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로만 드미트리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케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성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지 않더라도, 드미트리 제국은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것이다.
대체 왜.
적이 없는 투쟁(鬪爭)을 이어 나간단 말인가.
진심을 물어보는 케빈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걸음을 멈추며 정원을 바라보았다.
“네 말처럼 더는 치열하게 살아갈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케빈. 그것은 지도자의 영역이 아니다.”
케빈을 이해했다.
전생.
과거에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이미 무림을 정벌했는데도, 매일같이 훈련에 몰두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그 이유를 물었었다.
“백성들은 평화를 누려도 좋다. 이 나라의 안위를 고민하기보다, 본인들의 앞날과 가정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도자 또한 평화에 물들어 버린다면, 언젠가는 예상치 못한 재앙이 우리 모두를 위협할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마왕의 존재를 예상했을까? 변방에 있는 드미트리 가문의 출신인 내가 제국의 황제가 되리라고 예상했을까?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도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의 앞날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태평성대(太平聖代).
천마의 존재감이 무림을 장악했다.
나날이 강해지는 그의 무력에, 사람들은 감히 반란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위험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때부터 대비해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언제고 세상에 닥칠 위험에 미처 몰랐다는 변명을 하지 않도록, 내 명령 한마디에 죽어 나간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질 수 있도록. 나는 일말의 불안감도 허락할 수 없다.”
사실 사람들은 반란을 시도할 이유가 없었다.
백중혁의 독재는 이상향이었다.
모두가 걱정하는 독재의 단점이, 적어도 백중혁의 통치 아래에서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면.
제지하지 않았다.
각자의 삶을 존중해 주고, 상식의 틀 안에서 살아가게 했다.
그렇기에 전생의 그가 죽은 날.
무림은 세력의 구분 없이 모두 엄청난 슬픔에 물들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존재다. 평범하게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내게 허락되지 않는다.”
삶의 밑바닥.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택했던 그때부터, 천마의 삶에 평화란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앞서 걸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케빈은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야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절대자가 짊어진 짐을.
* * *
케빈은 집으로 돌아왔다.
휑했다.
뻥 뚫린 가슴만큼이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난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수년 전.
로만 드미트리를 처음 만났을 때, 케빈은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목숨을 걸었다.
이를 악물며 자신의 팔을 잘라 버렸을 정도로, 빈민가에서 바라보았던 평민들의 삶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루어 낸 지금. 황당하게도 케빈은 갈피를 잃어버렸다.
분명히 지금과 같은 현실을 바랐건만, 케빈은 그 무엇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는 그 원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만난 직후.
케빈은 자신의 진심을 알았다.
‘나는 이제 평범해질 수 없어.’
결핍투성이의 삶.
매일 갈망하며 살았다.
드디어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갈망이 경쟁자들을 향한 열등감으로 변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감정이었다. 사람들은 평범한 삶에서 행복감을 느꼈다면, 케빈은 존재 가치를 다른 곳에 두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위험하지 않았고,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자신은 그리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나태해졌다.
평화로운 나날들.
케빈은 시들어 갔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 가는 상황에, 그는 혼자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조금 전.
주변에 크리스의 근황을 물었다.
매년 랭킹전에서 우승해 놓고도 로만 드미트리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그는, 지금도 다음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열을 올린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대륙 제일이 되는 것이다.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불가능한 상대임을 알면서도, 그래도 목표를 나아가며 살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주군의 말이 옳아. 사람은 모두가 평범하게 살 수만은 없어. 마리는 다행히도 평범하게 살아갈 시기를 놓치지 않았지만, 행복해 보이던 두 남녀의 모습은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달라.’
끼익.
몸을 일으켰다.
세상은 드미트리의 악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믿음의 대상이었던 존재가 공포의 대상으로 변했으나, 케빈은 그러한 사실들은 개의치 않았다.
‘저 또한 강해지겠습니다. 먼 미래에 드미트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그들이 그 무엇도 할 수 없도록 강력한 힘을 갖추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존재 의미입니다. 제게 인간다운 삶을 부여한 주군을 위해서라면, 설령 죽는 그 순간까지 평화로울지라도 저는 주군을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에 웃으며 죽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결핍을 채워 준 유일한 존재.
로만 드미트리는 그에게 신이고, 삶의 의미였다.
케빈은 곧바로 검을 들고 훈련장으로 나갔다.
지금까지는 매번 크리스를 상대로 무릎을 꿇었지만, 앞으로도 패배자로 남지만은 않을 것이다.
* * *
그 시각.
고급스러운 저택의 회의실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벌써 네 번째 시도입니다. 사실상 ‘그분’의 마음을 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는 불가능을 말하려는 자리가 아닙니다. 방법을 말하세요, 방법을!”
분위기가 험악했다.
상석에 앉은 존재.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에, 사람들은 눈치를 살피더니 저마다 해결책을 말했다.
“일단 상대는 부와 명예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동안은 어떻게든 일반적인 사람들이 탐을 낼 만한 조건을 내걸었지만, 지금부터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미인계가 어떻겠습니까? 전 대륙에서 미인들을 불러 모아, 그분의 마음을 회유하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옳거니. 그거 좋네요! 아무리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이성의 영역은 다른 문제입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명확한 꿈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낱 미인계에 흔들릴 것 같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인계 자체가 먹힐 부류가 아닙니다. 이미 그분의 외모에 사랑을 표현하는 여인들이 주변에 널렸는데, 저희가 대가성으로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스승을 공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듣기로는 매우 사이가 돈독하다고 하던데.”
“그러다 심기를 건드리면 뒷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지난 1년.
기회가 생길 때마다 협상을 시도했지만, 상대의 단호한 반응에 매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문제는 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기에,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들의 수장.
그의 의지였다.
그가 포기를 말하기 전까지, 그를 모시는 사람들로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한 사내가 말했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조건을 모두 거절한 것이라면, 어떤 조건을 내세운들 그분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차리라 진심을 내비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그것을 바란다. 무엇을 원하든 조건을 말하라. 타협을 위해서라면 억만금일지라도 내놓는다고 말한다면, 진심 어린 마음에 타협의 여지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단어들은 누가 내뱉느냐에 따라 임팩트가 다릅니다. 주군은 대륙 제일의 상단인 발렌티노를 이끌고 계십니다. 발렌티노 후작님이 결단을 내린다면, 반드시 길은 생길 것입니다.”
상석의 존재는 바로 발렌티노였다.
심각하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현재 크리스가 보유하고 있는 검은 내가 간절하게 소유하길 바라는 것이다. 퍼스트 노-네임. 그 시리즈의 상징성은 대단하다. 현재 드미트리의 미래라고 불리는 크리스와 케빈이 그 한 자루를 두고 경쟁했으며, 크리스의 승리로 퍼스트 노-네임의 주인이 정해졌다. 그런 사연이 쌓인 검은 나와 같은 수집가들에게는 엄청난 보물이지.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더는 새로운 검을 내놓지 않는 지금, 나는 그것을 반드시 가지고자 한다.”
열망을 드러냈다.
발렌티노 후작은 그동안 일에 매진했다.
미친 듯이 사업을 확장하며 세력을 키웠고, 반드시 대륙 제일의 상단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고 말았다.
1년 전부터 사람들은 발렌티노 상단을 최고로 여겼다.
마계 정벌 당시 발렌티노 상단이 행했던 헌신을 기억하기에, 그것들을 기반으로 단 2년 만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준비를 끝냈다.
이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크리스를 만났지만, 3번의 만남에서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다.
발렌티노 후작이 말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사람들은 내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내 존재 의미는 유형의 가치를 확보하는 것에 있다. 정공법(正攻法)을 택하겠다. 단순히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수준의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전부를 줄 수 있다는 의지를 드러낸다면 크리스조차도 무조건 거절하지는 못하겠지. 걱정하지 마라. 이 거래로 많은 것을 잃을지라도, 발렌티노는 여전히 최고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명을 따릅니다.”
“명을 따릅니다.”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이곳은 그의 왕국이며, 발렌티노의 욕망이 세계 최고로서의 원동력임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고로.
이번만큼은 크리스도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 * *
다음 날.
크리스를 찾아갔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그의 앞을 가로막더니, 발렌티노 후작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크리스 님. 그동안 세 번의 제안을 했고, 크리스 님은 단 한 번도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해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하사한 검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때로는, 아무리 소중한 것일지라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기도 합니다.”
“하아, 발렌티노 후작님.”
크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세 번이지, 그동안 발렌티노 후작은 끊임없이 자신의 검을 탐했다.
이해는 했다.
발렌티노 후작의 성향을 알기에, 그가 강렬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도 그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퍼스트 노-네임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이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이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케빈을 대신해서 자신을 찾아온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절하려 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선을 그으려 했는데, 발렌티노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슥.
“받으십시오.”
무언가를 건넸다.
백지였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그것을 바라보자, 황당할 정도로 충격적인 발언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백지입니다. 수천 자는 적을 수 있는 그 공간이 빼곡하게 채워질 정도로, 크리스 님이 바라는 모든 것을 적으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발렌티노 가문의 이름을 걸고 그 안에 적힌 것들을 전부 대령하겠습니다. 조건은 아시다시피 단 하나입니다.”
힐끗, 허리춤을 보았다.
그곳에 매달린 검.
퍼스트 노-네임을 확인하는 순간, 발렌티노 후작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그것을 제게 주신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발렌티노는 그럴 만한 힘이 있습니다.”